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한국 박물학계의 선구자..토평동(영천동) 석주명기념비와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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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한국 박물학계의 선구자..토평동(영천동) 석주명기념비와 흉상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6.29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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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산 접류 목록'은 한국인의 저서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도서관에 소장

토평동(영천동) 석주명기념비와 흉상 

위치 : 서귀포시 토평동 2240-3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흉상 설치=현대)

석주명
토평동_석주명동상전경

 

석주명은 일제 강점기 서귀포에서 활동한 곤충학자이며, 제주학의 선구자이며, 자칫하면 일본에게 빼앗겼을 한국의 생물분류를 주도한 한국 박물학계의 선구자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1908년 양력 10월 17일 평양에서 석승서(石承瑞)와 전주 김씨 김의식(金毅植)의 3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양 시내에 종업원이 100여 명에 달하는 요리집을 운영할 정도로 부유한 사업가였는데, 사업으로 번 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할 만큼 민족의식이 뚜렷했다.

어머니는 당시에는 귀한 신식 물자인 타자기를 구해줄 정도로 자식 교육에 많은 열정을 보였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석주명이 민족 문제와 학문 연구에 관심을 갖게 했다.

석주명의 생년월일이 1908년 11월 13일로 잘못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1908년 음력 9월 23일은 양력으로 10월 17일이다.

이처럼 그의 출생일[양력]에 오류가 생기게 된 것은 누이동생 석주선이 1968년 11월 석주명의 유고집 『제주도수필』[보진재, 1968]을 발간하면서 발문에 “오빠! 오는 음(陰) 9월 23일[1968년 11월 13일]이 바로 오빠의 회갑이어요.”라고 쓴 것을 염두에 두고, 그의 생년월일을 1908년 11월 13일로 오해한 데서부터 비롯된다.

석주명 회갑일인 1968년 음력 9월 23일은 양력 11월 13일이지만, 그가 태어난 1908년 음력 9월 23일은 양력 10월 17일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잘못 알려져 온 석주명의 생년월일은 1908년 10월 17일로 정정(訂正)되어야 한다.

석주명이 살았던 시기는 학문적 상황으로 볼 때, 지식분화 이전의 모습과 이후의 모습이 겹치는, 전통학문의 끝자락과 근대학문의 첫머리에 해당한다.

13세인 1921년에 평양 종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서울의 명문학교였던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지만, 이듬해 동맹휴학으로 다닐 수 없어 중퇴하고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로 옮겼다.

송도고보 학생 시절에 석주명은 집에서 떠나서 공부했는데, 한때 음악에 정신이 팔려 공부를 게을리 하기도 했다. 집에서 많은 생활비를 보내 주는 데다가, 공부를 감독할 부모가 옆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낙제 과목이 나올 정도로 성적이 나쁘게 나오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방학 동안 공부에 힘썼다.

졸업 후인 1926년 3월에 일본에서 손꼽히는 농업전문학교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를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합격하였다. 같은 해 4월에 농학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농·생물학을 전공하였으나 은사 오카지마 긴지[岡嶋銀次]의 권유로 1927년 4월에 박물과로 옮겨 나비 연구를 하다 1929년 졸업하였다.

석주명은 중화민국의 타이완에서 곤충 채집 여행 때 비를 맞지 않으려고 나무에 모인 하루살이들을 채집할 만큼 끈기가 있는 학생이었다.

귀국 후 모교인 송도고보의 교사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나비연구를 시작하였다. 휴일이나 방학이 되면 나비를 찾아 전국 각지를 누비고 다녔다.

그가 한국산 나비에 대해 독보적인 권위를 갖게 되자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의 한국지회는 그에게 한국산 나비에 관한 총목록을 출판할 것을 권했다.

그 때 정리된 책이 'A Synoni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조선산 접류 총목록)'이다. 이 책으로 석주명은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석주명의 나비에 대한 연구열은 더해 갔고,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교사직을 사직하고 경성제국대학의 촉탁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936년 하버드대학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국토대순례의 채집여행중 1936년 여름방학인 7~8월 2개월간 제주도에 머물면서 제주와 첫 인연을 맺었다.

연구밖에 모르는 열정으로 인해 그는 75만 개체의 조선산 나비를 조사하여 800여개가 넘는 잘못된 학명을 정리했으며, 한반도 전역에 걸친 채집으로 250여종에 이르는 조선산 나비에 대한 충실한 분포연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짧은 시간에 수많은 나비표본을 확보한 비결은 학생들에게 여름방학 때 곤충채집 숙제를 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학생들의 여름방학 곤충채집 숙제의 시초가 됐다고 한다.

그는 남북분단 이전 시기를 살았던 덕분에 우리나라 전역을 샅샅이 둘러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250종의 나비의 분포를 우리나라 지도와 세계지도에 그려 넣은 『한국산접류분포도』[유고집, 1973]는 우리나라 나비연구를 향한 그의 집념의 결실이다.

이 책은 누이동생 석주선이 한국 전쟁 피난 시절 배낭에 넣고 다니며 보존했다가 1973년에 발간한 것이다. 대한민국 나비 250종이 분포하는 지역을 종마다 각각 한국 지도와 세계 지도 한 장씩에 붉은 점으로 표시한 지도 500장으로 편집되어 있다.

석주명이 창안한 ‘개체 변이에 따른 분포 곡선 이론’을 바탕으로 외국 학자들이 잘못 분류한 학명 중 844개를 바로잡았고, 한국 나비도 248종으로 최종 분류하여 1940년에『조선산 접류 목록』을 통해 발표했다.

『조선산 접류 목록』은 한국인의 저서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도서관에 소장됨으로써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가 되었다.

석주명의 나비 표본을 높이 평가한 미국 모리스 박사는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석주명을 후원하였으며, 일본인 학자들은 석주명의 성인 세오키아(Seokia, Seoki)를 신종 나비 학명에 붙이기도 했다.

당시 석주명은 배추흰나비 16만여 마리의 무늬를 비교했는데, 그 결과 무늬가 다르다고 하여 다른 종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비는 같은 종류라고 할지라도 성, 계절 등에 따라 몸의 크기와 무늬가 다르다. 그런데도 성급하게 무늬와 색상만으로 다른 종류라고 잘못 생각하던 일본 학자들의 관행을 바로 잡은 것이다. 나비의 분류에 관한 80편이 넘는 논문을 남겼다.

나비를 채집하느라 전국 산하(山河)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지역이 달라지면, 자연과 문화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1943~1945년까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소속인 생약연구소 제주시험장의 연구소장으로 자원해 근무하면서 제주도와 두번째인 동시에 마지막 인연을 맺은 그는 연구에 온갖 열정을 쏟아 '제주도 방언집' 등 제주도에 대한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다.

그가 당시 소장으로 근무했던 ‘경성제국대학교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은 지금은 ‘제주대학교 부설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로 바꿨다. 현재 이 연구소 근처에는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석주명 기념비와 흉상이 건립되어있다.

석주명의 '제주도 방언집'에 대해(강영봉 제주대 교수)=이 자료집은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방언자료집이라는데 그 값어치가 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인 학자가 만든 전국 방언자료집이 있을 뿐이었다. 특히 이 방언집이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자료집이라는 점은 접어두고서라도 제주방언을 '제주어(濟州語)'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선구자적 안목의 결과다.

방언을 포함한 우리말에 대한 그의 관심과 재능은 나비 이름을 짓는 데서도 잘 나타났다. 새로운 나비를 발견할 때마다 우리 말로 된 예쁜 이름을 붙여주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굴뚝나비’는 굴뚝처럼 까맣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고, ‘봄처녀나비’는 봄에 금방 나왔다가 사라져서 처녀처럼 수줍음을 타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또 서귀면을 중심으로 한 남부어와 제주읍을 중심으로 한 북부어를 구분해 수록하고 제주어와 외국어를 비교해 다룬데다 언어를 통해 제주문화를 반영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석주명의 학문세계 : 나비학과 에스페란토, 그리고 제주학(전경수 서울대 교수)=석주명의 학문은 나비에서 시작해 나비에서 끝이 난다. 나비학과 에스페란토는 그가 남들로부터 내용과 방법론을 배워서 전개한 것이지만 제주학은 석주명이 스스로 개척했다는 차이점을 보인다.

그는 제주도학이란 용어를 사용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지역연구라는 개념이 제대로 등장하지도 않았던 그 시절에 그는 이미 지역에 대한 학문의 틀을 생각하고 있었다.

제주도의 역사와 자연에 대한 광범위한 문헌자료들을 수집한 것은 제주도학의 기초를 닦으려는 의지였다고 생각된다. 제주 재임 때 유채와 겨자 씨앗을 들여와 시험재배했는데 지금 유채꽃 큰 잔치는 선생의 덕을 봤으니 도민의 생업마저 도운 셈이다.

석주명은 제주도의 언어·풍속·습관 속에 우리나라의 옛 모습 내지 진정한 모습을 말해주는 자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진정한 한국의 자태를 찾으려면 제주도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면서, 제주도의 자연·인문·사회 분야에 뛰어들어 『제주도방언집』[1947], 『제주도의 생명조사서』[1949], 『제주도관계문헌집』[1949], 『제주도수필』[유고집, 1968], 『제주도곤충상』[유고집, 1970], 『제주도자료집』[유고집, 1971] 등의 ‘제주도총서’를 발간함으로써 제주학의 초석을 다졌고 통합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석주명의 『조선나비이름의 유래기』[1947]와 『한국본위 세계박물학연표』[유고집, 1992]는 그가 통합학자이자 학문 융복합의 선구자임을 유감없이 드러내주는 저작들이다.

그는 ‘조선적 생물학’을 주창하면서 당대의 여러 분야 학자들과 국학(國學) 운동을 펼쳤던 민족주의자[(nationalist]이면서, 학문적 성과물은 세계의 학자들로부터 객관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 국제주의자[internationalist]였다.

그리고 그는 제주 지역 연구의 필요성을 깨닫고 제주학의 초석을 놓은 지역주의자[localist]이면서, 세계와 소통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국제어인 에스페란토 보급운동을 펼치면서 ‘에스페란토교과서 및 소사전’을 편찬한 세계주의자[globalist]였다.

또한 석주명은 우리나라 산천을 가장 많이 섭렵한 여행가이자 산을 가장 많이 오른 산악가였다. 이처럼 다양한 석주명의 모습을 한 마디로 규정짓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그의 이질적인 여러 모습들 속에는 서로 연결되는 맥이 있다.

그는 민족문화가 융성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문화의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하고, 표준어도 수도권의 언어를 채택하기보다는 전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식민지 학자로서 인류문화가 융성하기 위해서는 각 민족문화의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하며, 세계평화를 위해서 국제어[세계어]는 강대국 언어가 아니라 세계인들 모두가 배우기 쉬운 중립어라야 한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일관되게 지역과 세계, 부분과 전체, 특수와 보편 등을 아우르려고 하였던 것이다.

한편 석주명은 스스로 반(半)제주인임을 밝힌 바 있다. 그는 제주도에 세 차례 방문하거나 체류했다.

첫 번째는 1936년 7월 21일부터 8월 22일까지 제주도의 나비를 채집하기 위해 1개월 남짓 체류한 것이고, 두 번째는 1943년 4월 24일부터 1945년 5월까지 경성제대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현재 서귀포시 토평동 소재 제주대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에 부임하여 2년 1개월간 근무한 것이고, 마지막으로 1948년 2월경에 제주도를 찾아 제주섬을 일주한 바 있다.

나비박사, 에스페란토 운동가, 제주학의 선구자 등의 석주명 별칭들은 서로 이질적이어서 전혀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지적 편력과 학문적 성과들은 융복합의 시대와 세계화[global]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석주명은 1945년 5월 수원 농사시험장의 병리곤충학 부장, 1945년 12월 조선에스페란토학회 창립 발기인, 1946년 9월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연구부장, 1950년 6월 한국산악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한국 전쟁 도중 1950년 9월 말 서울에 있던 국립서울과학관이 폭격을 맞으면서 그가 20여 년 동안 75만 마리의 나비를 채집하여 만든 나비 표본이 모두 타고 말았다. 당시 석주명은 너무 상심이 커서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

1950년 10월 6일 서울 수복 전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버린 국립과학관의 재건을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친구가 고구마를 삶았으니 먹고 가라고 붙잡는 통에 시간을 지체해서 허겁지겁 뛰어가다 대낮에 술을 먹던 국군 무리 중 하나와 부딪쳤는데 그 자가 양복을 입은 석주명을 보고 "저기 인민군 소좌가 간다" 라며 붙잡아 총으로 쏴죽이고 빨갱이 두목을 잡아 죽였다고 낄낄대며 시신은 가마니로 싸서 개천에 던졌다고 한다. 행인들 중에는 석주명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지만 총 든 자들의 기세가 무서워 감히 변호해주지 못했다 한다.

죽기 직전 그는 "나는 나비 밖에 모르는 사람이오."라고 외쳤고 그게 그대로 유언이 되었다. 국내 생물학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은 이렇게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시신은 회의가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그를 찾던 친구와 가족들에게 발견되었다.(나무위키) 석주명의 유품 및 관련 사료 50여 점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보문사 탑골승방[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에 안치되어있던 유골을 1981년 9월 23일 남한산성 밑 능골에 안장하였다. 석주명은 1964년 건국공로훈장 추서받았으며, 1998년 문화관광부의 ‘4월의 문화인물’에 선정되었고 2003년 서귀포시 토평동 네거리에 석주명 기념흉상이 건립되었다.

2005년 서귀포시에서 ‘석주명기념사업회’를 창립하였고, 2009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석주명의 여동생인 석주선도 유명한 인물로 한복 등 한국의 전통 옷 및 장신구 연구의 선구자였다. 1.4 후퇴 때 피난을 가면서 자신의 자료들과 함께 석주명의 나비 표본 및 연구 문서들을 함께 챙기려 했는데, 석주선의 자료는 옷이란 특성상 부피가 너무 커서 모두 가져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석주명의 나비 자료만 챙기고 자신이 연구한 복식자료는 보따리에 싸서 편지를 써놓고 기둥에 매달아 놨는데 피난에서 돌아와 보니 남겨뒀던 옷은 단 한벌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석주선은 처음부터 다시 옷들을 모아야 했고, 이렇게 모은 옷들은 단국대부속박물관에 기증해서 그녀의 이름을 따 석주선기념박물관을 세웠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석주명은 서서히 조명 받기 시작했다. 탄생 100주년이 된 해인 2009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기리는 움직임은 미미했다.

제주에선 2003년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 인근에 기념비가 건립되고, 2006년 석주명기념사업회 발기인 대회가 열렸지만 이후 과정은 더디기만 했다.

제주대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가 2011년 펴낸 '석주명기념사업 활성화방안 수립조사 보고서'에서 방향성이 제시된 석주명 기념관, 나비공원 조성 사업도 지지부진해 왔다.

뒤늦게나마 지난해 '석주명 기념관 건립 추진 위원회'가 발족하면서 건립 부지 마련 등이 속도를 내고 있다. 서귀포시는 석주명이 연구했던 제주대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의 건물과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최근 제주대와 교환할 토지를 확보하고 협의 과정을 남겨두고 있다.

서귀포시는 이 절차가 마무리되면 농림축산식품부의 '영천동 농촌 중심지 활성화 사업'과 연계해 석주명 기념관을 조성할 예정이다.

서귀포시 관계자는 "석주명을 테마로 영천동, 토평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기본 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고 했다.

2016년 5월19일에는 서귀포시장과 산림조합중앙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나비와 제주학의 선구자 석주명 선생 기념관 건립 및 기념사업 교환부지 마련을 위해 2개 기관이 상호 토지매각 및 교환하는 내용으로 협약을 체결했다.

참고 ;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위키백과, 나무위키, mimint뉴스160518, 한라일보160811
《작성 1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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