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가장 많은 경찰 인명 피해..함덕리 함덕지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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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가장 많은 경찰 인명 피해..함덕리 함덕지서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8.27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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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3일 새벽에 습격했다는 지서 중에서 함덕지서는 제외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함덕리 함덕지서터 

위치 : 조천읍 함덕리 1272번지
시대 ; 대한민국(1948)
유형 ; 국가기관(경찰지서) 터

함덕리_경찰함덕지서터
함덕리_경찰함덕지서터

 

4·3 사건 당시 제1구(현재의 제주시 지역을 관할) 경찰서 함덕지서가 있던 곳이다.

현재는 건물 없는 공터인 이곳에 세워진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진 표석이 있다.

〈제1구 경찰서 함덕지서 옛터 ; 이곳은 1948년 4월 3일 공비들이 습격한 이후 5월 13일 2차 습격으로 불에 타 없어진 옛 함덕지서가 있던 4·3 유적지입니다. 이 날 300여명의 공비들은 지서주임 강봉현(康鳳現) 경사(경감으로 추서)를 살해하여 불태웠고, 근무 경찰관 2명은 불태워 죽였고 중상 경찰관도 순직했습니다. 순직 경찰관은 강봉현(康鳳現), 김사승(金思承), 고선삼(高善三), 부두천(夫斗千), 양맹세(梁孟世), 송만석(宋萬石), 이인옥(李仁玉)입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2014년 12월 19일〉

이 표석에는 세운 사람이 적혀 있지 않다.

현재 함덕파출소는 약 200m 서쪽인 함덕리 1252-4번지에 있다.

많은 자료들에는 〈무장대는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화북, 삼양, 외도, 조천, 함덕, 세화, 신엄, 애월, 한림, 대정, 남원, 성산 등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라고 정리되어 있는데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는 〈함덕지서에서는 이 날(1948년 4월 3일) 무장대에 의한 직접적인 공격은 없었지만 경찰관 2명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관해서는 무장대와 연계된 경찰관 1명이 다른 경찰관 1명을 납치해 무장대에 합류했다는 설이 있는데 무장대 측 자료(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도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제민일보 취재반이 발간한 《4·3은 말한다②》에는 〈함덕지서에서는 이 날 무장대에 의한 직접적인 습격은 없었고 다만 장모 순경 등 경찰관 2명이 집에서 나간 뒤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던졌다. 이에 대해서는 무장대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설과 경찰관 스스로 입산했다는 2가지 설이 있다.

많은 증언자들은 후자쪽에 비중을 두어 이야기하였다. 그 날 행방을 감춘 장순경의 경우 나중에 산쪽에 가담해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증언도 있다.이런 점으로 미루어 장순경이 동료 경찰관을 설득해 같이 산으로 올라갔거나 혹은 동료를 납치했을 가능성도 있다.〉라고 썼다. 또한 이 책의 4·3일지에도 4월 3일 무장대가 11개 지서를 습격했다고 썼다.

따라서 4월3일 새벽에 습격했다는 지서 중에서 함덕지서는 제외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4·3은 말한다②》의 4·3일지에는 〈1948년 5월 13일 함덕지서, 대낮에 술파티 도중 무장대 기습받아 경찰관 4명 숨지고 3명 납치. 납치된 경찰관들도 나중에 大屹 지경에서 시체로 발견. 지서 건물 전소. 경찰관 가족 1명 피살.〉이라고 되어 있다.

《4·3은 말한다③》에는 함덕지서 피습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제주섬에서의 토벌작전이 본격적으로 착수된 1948년 5월 13일 무장대의 역습으로 2건의 큰 사건이 터졌다. 하나는 함덕지서 습격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저지마을 방화사건이었다. 함덕지서 습격 사건은 한낮에 무장대가 방심한 경찰의 허를 찌른 사건으로 경찰관 인명피해가 7명에 이른 점, 저지 방화 사건은 4·3 초기에 토벌대가 아닌 무장대의 손에 의해 민가 100여 채가 불태워졌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해안 마을인 조천면 함덕마을은 당시 지서까지 설치되어 있었지만 오히려 산쪽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김양근(金良根, 제주농업학교 학생회장. 서울농대 출신으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조직부장 등을 역임)을 비롯하여 이 마을 출신 좌익활동가도 적지 않았다. 5·10 선거 때에는 마을 주민 대부분이 중산간마을 대흘리 속칭 곱은다리로 피신, 투표를 보이콧했다.

마을에는 추익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도 조직되어 있었지만 대청단원들은 신변의 위험을 느껴 선거 실시 전에 이미 마을을 떠나 제주읍내 등으로 피신했다. 선거 기간 동안 마을에 남아 있던 경찰 가족이나 우파 성향의 사람들도 대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숨어 지냈다. 그러다 보니 선거 날 함덕 마을은 인적이 뚝 끊기고 지서만 남아 있는 형국이었다. 선거는 자동적으로 실시되지 못했다.

사태가 처음 일어난 4월 3일 함덕지서에는 5명의 경찰관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2명이 그 날 무장대에 의해 납치됐다가 그 중 한 명이 산쪽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마을 주민들에게 전해졌다. 함덕지서에는 그 뒤 경찰관이 증원되었다. 5·10 선거 무렵에는 10명 가량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지서는 여전히 마을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산으로 피신했다가 나중에 마을 특공대장이 된 한 증언자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분위기는 경찰이 있어도 힘을 못 썼습니다. 밤만 되면 청년들이 수십명씩 무리를 지어 왓샤 왓샤 소리치며 마을을 돌아다녔지만 순경들은 지서를 지키기에 급급했습니다. 청년들이 산에 많이 올라간 이유 중의 하나는 산쪽의 힘이 더 세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보에서도 산쪽이 경찰보다 훨씬 앞섰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신변의 위험을 느껴 경찰관과 이야기하는 것조차 피하는 분위기였지요.”

함덕지서 피습 사건 하루 전인 5월 12일 인근의 조천마을에서 식육장수 이성봉(와산 출신), 한동은(함덕 출신)부부가 피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유는 산쪽에서 이들 부부에게 경찰관에게 돼지고기를 팔지 말도록 수 차례 경고했는데도 이를 듣지 않아 살해됐다는 소식이었다.

함덕지서 경찰관들은 간밤에 이웃마을에서 있었던 식육장수 부부의 피살 소식을 전해 듣고 심란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난 무렵 이 마을 경찰후원회장이 삶은 돼지고기를 들고 지서에 찾아왔다. 지서에서는 곧바로 조촐한 술잔치가 벌어졌다. 무장대의 지서 습격은 후원회장이 지서 밖으로 나간 직후에 일어났다.

이로 인해 경찰후원회장이 산쪽과 내통되어 있었으며 그가 지서 밖으로 나오면서 오른손을 들자마자 콩볶듯 집중사격이 시작됐다는 주장과 후원회장의 이 날 방문은 산쪽의 습격과 무관하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특히 후원회장의 가족들은 산쪽과의 연계설은 모략이라고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어쨌든 무장대는 지서의 담벽마다 붙어 있었으며 술잔치를 벌이고 있던 경찰관들을 향해 총구를 들이대고 있었다. 지서 안에는 망루대도 있었으나 대낮이라 방심, 보초를 세우지 않은 것이 경찰의 실책이었다. 오후 4시께 무장대의 집중사격으로 지서주임 강봉현(성산면 수산 출신) 경사가 그 자리에서 숨졌다. 다른 경찰관들은 갑자기 당한 일에 혼비백산, 응전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채 자신의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일부 경찰관들은 지서 동쪽 담을 뛰어넘어 인근의 돼지우리 속에 숨어들었다가 무장대의 손에 생포됐다. 이 때 붙잡힌 경찰관 3명은 중산간지대인 대흘리 지경으로 끌려가 피살됐다. 또 경찰관 2명은 지서 건물 속에 숨어 있다가 지서 건물이 불타는 바람에 질식사했다.

미24군단 「G-2보고서」에는 〈5월 13일 함덕지서 피습 사건 때 행방불명됐던 두 경찰관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 시신들은 불탄 경찰지서의 폐허 속에서 발견됐다〉고 기록돼 있다.

이런 와중에 지서 앞에서 경찰관 가족도 살해당했다. 이 날 숨진 민간인은 함덕 출신 김병택(金秉澤, 당시 외도지서 주임) 경사의 큰어머니 홍기조(洪基祚) 여인이었다. 홍 여인은 마을 분위기가 뒤숭숭해지자 제주읍내로 피신하려고 차편을 구하기 위해 지서에 나와 있었다.

운명의 장난일까, 홍 여인은 습격 사건 바로 직전에 함덕을 떠날 수 있었으나 짚신 한 짝 때문에 그곳에 머물다 변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그 사건이 나기 전에 제주읍내로 가던 경찰 트럭이 함덕에 들렀고 홍 여인도 그 트럭에 타려고 하는데 짚신 한 짝이 벗겨져 땅에 떨어졌는데 그걸 주우려고 내린 순간 무심하게도 트럭은 그냥 떠나 버렸다는 것이다.

이 날 함덕지서를 점령한 무장대는 마을 주민들을 지서 앞으로 모이도록 했다. 그리고 지서주임 시체와 함께 지서를 불태웠다. 또 동쪽에서 함덕으로 들어오던 버스의 운전사가 무장대의 습격으로 부상을 당했다.

이 날 밤 늦게까지 함덕마을은 무장부대와 왓샤부대의 시위 소리가 진동했다. 때로는 ‘만세, 만세’소리도 터져 나왔다. 그런데도 토벌대의 출동은 없었다. 미군 6사단 「G-2보고서」에는 이 날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5월 13일 하오 4시께 약 300명이 함덕리를 습격, 가옥 3채와 지서 건물을 불태웠다. 경찰 1명이 사망했고 1명이 부상, 5명이 행방불명됐다. 지서 화재로 옆에 있던 사람 1명이 부상당했으며 한 경찰관의 어머니가 피살됐다. 한 버스 운전사는 운전 도중 버스 안에 던져진 수류탄에 의해 부상당했다.〉

경찰 보고로는 300명이 습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증언자들은 무장 세력이 수십명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는 마을 동조자들까지 포함된 숫자가 부풀려진 것 같다고 풀이했다. 또 지서 보조원인 김경문(金京文)도 이웃집 눌(낟가리)에 숨어 있다가 죽창에 찔려 나중에 숨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이 미군 정보 기록에 의하면 경찰관의 피해는 사망 1명, 부상 1명, 행방불명 5명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행방불명자는 모두 사체로 발견되었고, 부상자까지 나중에 숨져 결국 7명의 경찰관이 희생된 것이다. 이 사건은 4·3의 전 과정을 통해 지서 습격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경찰의 인명 피해를 당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제주시 충혼묘지 경찰관 묘역에는 이 사건으로 숨진 강봉현, 김사승, 고선삼, 부두천, 양맹세, 송만석, 이인옥 등 7명의 순직비가 세워져 있다. 이들은 모두 2계급 특진되었다.

이 사건 후 경찰에서는 함덕에 응원경찰대 30명을 추가 배치했다. 이들 육지에서 온 경찰대는 당시 함덕국민학교(함덕리 1004-3, 1004-5번지)에 주둔하며 인근 지역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토벌전을 전개했다.

2007년 재향경우회 제주도지부에서 작성한 《전사자 및 순직자 명단》에는
함덕지서에서 전사한 경찰관으로
1948-04-03 제주시 연동 출신 강성언(康成彦) 경위
1948-05-13 성산읍 수산리 출신 강봉현(康鳳現) 경감
함덕리에서 전사한 경찰관으로
1948-05-13 평남 성천 출신 김사승(金思承) 경위
1948-05-13 제주시 삼도2동 출신 고선삼(高善三) 경위
1948-05-13 제주시 봉개동 출신 부두천(夫斗千) 경위
1948-05-13 구좌읍 평대리 출신 양맹세(梁孟世) 경위
1948-05-13 구좌읍 종달리 출신 송만석(宋萬石) 경위
1948-05-13 전북 진안 출신 이인옥(李仁玉) 경위
1949-05-25 제주시 출신 오영봉(吳永鳳) 경감
1949-06-05 제주시 출신 이병춘(李炳春) 경위
1949-06-05 제주시 출신 이철수(李喆洙) 경위
등으로 나와 있다.
《작성 17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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