[향토문화] 조선 시대 도시계획 원형..성읍1리 성읍민속마을(城邑民俗村)
상태바
[향토문화] 조선 시대 도시계획 원형..성읍1리 성읍민속마을(城邑民俗村)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6.23 07: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00여 년간 정의현에 의해 관리되었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성읍1리 성읍민속마을(城邑民俗村)

중요 민속자료 제188호(1984년 6월 7일 지정)
위치 ;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1리 일대(면적 790,747㎡)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 있는 민속 마을.

성읍1리_민속마을구역도
성읍1리_마을전경


[개설]


성읍 민속 마을은 設村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충렬왕(1275-1313) 때 노목이 우거져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1300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태종16년(1416) 지금의 성산읍 고성리에 정의현을 설치했는데 태종17년 정의현감 이이(李貽)는 전라도 관찰사를 통하여 당시의 실정을 보고했는데 그 내용은

〈정의현을 본읍으로 삼으라는 교지가 있사오나 이곳에 합속된 4현이 한라산 남쪽에 연달아 있어 만약 정의현을 본읍으로 삼는다면 호아현, 홍로현은 거리(相去)가 3식(1息은 30리)이 남짓하므로 그 곳 백성이 왕래하며 공사나 목장을 고찰하는 일 등에 있어서 그 폐가 적지 않으니 정의의 중앙지인 서촌 진사(眞舍, 晋舍)나 토산(土山) 중에서 지리가 적당한 곳에다 읍성을 설치하고, 만약에 방어할 경우라면 현감은 순풍인 때 군대를 이끌고 정의진에 이르러 고수방어(固守防禦)하게 하십시오.〉라 되어 있다.

조정에서 5년 후인 세종4년(1422) 12월 도안무사 정간에 명하여 정의성을 진사리로 옮기도록 하고, 그 이듬해인 세종5년에 3읍 백성을 出役(출역)시켜 제주목 판관 김치겸이 감독하여 석축을 했다. 이렇게 하여 정의현 치소는 고성을 떠나 진사리(지금의 성읍리)로 가게 된 것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1423년 1월 9일부터 1월 13일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정의읍성을 쌓을 당시 성읍리는 진사리라고도 불렸으며, 정의읍성도 진사성이라 불렸다.

이렇게 하여 세종5년(1423) 정의현청이 지금의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로 옮겨진 이래 1914년 군현제가 폐지될 때까지 500여 년간 정의현에 의해 관리되었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그런 이유로 정의고을 또는 정골 등으로 불리어 왔다.

성읍 민속 마을은 유형·무형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고, 제주도 중산간지대 마을 중 그 특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구역이며, 옛 마을 형태의 민속 경관이 잘 유지되고 있어 중요 민속 자료 제188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과거에는 지방민속자료 5호였다)

성읍 민속 마을은 제주시에서 남동쪽으로 34㎞, 표선리에서 북쪽으로 9㎞ 떨어진 위치로 해발 125m의 중산간 마을이다. 고을은 분지의 가운데에 자리잡았는데 지세가 약간 도드라진 듯한 곳에 위치한다. 성곽의 크기는 객사 대문을 중심으로 지름이 대략 250보(步)이며, 성곽은 가로 60첩(堞), 세로 50첩으로 계획되었다고 한다.

영주산을 배경으로 중산간 평지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성읍민속마을은 어두운 회색빛의 용암돌을 그렁저렁 쌓아올린 돌담과 새(띠)로 촘촘히 엮어 이은 밝은 빛깔의 지붕이 대조를 이루는 집들이 아직도 많은 전형적인 옛 제주 마을이다. 야트막하면서도 둥근 지붕은 주변의 오름들과도 썩 잘 어울린다.

[변천]


제주도는 대부분의 용천수가 해안에 분포되어 있어, 유서 깊은 자연 취락은 대개 해안변을 따라 발달해 있다. 이 때문에 해안에서 무려 8㎞나 떨어진 중산간에 조성된 성읍과 같은 마을은 제주에서는 드믄 편이다.

이는 대정현과 정의현을 따로 둔 이유가 제주목의 행정력을 제주의 각 지역에 미칠 수 있도록 의도한 것이었는데, 정의현성이 있었던 고성리 지역이 제주의 동남부 지역을 관리하기에는 지리적 위치가 적절치 않은 것으로 판단되어 지금의 성읍으로 행정 중심을 옮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고성 지역에 정의현성이 있었던 기간이 태종16년(1416)에서 세종5년(1423)까지 겨우 7년만의 일이다.

반면 성읍 지역에서는 1914년 군현제가 폐지될 때까지 거의 500년 동안 정의현청의 관리를 받아온 유서 깊은 마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성읍 마을은 고종원년(1864) 8월에 정의현과 대정현을 승격하여 군수를 두게 했는가 하면, 제주목의 관할에서 벗어나 직접 전라도 관찰사의 관할 밑에 두었다. 이처럼 정의·대정현에 변지군수를 두고 보니 제주도의 특수한 지정학적 사정으로 말미암아 제주목과 양군간의 체통이 문란하여 행정상 불편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고종17년(1880) 2월에는 양읍을 다시 현으로 환원하고 과거 방식대로 현감을 두게 했다.

고종32년(1895)에는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제주를 부(府)로 고쳤으며 목사를 관찰사로 바꾸었는가 하면, 판관 제도를 참사 제도로 고쳐 군수를 겸하게 하였으며 경무청도 신설하였다.

광무10년(1906)에는 고종33년(1896)에 부활했던 목사 제도를 폐지, 군수를 두었으며 서기 1914년에는 정의, 대정의 2군을 폐지하여 제주군에 합병하였다. 서기 세종5년(1423) 이후 약 5세기 동안, 정의현의 도읍지로 행세했던 성읍 역시 현청 소재지로서의 역할을 마감하게 된다.

1915년 5월 1일을 기하여 제주군 제도가 폐지되고 도제(島制)가 실시되고, 지금의 표선면을 동중면(東中面)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로써 성읍리는 동중면의 평범한 하나의 리(里)이면서 단지 면소재지일 정도로 전락하게 되었다.

1935년 동중면은 표선면으로 개칭하게 되었으며 1946년 군제 실시에 따라 남제주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5세기 동안의 장구한 세월을 현청 소재지로서 번화롭던 성읍은 군현 폐지 후에도 면사무소 소재지로서의 명맥은 유지해 왔으나, 서기 1934년 면사무소마저 표선으로 옮겨짐에 따라 성읍 마을은 행정 중심 마을에서는 잊혀지게 되었다. 1961년 지금의 성읍1리로 개편되었고, 상,하,동,서 4개 동에 303가구 1382명의 주민들이 주로 농업, 축산 등에 종사하고 있다.


[형태]


성읍 민속 마을은 제주도 동남쪽 중산간 지대로서 해안에서는 9㎞, 해발 125m의 높이에 위치한다. 성읍 마을의 성곽의 크기는 동서로 약 160m, 남북으로는 약 140m 정도의 규모로 귀 죽인 네모꼴을 하고 있다.

성은 객사의 대문을 중심으로 정남축 축상에 남대문과 내대문 및 기두정[장군대]를 일치시키고, 동서의 대문도 객사 대문과 동서 버금축을 함께하고 있다.

성읍 민속 마을이 정의현의 도읍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성읍 주변이 여느 마을과 다른 풍수적 여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마을의 북쪽으로는 영주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있다. 성읍 마을에서는 천미천 건너로 남산봉이 다가서며, 이러한 모습은 한라산을 조산(祖山)으로 하고 영주산을 진산(鎭山)으로, 남산봉을 안산(案山)으로 삼으면, 모지오름·따리비오름·설오름·갑선이오름으로 연결되는 우백호가 되고, 남산봉 밖으로는 좌청룡이 연결된다.

형국(形局) 안에는 천미천(川尾川)이 반달꼴로 흐르고 그 반달의 안쪽에 읍성이 있으며, 남산봉 남쪽으로 수구(水口)가 열린다.

고을 중심점인 객사 대문에서 남북으로 선을 그으면 북쪽 성벽의 의두정과 남대문 위를 지나며, 동서로 그으면 서대문과 동대문을 지난다. 동헌은 북쪽 중심인 의두정에서 서쪽으로 15°를 튼 축선(軸線) 위에 위치한다.

이 축선은 고을의 남쪽 능선인 갑선이오름과 아심선이 사이 처진 곳을 향하는 바, 그 사이로 저 멀리 남쪽의 표선리에 있는 매봉이 등성이 너머로 엿보인다. 이것을 규봉(窺峯)이라 하여 풍수에서는 대단히 흉하게 여긴다. 이것이 보이지 않도록 등성이에는 커다란 성곽 모양의 규봉막이를 하고 남문 앞에는 액막이인 거북대를 만들어두었다고 한다.

고을의 형국은 크게 보면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이고, 작게 보면 행주형(行舟形)이 된다. 장군대좌형이란 장군이 마주 앉아 있는 형상이라는 뜻으로서 앞뒤 좌우 대칭형 지세를 말하며, 방어에 대단히 유리한 분지임을 의미한다.

행주형은 우리 나라 고을의 터에 주로 쓰이는 지세로서 사람과 물자를 가득 싣고 막 떠나려고 묶어둔 배란 의미이다. 이런 형의 땅에는 사람과 재화가 풍부하게 모인다고 믿는다. 이곳에는 배에서 가장 중요한 키나 돛대, 닻을 갖추어야 길하다고 생각하며, 이곳에 우물을 팠을 때는 배 밑바닥에 구멍이 난 것과 같이 흉하다고 믿는다. 이 마을의 닻은 남산봉에 해당하고 돛대는 마을의 큰 나무가 그 구실을 한다고 전한다. 또한, 같은 이유로 마을 안에는 일체의 우물을 파지 않았다.

도로의 모양은 성곽 밖의 경우 평지 마을에서 자주 쓰이는 둥근고리꼴 길을 만들고 성곽 안에는 고을에서 보통 쓰는 ‘우’자꼴 길을 기본으로 삼는다. ‘우’자의 ㅇ에는 고을에서 가장 중요한 관아를 두고 ㅡ는 동서길이 되며 ㅣ는 남문로에 해당한다. 이것을 근간으로 활꼴길과 막힌 도로를 배치해서 고을의 도로망을 구성하고 마을 전체에 고르게 집들을 배치한다.

‘T’자형의 주요도로 외에는 직선으로 만들어진 길이 없다. 이것은 《산림경제》 복거조(卜居條)의 “똑바로 오는 길은 충파(衝破)라 일러서 좋지 않으니 반드시 구부리고 굴려야 한다.”는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마을 내 모임의 장소는 대개 길이 만나는 지점에 만들어지는데, 큰나무를 두고 걸터앉을 수 있는 평상이 있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제주의 옛마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하다. 성읍에서는 동헌 앞 공문동산 나무그늘이 가장 크고 사람들도 많이 모이는 장소이며, 그 다음으로는 길이 만나는 벌원 방죽, 동문 앞, 노다리방죽 등이다.

성읍 민속 마을의 가옥들은 길에 면한 경우에는 대개 짧은 올레를 두었으며, 이문간을 둔 후 살림집을 진입축에서 비켜 앉도록 하였다. 다만, 길 안쪽에 있는 집의 경우에는 긴올레를 두고 이문을 두지 않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긴올레는 농촌에서 많이 이용되는 방식인데, 짧은 올레가 많은 성읍은 도시형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짧은 올레를 두었을 경우에 이문을 만들고 살림집을 비켜 앉도록 하는 것은, 활꼴의 긴 올레를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부의 사생활을 보호하기도 하면서, 집으로 들어오는 길목이 구부러진 것이 길하다는 믿음과 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황]


성읍 민속 마을의 정의현성 안에는 약 110호의 가옥이 있으며, 성 밖에도 많은 가옥들이 있다. 19세기초의 건물을 중심으로 그 이전의 건물도 꽤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독특한 구조기술로 말미암아 육지와는 다른 건축기술을 발견할 수 있다.

평면은 一자 겹집이며, 안거리와 밖거리 2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배치방식은 二자 모양과 모로 앉은 모양 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가 더욱 우세하다. 안거리의 방위는 정남쪽이 월등하게 많으며, 다음은 동남쪽과 그 사이가 차지한다. 마을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 5채가 있다.

성읍 마을은 오백년 동안의 도읍지였으므로, 유형 무형의 문화재가 꽤 많이 있다. 국가 지정 문화재로는 천연기념물 제161호인 느티나무 및 팽나무 등 거목은 유서 깊은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으며 마을의 경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다.

성읍마을에서는 봄에 이 느티나무에 싹이 트는 것으로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고 하는데, 동쪽에 먼저 잎이 싹트면 정의고을(지금의 성읍민속마을) 동쪽지방에, 서쪽부터 돋아나면 정의고을 서쪽지방에 풍년이 든다고 전해온다.

중요 민속 문화재로 조일훈 가옥, 한봉일 가옥, 고평오 가옥, 이영숙 가옥, 고상은 가옥이 있다. 이외에도 제주도 지정 문화재로 정의향교와 일관헌 등의 건축물이 있으며, 정의현 객사가 복원되었다. 또한 민요와 돌하르방(12기=다른 지역의 돌하르방에 비해 얼굴이 둥글넓적하고 눈썹이 그려져 있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초가집, 연자매, 古碑, 안할망당, 광주부인당, 쉐당, 문호당, 방언 등 숱한 문화유산들이 있고, 포제도 해마다 열리고 있다. 정의현성의 성곽과 남산봉의 봉수대, 풍부한 전설, 고유의 민속자료 등 아직도 보호하고 보존해야 할 가치 있는 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기타 건물로서 객사(客舍)·향청(鄕廳)·무학청(武學廳)·진무청(鎭撫廳)·가솔청(假率廳)·작청(作廳)·현사(縣司)·사창(司倉)·서별창(西別倉)·군기고(軍器庫)·대동고(大同庫)·평역고(平役庫)·형옥(刑獄)·남성루(南城樓)·의두정(倚斗亭)·한동루(漢東樓)·남대문·동서대문 등의 건축물이 있었다. 이들 건물들은 대개 그 위치 정도만 알려져 있으며 그것의 규모는 전해지지 않은 것이 많다. 그러나 현존하는 향교 건물을 볼 때 제주도 특유의 평면 구성과 구조 기법을 지녔으리라 추측된다.


[의의와 평가]


성읍 민속 마을은 조선 시대의 도시 주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성읍의 가로 체계 및 주요 시설물의 배치 방식 등은 당시의 도시 계획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 마을 내에 많은 문화재와 유산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라도 그 자체를 잘 보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과거의 훌륭한 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현재 그곳에서 생활해야하는 주민들의 삶과 어떻게 조화롭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현재 차량이 마을 중심을 관통할 수 있는 도로를 만든 점, 슬레이트 가옥이 여전히 혼재하고 있는 점, 도로를 시멘트 등으로 포장하여 경관의 불균형을 느끼게 되는 점과 같은 것들은 마을 구조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본래의 성읍 마을이 가지고 있었던 주요 도로 및 쉼팡과 같은 휴게 시설, 연자방아 등이 현재에도 높은 인지도를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성읍민속마을보존회와 성읍1리마을회가 성읍민속마을 정의현감 행차 및 전통민속재현 행사를 하기도 한다.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집필 신석하·양성필, 조선왕조실록 중 탐라록, 제주의 문화재,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헤드라인제주160826]
《작성 16091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