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3)-김정(金淨)의 전기(傳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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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3)-김정(金淨)의 전기(傳記)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0.17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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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전 호에 이어서 계속)

5.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사적(事蹟)

 

(1) 제주 오현단 내 유허비(遺墟碑)
(2) 판서정(判書井) 터 (제주 동문시장 내)

 

(3) 순창 삼인대비(三印臺碑)

 

삼인대(三印臺)는 조선 중종(中宗) 10년(1515년)에 폐비(廢妃) 신씨(愼氏)의 복원을 주창하는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현감 류옥(柳沃)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과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작은 건물이다.

폐위된 연산군의 처남으로 중종반정때 피살된 좌의정 신수근의 딸인 폐비 신씨는 후환을 염려한 반정공신 박원종 등에 의하여 폐출되었다.

그 후 새 왕비가 된 장경왕후 윤씨가 사망하자 이 세 사람은 각자의 직인을 소나무 가지에 걸고, 관직에서 물러남은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렸다. 후에 유림들은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비와 함께 비각을 세우고 삼인대라고 불렀다.

삼인(三印)이란 세 개의 인장이라는 뜻이다.

(4) 대전 충암(冲庵) 고택의 신도비명(神道碑銘)

 

(1) 찬자(撰者) :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2) 전자(篆者) : 김광현(金光炫)

(3) 서자(書者) : 강학두(姜鶴斗?)

(4) 각자(刻者) : ?

※ 《월사집(月沙集)》에 실린 충암의 신도비명 원문(영인본)

 

【원문(原文)】

【판독(判讀)】

刑曹判書 贈諡文簡公 沖菴 金先生 神道碑銘 幷序

嗚呼 賢邪進退 係世道消長 士林之禍 自古有之 而未有慘於己卯 己卯諸賢之前後死若竄者甚多 而沖菴先生 受禍最酷 至今聞者心驚魄奪 見有尋師友談道學者 輒掩口而相戒曰 不聞神武上變之事乎 士氣萎靡而不振者殆數十年 憸小之凶于人國 乃至於是矣 逮乎仁廟末命復官 宣廟初年贈諡 人始稍稍知君子小人之別 一邦之士論乃定 然而新學後生 徒知己卯諸賢之爲可師法 而其居家行誼 立朝言論 不能

【역문(譯文)】

‘형조판서(刑曹判書) 증시(贈諡) 문간공(文簡公) 충암(冲菴) 김 선생(金先生) 신도비명 병서’

아아, 어진 이와 사특한 이의 진퇴는 세도(世道)의 소장(消長)에 관계되는 법이다. 사림(士林)의 화(禍)는 예로부터 있었으나 기묘(己卯, 1519)년보다 참혹했던 적은 없었다. 기묘제현(己卯諸賢)이 전후로 죽거나 찬축(竄逐)된 이가 매우 많았는데 충암 선생이 받은 화가 가장 혹심하여 지금까지도 그 얘기를 듣는 사람은 심장이 놀라고 넋이 달아나며, 사우(師友)를 찾아 오도(吾道)를 담론하는 사람을 보면 문득 입을 가리고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신무문(神武門)에서의 상변(上變)을 듣지 못했는가?” 한다. 이리하여 사림의 기운이 시들고 진작되지 못한 지가 거의 수십 년이니, 간사한 소인배가 국가에 흉독(凶毒)을 끼치는 것은 이러한 지경에 이른다.

인묘(仁廟) 말년에 이르러 어명으로 복관(復官)되었고, 선묘(宣廟) 초년에 증시(贈諡)가 내려졌다. 이에 사람들이 차츰 군자와 소인의 구별을 알게 되고 일국의 사론(士論)이 이에 정해졌다. 그러나 신학후생(新學後生)은 한갓 기묘제현이 본받을 만하다는 것만 알 뿐 그분들의 거가(居家)에서의 행의(行誼)와 조정에서의 언론 등은 처참한 살육의 와중에서 다 기록되지 못하였기에,

 

【원문(原文)】

【판독(判讀)】

盡記於斬伐銷鑠之餘 多士慨然 恐久益無傳 先生之孫金掌令聲發 一日謂不佞曰 夫以吾先祖之卓卓 而墓道尙闕顯刻 是實斯文之欠典 而不肖孫之責也 敢徼惠子一言 願子圖之 噫 詩不云乎 高山仰止 景行行止 不佞生晩 常恨未得趨承下風於函丈之間 今於不朽之託 安敢以文辭衰拙 不足以自效爲解 而重孤慕用之誠乎 謹按狀 先生姓金 諱淨 字元沖 沖菴號也 新羅敬順王之後 六代祖將有 版圖判書 始家於報恩 曾祖諱滸 平澤縣監贈都承旨 祖諱處庸 贈兵曹參判 考諱孝貞 戶曹正郞贈吏曹判書 妣金海許氏 判官允恭之女 以成化丙午 生先生 生有異質 俊穎出人 學語便知文字 未十歲 已通四書 一經不待提誨 能自課勉 常語同遊諸兒曰 大丈夫生斯世 偏小如此邦 不足爲也 慨然有登東山之志 年十四 中別試初試第一名 辭以年幼 不赴會試曰 科擧之文 不足學也 沈潛聖賢書 夜以繼日 十五而孤 持喪悉遵禮制 事母夫人 至誠色養 十九 中司馬 二十二 擢文科狀元 旋拜正言 選玉堂修撰 賜暇書堂 歷兵曹佐郞正郞副校理獻納 爲養除忠淸都事 召拜校理 薦吏曹正郞 又乞外出 補淳昌郡守 乙亥 章敬王后賓天 先生與潭陽府使朴祥上疏 請

【해석(解釋)】

선비들이 개탄하며 시일이 오래갈수록 더욱 세상에 전해지지 못할까 걱정한다.

선생의 손자 장령(掌令) 김성발(金聲發)이 하루는 불녕(不佞)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우뚝한 사적으로도 묘도에 아직 비석이 없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의 흠전(欠典)이며 불초손(不肖孫)의 책임입니다. 감히 그대의 글을 받고자 하니, 그대는 생각해 주십시오.” 하였다.

아, 《시경(詩經)》에 이르지 않았던가.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큰길처럼 따라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불녕은 늦게 세상에 태어났기에 늘 직접 모시고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왔던 터이니, 이제 비명(碑銘)을 지어 달라는 부탁에 어찌 감히 문사(文辭)가 서툴러 이러한 일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여 선생을 흠모하는 나의 정성을 거듭 저버릴 수 있겠는가.

삼가 행장을 살펴보건대, 선생은 성(姓)은 김씨(金氏)이고 휘는 정(淨), 자는 원충(元冲)이며, 충암(冲菴)은 호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6대조(代祖) 장유(將有)는 판도판서(版圖判書)이며 처음으로 보은(報恩)에 와서 살았다. 증조 휘 호(滸)는 평택 현감(平澤縣監) 증 도승지(都承旨)이고, 조부 휘 처용(處庸)은 증 병조 참판(兵曹參判)이다. 부친 휘 효정(孝貞)은 호조 정랑(戶曹正郞) 증 이조 판서이며, 모친 김해 허씨(金海許氏)는 판관(判官) 윤공(允恭)의 따님으로, 성화(成化) 병오년(1486, 성종17)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특이한 자품을 지녀 남달리 영오(穎悟)하였다. 말을 배우자 곧 문자를 알았고, 10세가 되기 전에 이미 사서(四書)와 《시경(詩經)》을 다 읽었으며,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과정을 정해 열심히 공부하였다. 늘 함께 놀던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처럼 작은 나라에서는 큰일을 할 수 없다.” 하며, 개연히 등동산(登東山)의 뜻을 지녔다.

14세에 별시(別試)의 초시(初試)에 제일명(第一名)으로 합격하였으나 연소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회시(會試)에 나아가지 않으며 “과거(科擧)의 글은 배울 것이 못 된다.” 하고, 성현(聖賢)의 서책에 침잠하여 밤을 낮 삼아 공부하였다.

15세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집상(執喪)을 모두 예제(禮制)에 따랐으며, 모부인(母夫人)을 지성으로 효양(孝養)하였다.

1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22세에는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곧바로 정언(正言)에 제수되고 옥당(玉堂)의 수찬(修撰)으로 선임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리고 병조 좌랑(兵曹佐郞)ㆍ정랑(正郞), 부교리(副校理), 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모부인 봉양을 위해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제수되었다.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에 들어와 교리(校理)에 제수되었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천거되었다. 또 자청하여 외직으로 나가 순창 군수(淳昌郡守)가 되었다.

을해년(1515, 중종10)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빈천(賓天)하자 선생과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이 상소했다.

【원문(原文)】

【판독(判讀)】

(請)復立愼氏 伸無辜廢處之冤 絶以妾爲妻之譏 且言朴元宗等脅制君父 放逐國母 萬世之罪人 今雖已死 明正其罪 使後世灼然知分義之不可犯 則人倫之本 正始之道 澄澈光明 如天地晦塞而開豁矣 疏上 臺官以爲邪論 力請鞫問 事將叵測 賴大臣之救 徒配於報恩之含琳驛 自是廷論角立 至丙子 始以先生言爲是 交章請放 遂蒙赦還家 卽往嶺東 遍踏名區 仍入俗離山寺 讀書三冬 無意仕宦 朝廷啓請召還 丙子 敍拜司藝 丁丑 擢應敎典翰 皆不赴 秋 陞通政爲副提學 陳情乞免 至於四五 時靜菴趙先生與先生結道義交 最蒙恩眷 移書敦勉 上亦召旨絡繹 先生不得已赴命 拜同副承旨 轉至都承旨 俄命陞秩吏曹參判 兼弘文館提學同知經筵事 旋授大司憲行副提學同知成均館事 己卯 以大司憲歸覲 上疏乞解職終養 不許 特陞資憲大夫刑曹判書 又兼藝文館提學 先生血誠控辭 每日晨起詣闕呈疏 不許則仍赴公衙 日日如是 殆數月而終不允准 至如兼帶兩館提學 世所罕有 人益榮之 先生感激殊遇 與同德諸賢 竭誠建白 革弊興化 如請罷昭格署 以正祀典 刊行鄕約 以敎民彝 講明小學 以敦蒙養 創設賢良科 以收賢俊 追削靖國功

【해석(解釋)】

신씨(愼氏)를 복위하여 무고하게 폐위(廢位)된 원한을 풀어 주고 첩(妾)으로 처(妻)를 삼았다는 기롱을 끊을 것을 청하는 한편, 말하기를, “박원종(朴元宗) 등은 군부(君父)를 협박하여 국모(國母)를 방축(放逐)했으니, 만세(萬世)의 죄인입니다.

이제 그들이 비록 죽었으나 그 죄를 밝히고 바로잡아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분의(分義)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면 인륜의 근본과 정시(正始)의 도가 맑고 밝아져 마치 천지를 덮었던 캄캄한 어둠이 다시 걷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였다.

소장이 올라가자 대관(臺官)이 사론(邪論)이라 하여 국문(鞫問)할 것을 힘써 주청(奏請)하였다. 이에 사태가 예측할 수 없는 위태한 상황에 이르렀으나 대신(大臣)의 구원에 힘입어 보은(報恩)의 사림역(舍琳驛)에 도배(徒配)되는 데 그쳤다.

이때부터 조정 의론이 대립하다가 병자년(1516, 중종11)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선생의 말을 옳다고 인정하여 서로 상소하여 선생을 방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드디어 사면을 받고 집에 돌아와서는 즉시 영동(嶺東)으로 가서 명승지를 유람하고 이어 속리산(俗離山)의 절에 들어가서 삼동(三冬) 동안 독서하며 사환(仕宦)에는 뜻이 없었다. 조정에서 선생을 소환할 것을 계청(啓請)하여 병자년에 서용(敍用)되어 사예(司藝)에 제수되었다.

정축년(1517)에 응교(應敎), 전한(典翰)에 발탁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가을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고 부제학(副提學)에 제수되자 진정소(陳情疏)를 올려 해면(解免)해 줄 것을 청한 것이 너더댓 차례에 이르렀다.

당시 정암(靜菴) 조 선생(趙先生)이 선생과 도의(道義)의 벗을 맺은 사이로 성상의 총애와 권우(眷遇)를 가장 많이 받고 있었는데 서찰을 보내어 출사(出仕)를 몹시 권면하였으며, 성상도 소명(召命)을 연이어 보내왔다. 이에 선생이 부득이 소명에 나아가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고, 전임(轉任)하여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으며, 오래지 않아 승질(陞秩)하고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 동지경연사(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同知經筵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곧 대사헌(大司憲), 행 부제학(行副提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제수되었다.

기묘년(1519, 중종14)에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귀근(歸覲)하고 상소하여 종신토록 모부인을 봉양할 수 있게 해직(解職)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성상이 윤허하지 않고 특명을 내려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 판서에 제수하고 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하게 하였다.

선생이 혈성(血誠)을 다해 사양하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예궐(詣闕)하여 소장을 올렸으나 성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공아(公衙)에 가서 나날이 그와 같이 사직 상소를 올린 것이 거의 몇 달이었으나 성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양관(兩館)의 제학을 겸임한 것에 이르러서는 세상에 드문 일이라 사람들은 더욱 영광으로 여겼다. 공은 남다른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뜻을 같이하는 제현(諸賢)들과 충성을 다해 건백(建白)하여 폐단을 고치고 교화를 일으켰다.

예컨대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여 사전(祀典)을 바로잡을 것, 《향약(鄕約)》을 간행하여 백성에게 이륜(彝倫)을 가르칠 것, 《소학(小學)》을 강명(講明)하여 어린이 교육을 돈독하게 할 것, 현량과(賢良科)를 창설하여 어진 인재를 거두어들일 것,

오현단
오현단

 

【원문(原文)】

【판독(判讀)】

臣之濫參者 以杜倖門者 皆流俗之所駭異 勳戚之所切齒也 群猜衆怒 讒搆日積 洪景舟與衮 貞謀 先以不測之言 恐動宸聽 請開神武門 稱受密旨 潛納小牘 脅召大臣 夜起大獄 先生與大司憲趙光祖等十八人 一時收繫 供畢獄具 竝當以死 首相鄭光弼牽裾泣諫 太學生三百餘人 伏闕號哭 始許減死 論先生杖配錦山 錦距報恩百餘里 先生之母病危劇 告於錦倅 乞馳往面訣 還途 聞金吾郞押移珍島 卽偕還配所 權臣有修郤者 論以亡命拿鞫 置對獄中 裂衣帛上三疏 白見冤狀 決百棍安置濟州 翌年 論者又起而甚之 遂賜自盡 聞命色不變 呼酒快飮 移書兄弟 勉以善養老母 作絶命辭以見志 春秋三十六 明年辛巳 返葬于淸州苦海山下 曾所卜築之地 夫人恩津宋氏 進士汝翼之女 無后 取兄參奉光之次子哲葆爲嗣 宣廟初 退溪先生入筵中 因上問啓曰 中廟將興三代之治 趙光祖 金淨 奇遵等 協心贊襄 四方風動 見擯者搆捏 網打士流 皆由南衮 沈貞 上命奪衮 貞等爵 丙子 遣禮官致祭 賜諡文簡 博聞多見曰文 居敬行簡曰簡 先生天分甚高 識見超邁 安和而莊重 敦大而輝光 孝友出天 至行純備 學業精深 門路最正 篤信小學書 尊尙

【해석(解釋)】

정국 공신(靖國功臣) 중 공로가 없이 끼어든 사람들의 작록을 추삭(追削)하여 요행으로 벼슬하는 문을 막을 것 등을 청한 것은 모두 당시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훈척(勳戚)들이 이를 갈며 분노했던 일이다.

사람들이 시기하고 분노하여 참소가 날로 쌓여 가자 홍경주(洪景舟)가 남곤(南袞), 심정(沈貞)과 더불어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먼저 역모를 꾸민다는 불측한 말로 상(上)의 마음을 두렵게 한 뒤 청하기를, ‘조정에 역당(逆黨)의 무리가 많으니 신무문(神武門)을 열어 놓으면 몰래 들어가서 고변(告變)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밀지(密旨)를 받았다고 칭탁하고 은밀히 척독(尺牘)을 보내 위협하여 대신들을 불러 밤중에 대옥(大獄)을 일으키니, 선생과 대사헌 조광조(趙光祖) 등 18명이 일시에 체포 수감되었다. 공초(供招)를 마치고 죄안이 이루어지자 모두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상의 옷소매를 잡고 눈물로 간(諫)하고 태학생(太學生) 300여 명이 대궐에 엎드려 호곡(號哭)하자 비로소 감사(減死)를 윤허하였다.

논죄하여 선생은 금산(錦山)에 장배(杖配)되었다. 금산은 보은과 100여 리 떨어진 곳인데 선생의 모부인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에 선생은 금산 수령에게 사정을 고하고 달려가서 모부인을 뵙고 작별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금오랑(金吾郞)이 선생을 진도(珍島)로 압송해 가려고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금오랑과 함께 배소(配所)로 돌아갔다.

그런데 권신(權臣) 중에 선생에게 원한을 품고 보복하려는 자가 죄인으로서 도망쳤다고 논죄하여 선생을 나국(拿鞫)하여 옥중에서 심문하였다. 선생이 옷자락을 찢어 세 차례나 상소를 올리니 원통한 사정이 환히 드러났다. 이에 곤장 100대를 맞고 제주(濟州)에 안치되었다.

그 이듬해에 논자들이 또 일어나 더욱 혹심하게 논죄하자 마침내 자진(自盡)하라는 명이 내렸다. 선생은 명을 듣고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술을 가져오라 하여 호쾌히 마신 뒤 형제들에게 서찰을 써서 노모를 잘 봉양하라 하고 〈절명시(絶命詩)〉를 지어 자신의 뜻을 보이니, 춘추가 36세였다. 그 이듬해 신사년(1521, 중종16)에 청주(淸州) 고해산(苦海山) 아래, 예전에 잡아두었던 터에 반장(返葬)하였다.

부인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진사(進士) 여익(汝翼)의 따님이며, 아들이 없어 형 참봉(參奉) 광(光)의 차남 철보(哲葆)를 후사로 삼았다.

선묘(宣廟) 초년에 퇴계(退溪) 선생이 연중(筵中)에 들어갔다가 상의 물음에 아뢰기를, “중묘(中廟)께서 장차 삼대(三代)의 치세를 일으키고자 하시니, 조광조, 김정, 기준(奇遵) 등이 협심하여 그 뜻을 보필하고 이에 사방이 풍동(風動)하였습니다.

그런데 배척당한 사람이 터무니없는 죄를 날조하여 사류(士類)를 일망타진하였으니, 이는 모두 남곤, 심정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남곤ㆍ심정 등의 작위를 추탈(追奪)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병자년(1576, 선조9)에는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내렸으니, 박문다견(博文多見)을 ‘문(文)’이라 하고 거경행간(居敬行簡)을 ‘간(簡)’이라 한 것이다.

선생은 천품이 매우 높고 식견이 초매(超邁)하여 안화(安和)하면서도 장중하고 돈대(敦大)하면서도 광휘하였다. 효우(孝友)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라 지행(至行)이 순수하고 학업이 정심(精深)하며 문로(門路)가 매우 발랐다.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원문(原文)】

【판독(判讀)】

近思錄 立言制行 動遵古訓 平居 終日端坐 門庭蕭然 絶無雜賓 唯與數三賢益 討論奧義 專心於主靜工夫 不問家人產業 騶直不入於門 祿俸先班於親戚之貧者 不樂榮進 常懷急流勇退之志 雅好泉石 每遇佳處 倘佯忘返 蕭然有出塵之想 奔義如不及 疾惡若將浼 於書無所不讀 一掛眼終身不忘 文法西京 詩學盛唐 雄健俊逸 絶不沿襲陳言 惜乎 其在世苦短 遺失又多也 時新刊近思錄 多士求序跋於諸賢 靜菴固讓於先生 其見重如此 退溪答人書曰 沖菴學問 高於人一等 有此見識 而終不得行其志 豈不悲哉 斯眞定論也 世之論者 或云己卯諸賢負荷太重 設施無漸 不能調適時宜 以至於此 嗚呼 豈其然乎 中廟立國於大亂之後 銳意更化 一新汚習 簡任賢才 虛己以聽 此誠千載一時也 士生斯世 不遇則已 遇則當盡所學 豈可循常守故 苟焉而已 若其倘來之禍福 關時運係興喪 天地之有所憾 於先生何預焉 雖然 天運無往不復 是非不待百年 列聖崇奬 儒林興勸 以至于今 爲士者皆知善之當爲 惡之不可爲 爲善者雖死亦榮 不善者雖生如死 一線正論 終不泯滅者 伊誰之力也 銘曰

道之將行 天篤降才 必厚其培 道之將廢 或泥或止 孰(主張是)

【역문(譯文)】

《근사록(近思錄)》을 존상(尊尙)하여 입언(立言)과 행실을 언제나 고훈(古訓)에 따랐다. 평상시에는 늘 단좌(端坐)하여 집안이 쓸쓸하고 잡된 손님이 전혀 없었다. 오직 몇 사람의 어진 벗들과 깊은 이치를 토론하고 주정(主靜) 공부에 전심(專心)할 뿐 집안의 일은 묻지 않았다. 추직(騶直 상전을 따라다니는 하인)을 집안에 들여놓지 않았고 녹봉을 친척 중 가난한 사람에게 먼저 나누어 주었으며, 영진(榮進)을 좋아하지 않고 늘 급류에서 용퇴할 뜻을 품었다.

평소에 천석(泉石)을 좋아하여 매양 경치가 좋은 곳을 만나면 오래도록 배회하며 돌아갈 줄 모르고 소연(蕭然)히 속진을 벗어나는 의상(意想)이 있었다.

의로운 일에는 급급하게 달려가고 악(惡)을 보면 더러운 것을 보듯 미워했으며, 서책에 있어서는 읽지 않은 것이 없고 한번 보면 평생 동안 잊지 않았다. 문(文)은 서한(西漢)을 본받고 시는 성당(盛唐)을 배웠는데, 웅건하고 준일(俊逸)하여 전혀 진부(陳腐)한 말을 도습(蹈襲)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재세(在世)한 기간이 몹시 짧고 또 유실한 시문이 많다.

당시 《근사록》을 새로 간행하여 선비들이 제현(諸賢)에게 서발(序跋)을 부탁하자 정암(靜菴)이 굳이 선생에게 양보하였으니, 그 추중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퇴계가 어떤 사람에게 보낸 답서에서, “충암의 학문은 사람들보다 한 등급 더 높다.

이러한 식견을 가지고서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였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참으로 정론(定論)이다. 세상의 논자들은 혹 말하기를, “기묘제현은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고 시행에 점차(漸次)가 없어 시의(時宜)에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하니, 아아, 어찌 그렇겠는가.

중묘(中廟)가 크게 혼란했던 시대 뒤에 나라를 바로 세워 개혁에 비상한 관심을 두고 오습(汚習)을 한바탕 혁신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어진 인재를 선발하고 겸허한 자세로 건의를 받아들였으니, 이는 참으로 천재일시(千載一時)였던 것이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지우(知遇)을 입지 못하면 그만이겠지만 지우를 입었다면 의당 자신의 학문을 다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찌 그럭저럭 고식적인 태도로 지난 자취를 따라 구차하게 일하고 말아서야 되겠는가.

외부에서 뜻하지 않게 오는 화복(禍福)은 시운(時運)과 성쇠(盛衰)에 달린 것으로 천지(天地) 조화에서 유감스러운 점이니, 선생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천운(天運)은 늘 순환하고 시비는 백년이 못 가서 밝혀지는 법이라 열성(列聖)의 숭장(崇奬)과 유림의 흥성이 오늘에까지 이르러 선비 된 사람이면 누구나 선(善)은 해야 하고 악(惡)은 해서는 안 되며 선을 한 사람은 죽더라도 영광스럽고 불선(不善)한 사람은 살더라도 죽은 것과 같다는 이치를 알아 한 가닥 정론(正論)이 끝내 민멸(泯滅)되지 않은 것은 그 누구의 힘이겠는가. 이에 명(銘)을 붙이노라.

 

도가 장차 행해질 때는 / 道之將行

하늘이 훌륭한 인재를 내어 / 天篤降才

반드시 그 근본을 배양하는 법 / 必厚其培

도가 장차 무너질 때에는 / 道之將廢

혹 방해하고 혹 저지하니 / 或泥或止

【원문(原文)】

【판독(判讀)】

(孰)主張是 我公之生 實際昌期 文在於茲 行固天得 學主養性 心專居敬 起自林泉 聳動簪紳 瑞鳳祥麟 抗疏惇倫 義正無偏 朝綱肅然 淸名儁望 屈而益舒 妙年尙書 聖君注倚 賢友輔翼 若車推轂 明良相遇 契合風雲 夙夜經綸 正色法筵 必稱堯舜 有言則信 庶幾禮樂 將大有爲 忌者惎之 潛吹蜮弩 脅以三木 彼讒罔極 赫日晝曀 繁霜夏隕 長夜泯泯 畀之何豐 用之何嗇 奪之何速 絶命之辭 一團誠血 萬古嗚咽 惟茲正氣 日揭星明 凜凜猶生 有山蒼蒼 有丘睪如考 槃之墟 樹之貞珉 芳徽如昨 過者必式

 

【해석(解釋)】

그 누가 이것을 주관하는가 / 孰主張是

우리 공이 태어난 것은 / 我公之生

실로 국운이 창성하던 시기라 / 實際昌期

그 도가 실로 공에게 있었지 / 文在於玆

행실은 진실로 천부적인 것 / 行固天得

학문은 양성을 위주하였고 / 學主養性

마음은 거경에 전일했어라 / 心專居敬

임천에 은거하다 일어나자 / 起自林泉

조정 사대부들 용동했으니 / 聳動簪紳

상서로운 봉황이요 기린이었지 / 瑞鳳祥麟

상소하여 인륜을 돈독하게 하니 / 抗疏惇倫

그 의리 바르고 치우치지 않아 / 義正無偏

조정의 기강이 숙연해졌어라 / 朝綱肅然

맑은 명성과 높은 인망이 / 淸名儁望

굽혀졌다가 더욱 펴지니 / 屈而益舒

젊은 나이에 판서가 됐어라 / 妙年尙書

이에 성상의 신임이 두텁고 / 聖君注倚

어진 벗들이 곁에서 보익하니 / 賢友輔翼

마치 수레바퀴를 밀어주는 듯 / 若車推轂

밝은 임금 어진 신하 서로 만나 / 明良相遇

그 계합이 풍운의 제회였으니 / 契合風雲

밤낮으로 국가 경륜 토론하였지 / 夙夜經綸

조정에서 정색을 하고 서서 / 正色法筵

반드시 요순의 도리 얘기하니 / 必稱堯舜

말하면 성상이 반드시 믿었어라 / 有言則信

이에 예악 문물을 다시 일으켜 / 庶幾禮樂

장차 큰일을 이루려 했는데 / 將大有爲

그만 시기하는 자가 미워하였지 / 忌者惎之

계략을 꾸며서 몰래 음해하고 / 潛吹蜮弩

또 혹독한 형벌로 위협하였으니 / 脅以三木

저 소인들의 참소는 망극했어라 / 彼讒罔極

빛나던 해가 구름에 가리고 / 赫日晝曀

된서리가 한여름에 내렸으니 / 繁霜夏隕

긴긴 밤 어둠에 혼란이 이어졌지 / 長夜泯泯

재능은 어이 그리 많이 주었으며 / 畀之何豐

쓰는 것은 어이 그리 인색했으며 / 用之何嗇

빼앗아 간 건 어이 그리 빨랐던고 / 奪之何速

공이 지은 〈절명시〉를 보면 / 絶命之辭

온통 혈성으로 가득하니 / 一團誠血

만고에 읽는 사람 오열하리라 / 萬古嗚咽

그렇지만 이 바른 기운은 / 惟玆正氣

해와 별처럼 높고 밝은 법 / 日揭星明

공은 늠름히 아직도 외려 살았어라 / 凜凜猶生

저 산은 푸르고 푸른데 / 有山蒼蒼

무덤이 우뚝 솟아 있으니 / 有丘睪如

공이 은거하던 그 유허일세 / 考槃之墟

이에 비석을 세우매 / 樹之貞珉

공의 향기는 어제와 같으니 / 芳徽如昨

지나는 사람은 반드시 공경하도다 / 過者必式

<참고자료> 《대동야승(大東野乘)》(제10권) <김정전(金淨傳)>

(1)척언(摭言) 김정국(金正國) 찬(撰) (2)보유(補遺) 안노(安璐) 찬(撰)

 

오현단 증주벽립
오현단 증주벽립

 

【독원문(讀原文)】

金淨傳

金淨丙午生。字元沖。甲子進士。丁卯及第壯元。官至刑曹判書。號沖庵。流濟州。尋賜死。

[摭言]。金提學淨。坐黨禍。杖流濟州。至海南之海崖。憩道傍松下。吟成三絶。斫松木白而書之曰。欲庇炎程暍死民。遠辭岩壑屈長身。村斧日尋商火煮。知功如政亦無人。又海風吹去悲聲遠。山月孤來瘦影疏。賴有直根泉下到。雪霜標格未全除。又枝條摧折葉鬖髿。斤斧餘身欲臥沙。望絶棟樑嗟已矣。査牙堪作海仙槎。士林傳誦。莫不憐之。

[補遺]。初授典籍。歷正言修撰兵曹佐郞獻納吏曹正郞。爲親乞郡。補淳昌。乙亥與潭陽府使朴祥議曰。章敬上賓。坤位久虛。而元子在襁褓中。若遵成廟朝故例。陞後宮爲正位。則欲保其所出。以爲貴者人之常性。況今淑儀皆有子男。難爲元子地。莫如復立愼氏。伸無辜廢處之冤。明無以妾爲妻之義。所以全舊恩而防側位之窺也。朴元宗柳順汀成希顏。乘天人之會。效其力。而負恃其功。劫制君父。放逐國母。犯天下之大分。此萬世

之罪人。今雖已死。明正其罪。追奪官爵。曉諭中外。使當世萬古灼然知大分之截然不可犯。則人倫之本。王化之源。正始之道。澄澈光明。如天地晦塞而復開霽呈谿矣。今承求言之敎。不容含默以失反正之幾會也。乃合辭抗疏。於是大司諫李荇指爲邪議。倡言於朝曰。章敬旣誕元子。國本已定。若復立愼氏。有王子之

【역문(譯文)】

<김정(金淨)의 전기(傳記)>

김정(金淨)은 병오(丙午, 1495)년 생이고 자(字)는 원충(元冲)이며 갑자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정묘년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호는 충암(冲菴)이다. 제주(濟州)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에 사사(賜死)되었다.

[척언] 제학(提學) 김정이 당화(黨禍)에 연좌되어서 제주에 장류(杖流)되었는데, 해남(海南)의 바닷가에 와서 길섶 소나무 밑에 쉬면서 절구(絶句) 3수를 짓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희게 한 다음 거기에다 적기를,

欲庇炎程暍死民 / 모진 더위로 죽어가는 백성 그늘로 가려주려고,

遠辭岩壑屈長身 / 멀리 바위 구렁 하직한 채 긴 몸뚱이 굽혔구나.

村斧日尋商火煮 / 촌부들 매일 도끼질, 장사치들은 불 질러 태워,

知功如政亦無人 / 진시황처럼 그대 공로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어라.

하고, 또,

海風吹去悲聲遠 / 바닷 바람 불어 슬픈 소리 멀리 들려오고

山月孤來瘦影疎 / 산 달 외로이 비쳐, 성긴 그림자 수척하여라.

賴有直根泉下到 / 곧은 뿌리 땅속까지 박혀있음, 잘 알지만,

雪霜標格未全除 / 눈 서리 시달린 자태 말끔히 없애진 못하네.

하고, 또

枝條摧折葉鬖髿 / 가지는 꺾인 채, 잎파리는 헝클어진 삼사머리,

斤斧餘身欲臥沙 / 도끼로 남은 몸통 잘라 모래 위 눕히려 하네.

望絶棟樑嗟己矣 / 동량재 될 꿈 무너져 내자신을 한탄하노라니,

査牙堪作海仙槎 / 생긴 모습 그대로 바다 신선 뗏목이나 될까나.

하였는데, 사림(士林)들 사이에 전해져 외우면서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보유(補遺) : 처음 전적(典籍)에 제수되었다가 정언ㆍ수찬ㆍ병조 좌랑ㆍ헌납ㆍ이조 정랑을 지냈고,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고을의 원이 되기를 청해서 순창(淳昌)에 보임되었다. 을해년에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의논하기를, “장경왕후(章敬王后)께서 빈천(賓天)하여 곤위(坤位)가 오래 비었는데, 원자(元子)는 강보(襁褓) 중에 있다.

만약 성묘조(成廟朝) 고사(故事)를 따라 후궁을 올려 정궁으로 삼는다면, 그 소생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귀하게 된 자의 본 심성이다. 하물며 지금 숙의(淑儀)는 모두 아들이 있으니, 원자의 처지는 더욱 곤란하게 된다. 그렇다면 신씨(愼氏)를 복위하는 것만 못하다.

허물도 없이 폐출당한 원통함을 펴고, 첩으로서 아내를 삼지 말라는 의리를 밝힘은 옛 은의(恩義)를 온전히 하고, 곁자리에서 엿봄을 막는 것이다. 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ㆍ성희안(成希顔)이 천운과 인화가 합치한 기회를 타서 힘을 쓰고, 그 공을 자부하여 군부(君父)를 겁박하고 국모를 추방하여 천하의 큰 분의(分義)를 범하였으니, 이는 만세의 죄인이다.

이제 비록 죽었으나 그 죄를 밝히고 바르게 하며 관작을 뒤미처 삭탈하고 중외에 효유(曉諭)하여서, 당세(當世)와 만세에 큰 분의는 자른 듯 분명하여 범할 수 없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면, 인륜의 근본과 왕화(王化)의 근원과 정시(正始)하는 도리가 맑고 빛나서 천지가 깜깜했다가 다시 활짝 개어 산골짜기가 드러나는 듯할 것이다.

이제 구언(求言)하는 교지를 받들었으니, 잠자코 반정(反正)의 기회를 잃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합사(合辭)하여 소장을 올렸다. 이에 대사간 이행(李荇)이 간사한 논의라고 지목하고, 조정에서 주창하기를, “장경왕후가 원자를 탄생하여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정해졌다. 만약 신씨를 다시 세웠다가 왕자를 낳는 경사가 생겼을 때,

【독원문(讀原文)】

慶。而論嘉禮先後。則愼氏居先。國本或撓矣。大司憲權敏手和之。兩司靡然合請推鞫。命六曹堂上議政府弘文館專數收議。則皆以爲承求言之敎而上疏。言雖不中。不可罪之以防來言之路。惟臺諫力請拿推。旣致詔獄。事將叵測。賴大臣之救。徒配於報恩之含琳驛。自是廷議角立。互相是非。丙子夏。始以公言爲是。臺諫侍從交章請放。遂蒙赦往遊嶺東。是冬入俗離山兜率庵讀書。十二月。因朝廷所啓拜司藝。丁丑秋。擢陞副提學。公覲母在鄕。聞命震悚。決意力耕。給母之暇。討究典墳。培養根本。爲他日陳力之地。靜庵趙光祖方爲上下所倚重。思與協力贊襄。貽書敦勉。公遂强起。數年之間。特被眷遇。己卯夏。驟陞秋卿。兼藝文提學。控懇力辭。至有乳臭童稚當六卿之任。豈不羞辱朝廷之甚云。當是時。朝家屬望雖隆。而公則非徒以充滿爲懼。實欲辭榮就閒。沈潛學問。使道成德立。以副吾君期待之意。而上眷方隆。辭愈力。而愈不得命。則其所以革弊興化奮起事功者。無所不用其力。於君子小人進退之幾。尤致意焉。凡建白設施。鋒銳太露。張皇無漸。未免失於欲速。亦有輕銳投合鼓作紛紜。舊臣之不容時議而見斥者。怨入骨髓。磨牙鼓吻。沈貞南衮與洪景舟。交搆禍機。恐動大內。然後景舟受諺書稱密旨。陰嗾被屈宰相。十一月十五日。請開神武門。誘致金銓高荊山。怯召李長坤。乘夜潛入。密啓小牘。詳具李長坤傳。夜半公與右參贊李耔大司憲趙光祖副提學金絿大司成金湜都承旨柳仁淑左副承旨洪彥弼右副承旨朴世熹同副承旨朴薰等同下獄。則右副承旨尹自任應敎奇遵修撰沈達源注書安珽檢閱李搆。已繫獄矣。諸公皆以爲必死。相與酌酒永訣。是夜長天無雲。明月滿庭。公有詩曰。重泉此夜長歸客。空留明月照人間。大柔 金絿字也 吟古詩曰。埋骨白雲長已矣。空餘流水向人間。

【역문(譯文)】

가례(嘉禮)의 선후를 따진다면, 신씨가 먼저인 만큼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게 될지 모른다.” 하고, 대사헌 권민수(權敏手)가 맞장구를 치니, 양사(兩司)가 쏠려서 추국하기를 합동 계청하였다. 육조 당상과 의정부ㆍ홍문관에 명해서 전수(專數)대로 의견을 수합(收合)하도록 하니, 모두 이르기를, 구언하는 교지를 받들고 올린 소장인데 말이 비록 적당하지 못하더라도 죄를 주어 언로를 막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오직 대간만은 잡아다가 추문하기를 힘껏 청해서, 이윽고 조옥(詔獄)에 갇히게 되었다. 사건이 측량할 수 없게 되었는데, 대신이 구원하여서 보은(報恩)의 함림역(含琳驛)에 도배(徒配)되었다. 이때부터 조정 논의가 대립되어서 서로 옳다 그르다 하였다. 병자년 여름에 비로소 공의 말이 옳다고 하며, 대간과 시종이 교장(交章)을 하여서 석방하기를 청했다.

드디어 사(赦)를 받고 영동(嶺東)에 와서 유람하였다. 이해 겨울에 속리산(俗離山) 도솔암(兜率庵)에 들어가서 글을 읽었는데, 12월에 조정의 계청으로 인해서 사예(司藝)로 임명되었고, 정축년 가을에 발탁되어 부제학으로 승진되었다.

공이 모친을 뵙느라 시골에 있다가 임명된 것을 듣고 놀랐다. 그러나 농사에 힘써서 모친을 봉양하고 여가에 경전을 연구하고 근본을 배양하여, 후일에 나라를 위해 일할 바탕으로 하려고 결심하였다. 그 때에 정암 조광조가 임금과 신하들에게 한창 신뢰를 받았는데, 서로 협력하여 다스림을 도우려는 뜻으로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벼슬에 나오기를 힘껏 권하였다.

공이 드디어 마지못해 나왔는데 수년 동안에 특별히 임금의 돌봄을 입었다. 기묘년 여름에는 갑자기 형조 판서에 승진되고 예문 제학(藝文提學)을 겸하게 되었다. 공이 정성을 다해 사퇴하면서, “젖내나는 아이가 6경의 임무를 맡는다면 심히 조정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 때에 조정의 촉망은 비록 높았으나 공은 영화가 넘치는 것을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사실은 영직(榮職)을 사퇴하고 한직에 물러나 학문에 침잠하여 도덕이 성취되어 우리 임금의 기대하는 뜻에 부응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권애(眷愛)가 한창 융숭하여서 힘껏 사퇴하여도 허락하는 명을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묵은 폐단을 개혁하고 교화를 일으키며, 사공(事功)을 떨쳐 일으키는 데에 힘쓰지 않는 것이 없었고, 군자와 소인이 나오고 물러나게 되는 기미에는 더욱이나 주의하였다.

무릇 건의하고 시행하는 데에 날카로움이 너무 드러났고 장황하기만 하면서 진보한 것이 없었으며, 속히 하고자 하는 실수를 면하지 못하였다. 또 경솔하고 예민한 자끼리 투합하여 부추겨서 시끄러움을 일으키니, 나이 많은 신하로서 당시 논의에 용납되지 못해 배척당한 자는 원한이 골수에 박혀서 이를 갈며 입을 씰룩거렸다.

심정(沈貞)ㆍ남곤(南袞)이 홍경주(洪景舟)와 화기(禍機)를 얽어 대내(大內)를 겁나게 한 뒤에, 홍경주가 언서(諺書)를 받아 비밀 교지라고 하면서 배척당했던 재상을 가만히 부추겼다. 11월 15일에 신무문(神武門)을 열기를 청한 다음 김전(金銓)ㆍ고형산(高荊山)을 꾀어서 오게 하고 이장곤(李長坤)을 협박해 불렀다.

어둠을 타 잠입하여 작은 편지로 몰래 아뢰었는데, 이것은 〈이장곤전(李長坤傳)〉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밤중에 공이 우참찬 이자(李耔)ㆍ대사헌 조광조ㆍ부제학 김구(金絿)ㆍ대사성 김식(金湜)ㆍ도승지 유인숙(柳仁淑)ㆍ좌부승지 홍언필(洪彦弼)ㆍ우부승지 박세희(朴世熹)ㆍ동부승지 박훈(朴薰) 등과 함께 하옥되었다.

우승지 윤자임(尹自任)ㆍ응교 기준(奇遵)ㆍ수찬 심달원(沈達源)ㆍ주서 안정(安珽)ㆍ검열 이구(李構)는 벌써 옥에 갇혀 있었다. 제공(諸公)이 모두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 하며, 함께 술을 마시고 영결(永訣)하였다. 이날 밤에 하늘에는 구름이 없고 달빛만이 뜰에 가득하였다. 공이 시를 짓기를,

重泉此夜長歸客 / 황천으로 돌아가는 이 밤, 긴 나그네 길인데,

空留明月照人間 / 공연히 밝은 달만 머물러 인간 세상 비추는구나.

하였고, 대유(大柔, 김구의 자)는 고시체(古詩體)로 읊조리기를,

埋骨白雲長已矣 / 뼈를 흰 구름 속에 묻으면 그만인 것을,

空餘流水向人間 / 공연히 흐르는 물 남겨두어 인간 세상 향하네.

하였다.

【독원문(讀原文)】

又咏明月長天夜。公和曰嚴冬惜別時。皆從容自得。厥明命放柳仁淑孔瑞麟洪彥弼。有頃又命放沈達源安珽李搆。諸公相謂曰。次野必免矣。次野哀哭。次野李耔字也。最後亦蒙放出。靜庵痛哭曰。欲見吾君。諸君又相勉之曰。當從容就義。何必哭泣耶。諸公相侑酒痛飮。靜庵曰從容就義。吾豈不知。但不得復見吾君。若見吾君。豈至如是乎。自被囚終夜痛哭。翌日猶不止。諸公在獄中。裂衣服上疏曰。臣等俱以狂疏愚戇。遭遇聖明。出入經幄。得近耿光。但恃吾君將聖。展竭愚衷。冒犯群情。只知有君。不計其他。望欲吾君爲堯舜之善。豈爲身謀。天日照臨。無他邪心。臣等罪固萬死。但士類之禍一開。將不念國家命脈耶。天門阻隔。無路達懷。憫默長辭。實所不忍。幸躬問萬死無恨。情溢辭慼。不知所云。或云金絿述 判義禁李長坤知義禁洪淑承旨成雲及臺諫。與金詮等同坐。推鞫公及光祖湜絿曰。私相朋比。詭激成習。引誘後進。盤據權要。聲勢相依。異己者斥之。附己者進之。使公論顚倒國事日非。公供曰。臣年三十四。年少戇愚。性又偏迫。濫登六卿。常自兢懼。思效國恩。凡使國論顚倒朝論思之際。務欲一出於正。日夜憂念而已。交相朋比。詭激成習。政日非。臣實無之。以靜庵爲首。並論同科。當以死律。三公論執減死。杖配錦山。厥明十七日。命還聚分配八人於禁府。承旨成雲傳敎旨曰。汝等皆以侍從之臣。上下同心。期見至治。汝等之心。非不善也。近來汝等處寘朝廷之事。至爲過誤。使人心不平。故不得已罪之。予心亦豈安乎。請罪大臣。豈有私意乎。汝等之事至此者。皆予不明不能先防其微也。若罪以律。則必不止此。汝等無私心。爲國事。故末減罪之。爾等久居經握。非常員。特用寬典而且言之。汝等知之而去。餘具金絿尹自任傳 錦山距公之報恩桑鄕。百數十里許。公聞母病。亟請於郡守鄭熊。往見母病。未(急還)

【역문(譯文)】

또,

明月長天夜 / 밤하늘 길게 늘여놓는 밝은 달이라.

하니, 공이 화답하기를,

嚴冬惜別時 / 이별을 애석해하는 추운 겨울이어라.

하였다.

이렇듯 모두 조용하게 마음 편해했는데, 밤이 밝자 유인숙ㆍ공서린(孔瑞麟)ㆍ홍언필은 석방한다는 명이 있었고, 조금 있다가 또 심달원ㆍ안정ㆍ이구를 석방하라는 명이 있었다. 제공이 서로 이르기를, “차야(次野)는 반드시 면하게 될 것이다.” 하니, 차야가 슬피 울었다. 차야는 이자의 자인데, 최후에 석방되었다.

정암이 통곡하면서, “우리 임금을 뵙고 싶다.” 하였다. 제공이 서로 권면하면서, “조용하게 취의(就義)함이 마땅하오. 울어서는 무엇하겠소.” 하였다. 서로 술을 권하며 한껏 마셨는데, 정암이, “조용하게 취의하는 것을 내 어찌 모르랴마는 다만 우리 임금을 다시 뵈올 수 없음이 한스럽소. 만약 우리 임금을 뵈옵게 된다면, 어찌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겠소.” 하면서, 갇힐 때부터 밤새도록 통곡하던 것을 이튿날도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제공이 옥중에서 의복을 찢어서 거기에다 소장을 써서 올리기를, “신들은 모두 미치고 어리석은 자질로서, 성명(聖明)을 만나 경악(經幄)에 출입하면서 경광(耿光)에 가까이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 임금은 장차 성군이 되리라는 것만 믿고 충정을 다했습니다. 뭇사람의 뜻을 거슬렸으나 다만 임금 있는 줄만 알았을 뿐, 딴것은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임금이 요순 같은 착한 임금이 되기를 바랐을 뿐, 어찌 자신을 위한 꾀를 도모하였겠습니까. 하늘의 해가 밝게 비추고 있으니, 맹세코 딴 사심이 없었습니다. 신들의 죄는 만번 죽어도 마땅합니다마는, 다만 사류의 화(禍)를 한번 개시하게 되면 국가의 명맥에 관계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천문(天門 임금 계신 궁문)이 막혀 심회를 계달(啓達)할 길이 없으나, 말없이 길이 하직함은 실로 차마 하지 못할 바입니다. 다행히 친히 물으시면 만번 죽더라도 한이 없겠습니다. 뜻은 넘치고 말은 슬퍼서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혹은 김구가 지었다 한다.

판의금 이장곤(李長坤), 지의금 홍숙(洪淑), 승지 성운(成雲) 및 대간이 김전 등과 함께 앉아서 공 및 조광조ㆍ김식ㆍ김구를 추국하기를, “사사로운 붕당을 맺어 궤격(詭激)한 것이 버릇되었다. 후진을 유인하여 권력 있는 요직을 점거하고 명성과 위세로써 서로 의지하며, 자기 패와 다른 자는 배척하고 자기 패에 아부하는 자는 진용(進用)하니, 국론이 거꾸로 되고 국사가 나날이 그릇되게 하였다.” 하니, 공이 공초(供招)하기를, “신은 금년 34세로서 나이 젊고 어리석으며 성품이 편벽하였습니다. 외람되게 육경(六卿)에 올라 항상 두려워했으며, 국은에 보답하려고 생각했습니다.

논사(論思)할 즈음에는 한결같이 정도로 나오기를 힘쓰고 밤낮으로 근심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붕당을 서로 맺어서 궤격한 것이 버릇되어 국론이 거꾸로 되고 조정 정사를 나날이 그릇되게 하였다고 하나, 신은 실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정암을 우두머리로 하여 아울러 같은 죄과로 논하여 사율(死律)에 해당시켰는데, 삼공(三公)이 논의를 고집하여 사율을 감하고 금산(錦山)으로 장배(杖配)하게 되었다. 다음날 17일에 배소를 분정(分定)한 8명을 금부에 다시 모이도록 명하고, 승지 성운이 교지를 전하였는데, “너희들은 모두 시종하던 신하로서 상하가 마음을 같이하여 지극한 다스림을 보기 기약하였으니, 너희들의 마음이 착하지 않았음은 아니다. 근래에 너희들이 조정에서 한 처사가 과오를 저지르는 데 이르러 인심을 불평하게 한 까닭에 부득이 죄주는 것이다.

내 마음인들 어찌 편하겠으며, 죄주기를 청한 대신인들 어찌 사사로운 뜻이 있었겠느냐. 너희들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음은 모두 내가 밝지 못해서 그 기미를 먼저 막지 못했음이다. 만약 율대로 죄를 준다면 반드시 이것만으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나, 너희들이 사심 없이 국사를 했으므로, 말감(末減)해서 죄를 주는 것이다. 너희들이 오랫동안 경악(經幄)에 있어서 보통 관원이 아니므로 특히 관대한 형벌을 행하고, 또 말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내 마음을 알고 가라.” 하였다. 나머지는 김구ㆍ윤자임전에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금산은 공의 고향인 보은(報恩)과는 백 수십 리쯤 되었는데, 공의 모친이 병중이란 것을 듣고 군수 정웅(鄭熊)에게 급히 요청하여 가서 병든 모친을 만나고

【독원문(讀原文)】

(未)及還公在半道。聞金吾郞黃世獻以押移珍島下來。公卽馳還。與黃偕至配所。後事覺。鄭熊謀免放囚之罪。以逃歸捕還爲辭。庚辰夏。詔獄鞫問。累加刑杖。公裂衣幅再上陳情曰。臣本愚穉戇妄。濫列重任。措身無地。旣念無才無識。報效末由。晝夜憂恐。求退不得。又念寡母衰老窮病。死亡無日。惟思甘分退屛。以奉菽水。而上念聖恩。徊徨未遂。頃者身犯重罪。蒙恩竄配。母則不知其子之惡。過爲憂傷。勺水不飮。遂生大病。纏綿床褥至危劇。命如一縷也。乃急來報。五內如裂。慮未暇遠及。意謂立朝無狀。旣貽母憂。以致危病。若又不得一面永訣。人間地下。痛有何極。母子之情。不能自忍。又意距程一日。可暫往還。遂乃馳覲。執手相訣。母乃旣見後。懇敎速還。臣亦不敢違越。遂卽馳還。遂與偕至移配之所。此臣之所爲。大槩如斯。旣負重罪。身爲累囚。而乃顧私情。干犯邦憲。亦幼稚之性。無識妄動。臣之罪大矣。至於以臣爲亡命。則冤實甚焉。夫亡命臣子之所不敢爲。臣雖無狀。國家一日號爲宰相而待之者。安敢爲如此之事也。臣之未逃之狀。詳在招辭。證據昭昭。臣安敢誣罔。林上佐金潤浩等畏於罪責。搆捏虛辭。情狀昭昭。其敗露難掩。可以辨察者。非一端矣。夫逃者必於深夜。潛踪匿跡。使人不覺。豈有於朝時。顯有守直人告邑守者。守直人若知其逃。豈有不卽捉告。爲邑守者又豈不卽發軍捕得乎。若果爾其被執。豈免數里之內乎。臣之朝出。上佐等炊飯時參見。非一二可以辨質矣。況失囚而不卽追捕。非人情。豈復有通簡至再慇懃餉者乎。此爲非逃亦明。上佐又告虛無之辭。謂臣單騎率一人。困馬窘步於孤院之前。上佐等六七人前到執捉云。此誣妄尤甚。臣之出則云夜間。而上佐等之出追則云都事入之後。執捉則云後夜三更也。晝夜並計三日矣。夫逃者必由斜逕疾馳遠達。豈有三日徘徊於家鄕直

【역문(譯文)】

배소로 돌아오는 도중에, 금오랑(金吾郞) 황세헌(黃世獻)이 공을 진도(珍島)로 압송하러 온다는 것을 듣고 공이 곧 달려서 돌아왔는데 황과 함께 배소에 도착하였다. 뒤에 이 일이 발각되자 정웅은 죄수를 놓아 보냈다는 죄책을 모면하고자, 도망쳐 돌아간 자를 잡아왔다고 말하였다. 경진년 여름에 조옥에서 국문하면서 여러 차례 형장을 가했다.

공이 옷자락을 찢어서 진정서를 적어 올리기를, “신은 본디 어리석고 망령스러웠는데, 외람되게 중임의 반열에 끼어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재주와 견식이 없어 보국할 길이 없으므로,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물러나기를 원했으나 이루지 못했습니다.

또 홀어미가 늙고 병들어서 죽음이 박두하였으나 오직 분수대로 달게 여기고 물러나 숙수(菽水)로 봉양하기를 생각하였습니다만, 위로 성은을 생각하여 어물어물하다가 뜻대로 이루지 못 하였습니다. 전날 중죄를 범했으나, 성은을 입어 유배되었습니다.

어미는 자식의 악함은 모르고 지나치게 걱정하여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다가 드디어 큰 병이 나서 침석에 싸였는데, 목숨이 실낱같이 위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급보가 왔는 바,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였습니다. 멀리 생각하지 못하고 다만, 조정에 서서 형편없이 행동하다가 어미에게 걱정만 끼쳐 위태로운 병이 들게 하였으니, 만약 생전에 한 번 영결하지 못하면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원통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으리라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모자간의 정리에 능히 차마 하지 못했고 또 거기다 하루 길이니 잠깐 갔다가 돌아오겠다는 생각으로 드디어 달려가서 손잡고 작별하였습니다. 어미가 이미 본 다음에 속히 돌아가라고 간절히 권하고, 신도 또한 감히 어길 수 없어 곧 달려서 돌아오다가 마침내 금오랑과 함께 옮겨진 배소에 왔는 바, 신의 한 짓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이미 중한 죄를 졌고 계루된 몸으로서 사정(私情)으로 말미암아 나라 법을 범했는 바, 어린 성품이 무식하여 망령되이 행동하였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그러나 신을 도망하였다고 하면 매우 원통합니다. 대저 도망이라는 것은 신자(臣子)로서 감히 할 바가 아닙니다.

신이 비록 무상(無狀)하나 국가에서 한때 재상이라는 호칭으로 대우받던 자인데, 어찌 감히 이 같은 일을 하겠습니까. 신이 도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초사(招辭)에 자세하게 밝혔습니다. 증거가 소소(昭昭)한데, 신이 감히 속이겠습니까.

임 상좌(林上佐)ㆍ김윤호(金潤浩) 등이 죄책을 두려워해서 빈말로 날조한 정상이 확실하고 탄로된 사단(事端)은 덮기 어려우니, 분별할 수 있는 것이 하나뿐이 아닙니다. 대저 도망하는 자는 반드시 깊은 밤에 종적을 숨겨서 남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어찌 아침에 수직(守直)하는 사람을 시켜 수령에게 알리는 자가 있겠습니까. 수직하는 사람이 만약 도망하는 것을 알았다면, 어찌 곧 잡아서 보고하지 않았겠으며, 수령된 자는 또 어찌 바로 군사를 내어 잡지 않았겠습니까. 만약 과연 잡으려고 했다면, 어찌 수 리(里) 안에 잡히지 않았겠습니까. 신이 아침에 나올 때는 상좌들이 밥을 지을 때여서 참견(參見)한 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변질(辨質)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죄수를 놓치고 곧 뒤쫓아 잡지 않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데, 어찌 편지를 보내고 두 번이나 은밀히 음식을 주는 경우가 또 있겠습니까. 그것만 해도 도망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상좌는 또 허무맹랑하게 고하기를, 신이 단기(單騎)로 사람 하나만을 거느렸는데 피로한 말이 고원(孤院) 앞에 간신히 걸어가므로 상좌들 6, 7명이 닥쳐 잡아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더욱 심한 거짓입니다.

신이 나간 것은 밤중이라 하고 상좌들이 뒤쫓아간 시각은 도사(都事)가 들어온 뒤라 하며, 잡은 것은 다음날 밤 3경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밤낮으로 3일이 됩니다. 대저 도망치는 자는 반드시 옆길로 빨리 달려서 멀리 갈 것인데, 곧장 가는 바른길로 한참이면 닿을 거리에서 어찌 3일 동안이나 두리번거리면서 뒤쫓아 오는 자에게 잡히게 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독원문(讀原文)】

路一息之地。以待追者之見執耶。況非孤院。乃磨月峴洞內。去郡尤近。相逢者非林上佐等六七。乃金潤浩一人偕臣奴持守簡而來也。臣非單騎率一人。乃馳還配所時。率弟及族人率奴僕也。馬又非困也。臣之偕潤浩入沙器店。店主之饋潤浩等酒也。店主非一二人。無慮八九。若辨質則可以知臣之獨行否及潤浩之獨來否也。況道里遠近。騎馬困健。皆可驗耶。其事狀昭昭如此。而虛被誣枉。不勝痛哭。罪雖重得其實。則甘受無恨。責雖微若受誣枉。則終身抱悶。況逃命者乃臣子所不敢爲者耶。臣不勝痛哭。遠竄絶島。得此推命。區區被誣之冤。無路得達。意將冤默泯泯。幸今身就禁府。以伸招辭。天恩至重。聖明之下。雖微蟲蠢蠕。咸欲使之得所。臣雖負罪。亦曾側士大夫之列。豈意使冤枉之狀長掩莫白。臣之愚微。固不足屑。然豈非聖世之大欠也。若令臣與潤浩等得更憑質。則情狀自現。況許多人證據。皆可卞質。終難掩覆。若得伸理。洗白黷昩。則受恩如天。萬死無恨。臣無任哀悶激切之至。謹裂幅昩死以聞。又第三上書曰。伏以獸之窮也。其聲必悲。仁者聞之。惻然痛心。彼非擇其聲而然也。發乎至情之重。自然動乎人耳。臣本無狀。負罪聖明。然猶曾側大夫之列。今者含冤抱枉於仁政之下。扣心呼天。不能自已。伏冀萬一垂察焉。臣之冤枉之狀。原情招辭詳矣。未盡之情。兩疏略具。其卞之跡。可據之證。可察之情理。昭昭非一。而只據鄭熊等數三無實單辭。直斷臣以亡命。豈不冤哉。伏覩聖朝欽愼刑獄。下至閭巷小民賤隷所犯。以至寇賊之罪。必詳加卞覈。使毫縷莫遁。少有罅隙可疑之端。則爲之更覈覆讞。使無未盡之情。然後乃加罪焉。故王法坦然。受者無憾。今臣之事。可卞之跡。可據之證。可察之情理。昭昭非一。而終鬱不白。豈不冤哉。九泉之下。臣目不瞑焉。豈不冤哉。夫取證以訊臣(者)。

【역문(譯文)】

하물며 잡힌 곳은 고원이 아니고 마월현(磨月峴) 고을 안이니 군(郡)에서 거리가 더욱 가깝고, 서로 만난 자도 임 상좌 등 6, 7명이 아니라 김윤호 한 사람뿐이었으니 신의 종과 함께 고을 원의 편지를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신이 단기로 한 사람을 거느린 것이 아니라, 배소에 돌아올 때는 신의 아우 및 일가 사람들과 노복을 거느렸으며 또 말이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김윤호와 함께 사기점(沙器店)에 들어가니, 가게 사람이 김윤호 등에게 술을 대접하였습니다. 가게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고 8,9명이나 되었으니, 만약 면질(面質)하면 신이 홀로 갔는가의 여부와 김윤호가 홀로 왔던가의 여부도 알 수 있을 것이며, 길의 멀고 가까움도, 말이 튼튼했던가 피로했던가도 다 징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이 이와 같이 확실한데 터무니없이 무함을 당하니 원통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죄가 비록 중하더라도 사실대로라면 달게 받아도 한이 없겠습니다만, 죄책이 비록 미세하다 하더라도 만약 공연히 무함을 받는다면 종신토록 원통함을 품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도망이란 것은 신하로서 감히 할 바가 아님임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은 통곡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멀리 귀양간 절도(絶島)에서 이런 일로써 추문한다는 명을 받았던 바 무함 받은 구구한 원통함을 아뢸 길이 없어, 마침내 원통함을 품고도 잠자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지금 몸소 금부에 와서 초사(招辭)를 아뢰게 되었으니, 천은이 지중합니다.

성명(聖明)의 세대에 비록 하찮고 꿈틀거리는 벌레라도 다 제 살 곳을 얻도록 하시는데, 신이 비록 죄를 졌으나 또한 일찍이 사대부의 반열에 충수되었던 자이니,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을 깊이 덮어두고 사뢰지 않을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신 같은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자야 진실로 말할 것도 없겠지만, 성세(聖世)에 어찌 큰 흠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신을 김윤호 등과 다시 대질하게 한다면 정상이 절로 나타날 것이요, 허다한 사람의 증거를 모두 대질할 수 있을 터이니, 마침내 진실을 덮거나 뒤엎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억울함을 펴게 하여 애매함을 씻으면 은혜가 하늘 같아 일만 번 죽더라도 한이 없겠습니다. 신은 애닲고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여, 삼가 옷자락을 찢어 죽을 줄 모르고 아룁니다.” 하고, 또 세 번째 상소에는, “삼가 아룁니다.

짐승이 궁지에 빠지면 소리가 반드시 슬프니, 어진 사람이 들으면 가엾게 여겨서 마음 아파합니다. 그것이 일부러 슬픈 소리를 가려서 그런 것이 아니고 진심에서 나온 것이므로, 자연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신이 본디 무상하여 성명께 죄를 지었습니다마는, 일찍이 대부의 반열에 충수되었던 자입니다.

이제 어진 청사의 아래에서 원통함을 머금고 억울함을 품어서 가슴을 두드리며 하늘에 부르짖어 스스로 마지못하고 있으니 만에 하나라도 살펴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신의 원통하고 억울한 형상은 초사(招辭)에 자세하게 하소연하였고, 못다 말한 사정은 두 번에 걸쳐 올린 소장에 대략 갖추었습니다.

분별할 만한 자취와 근거를 댈 만한 증거와 살필 만한 정리가 확실하여 한두 가지가 아닌데, 다만 정웅의 두세 가지 실없는 단사(單辭)에 의거해서 바로 신을 도망했다고 단정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조(聖朝)에서는 형옥에 조심하여 여염 소민(小民)과 천예(賤隸)들의 범죄와 도둑들의 죄까지도 반드시 상세히 분변하고 핵실해서 털끝만큼이나 실오라기만큼이라도 숨김이 없게 하고, 조금이라도 사건에 흠이 있거나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으면 그 때문에 다시 핵실하고 거듭 의언(議讞)하여, 미진한 사정이 없게 한 뒤에 죄를 가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왕법이 공평하여 죄를 받은 자도 유감이 없었습니다. 지금 신의 사건은 분변할 만한 자취와 근거를 댈 만한 증거와 살필 만한 정리가 확실하여 한두 가지가 아닌데, 마침내 억울함을 씻지 못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황천에서라도 신은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대저 증거를 잡아서 신을 신문하는 것은

【독원문(讀原文)】

者。以熊言也。熊之虛搆之情。旣窮於黃世獻對質之時。何獨於臣而取彼以爲正哉。以一事。世獻則得伸。臣抱冤枉而死。豈不冤哉。至於林上佐等。皆其屬人。隨熊而一樣矣。然昭昭之迹。彼輩終豈能掩。況店主等各人在焉。道路遠近在焉。昭昭非一乎。臣旣已服矣。而猶且云云者。臣旣受二次杖毒攻衝。腫痛憊憫。性命如縷。一杖必殞。不能自堪。且畏威命而然耳。其情實則不然。冤莫甚。仁聖之下。不能懷未盡之情。仰恃天日之明。俯燭幽懷。瀝情呼窮。不暇擇聲。萬一見察。死無所恨。瀆冒天威。無任戰兢慄惶之至。特命減死。論決百棍。濟州圍籬安置。公嘗爲淳昌郡守時。有政院吏傳求請簡。李沆以承旨俱銜着署。而別無情詞。公書一絶于簡後。而復之曰。曾同書榻又鸞署。流落南荒一病軀。天上華銜承旨李。臨題還憶故人無。沆以此銜恨而追論者也。庚辰閏秋到濟州。口占一律曰。絶國無相問。孤臣棘室圍。夢如關塞近。僮作弟兄依。憂病共侵鬢。風霜未授衣。思君若明月。天末寄遙輝。辛巳冬。追論亡命。賜自盡。公聞命顏色不變。呼酒快飮。執牧使李耘手問時事。貽書兄弟。勉以善養老母。又吟絶命辭以見志。其辭曰。投絶國兮作孤魂。遺慈母兮隔天倫。遭斯世兮隕余身。乘雲氣兮歷帝閽。從屈原兮高逍遙。長夜暝兮何時朝。炯丹衷兮埋草菜。堂堂壯志兮中道摧。嗚呼千秋萬世兮應我哀。時三十六。夫人宋氏無子女。取公之兄洸子哲葆爲後。公之堂姪金天宇應敎。收遺稿詩若文。編次爲沖庵集。許浩齋刊板于公州。行于世。仁廟命復公官爵。行狀略曰。公莊重寡言笑。有文章。精深灝咢。遠追西漢。詩學則盛唐。沈潛經傳。危坐窮晝夜。爲敬主靜之學。立言行事。必以聖賢爲準。又曰。不顧生產。不通關節。騶直不入於門。俸祿均頒於族。又曰。公之落南也。道過淳昌。淳昌之民。男女老幼爭持酒饌。攔道涕

【역문(譯文)】

정웅이 말한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웅이 거짓으로 꾸민 실정은 이미 황세헌을 대질한 그때 벌써 다 드러났는데, 어찌 신에 대해서만 정웅의 말이 바르다고 하는 것입니까. 같은 일을 가지고 황세헌은 신원(伸冤)하게 되고 신은 원통하고 억울함을 품고 죽으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임 상좌 등은 모두 정웅에게 딸린 사람이므로 정웅을 따라 같이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자취를 저 무리가 끝내 어찌 덮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사기점 사람 등 여러 사람이 있고 도로의 원근도 있어, 확실한 것이 하나둘이 아닌 점이겠습니까. 신이 이미 자복하고서 또 운운 하는 것은, 신이 이미 두 차례나 형장을 받아서 장독(杖毒)이 치올라 다리가 아프고 고달파 목숨이 실낱같으니, 한 번이라도 형장을 더 받는다면 반드시 죽고 능히 견디지 못하겠으며, 또 위명(威命)을 두려워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정은 그렇지 않았으니 원통함이 막심합니다.

어질고 성스러운 임금 밑에서 미진한 실정을 숨기지 못하였으니 우러러 하늘의 해와 같은 밝음으로 그윽한 심회를 굽어 비추시기를 믿습니다. 실정을 다해 궁지를 호소하는 데에 소리를 가릴 겨를이 없는 바, 만에 하나라도 살펴주시면 죽더라도 한이 없겠습니다. 천위(天威)를 모독하게 되매, 벌벌 떨며 황송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였다.

특별히 사율(死律)을 감해서 곤장 백 대를 때리고 제주(濟州)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도록 하는 명이 내렸다. 공이 일찍이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부임할 때 정원 서리(政院胥吏)가 부탁하는 편지를 전하는데, 승지 이항(李沆)이 이름과 직함까지 썼으나 별다른 인사말은 없었다. 공이 그 편지 뒤에다가 절구(絶句) 한 수를 적어서 돌려보내기를,

曾同書榻又鸞署 / 일찍이 서탑을 함께 하고 난서 또한 같이 하다가,

流落南荒一病軀 / 남쪽 거친 지역에 유락하는 병든 몸이 되었소.

天上華銜承旨李 / 천상에서 내려온 빛난 직함 ‘승지 이(李)’라 했을 뿐,

臨題還憶故人無 / 적으려고 할 적, 도리어 옛 친구 생각은 잊었는가.

하였다. 이항이 이 때문에 원한을 품고 공의 사건을 뒤쫓아 논핵한 것이었다. 경진(庚辰, 1520)년 가을 윤달에 제주에 도착해서 율시 한 수를 지어 읊기를,

絶國無相問 /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 서로 묻는 이 없고,

孤臣棘室圍 / 외로운 신하, 가시로 둘러싸인 집에 머무네.

夢如關塞近 / 꿈길에선 국경 지대도 가까운 듯했는데,

僮作弟兄依 / 아이 종을 형제처럼 믿고 의지한다네.

憂病共侵鬢 / 근심과 병, 귀밑머리로 같이 침노해 들어오고,

風霜未授衣 / 바람 서리 춥건만 옷도 갖추지 못했네.

思君若明月 / 생각하니 임금은 밝은 달 같아서,

天末寄遙輝 / 하늘가 멀리까지 빛을 비춰준다네.

하였다.

신사(辛巳, 1521)년 겨울에, 도망했다는 죄목으로써 추론하여 자진(自盡)하라는 명이 내렸다. 공이 왕명을 받들고 얼굴빛도 변치 아니하였다. 술을 가져오게 하여 통쾌하게 마신 다음, 목사(牧使) 이운(李耘)의 손을 잡고 시사(時事)를 묻고, 형과 아우에게 편지를 보내어 노모를 잘 봉양하도록 부탁하고, 또 <절명사(絶命辭)>를 읊어서 자신의 뜻을 내보였다.

<절명사>에 이르기를,

投絶國兮作孤魂 / 멀리 떨어진 지역에 버려져 외로운 혼이 되는구나,

遺慈母兮隔天倫 / 어진 어미 버렸으니 천륜이 막혔어라.

遭斯世兮隕余身 / 이런 세상을 만나 내 몸 죽으니,

乘雲氣兮歷帝閽 / 구름을 타고 가서 상제를 찾을까.

從屈原兮高逍遙 / 굴원을 따라가서 높이 거닐기나 할까,

長夜暝兮何時朝 / 긴 밤 어두워라 어느 때면 밝으려나.

烱丹衷兮埋草菜 / 붉은 마음 빛났건만 풀 속에 묻히게 되고,

堂堂壯志兮中道摧 / 당당하고 크게 품은 뜻이 중도에서 꺾이누나.

嗚呼千秋萬世兮應我哀 / 슬프도다, 천추 만세엔 응당 나를 슬퍼하리.

하였다.

그때 공의 나이는 36세였다. 부인 송씨(宋氏)는 자녀가 없었으므로 형 김광(金洸)의 아들 김철보(金哲葆)를 후사로 삼았다. 공의 당질 천우(天宇) 김응교(金應敎)가 유고(遺稿)인 시와 문을 모아 편찬하여 《충암집(冲庵集)》을 만들었고, 허호재(許浩齋)가 이를 공주(公州)에서 판각(板刻)하여 세상에 유행시켰다. 인묘(仁廟)가 공의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명하였다.

행장(行狀)에 대략 이르기를, “공은 천성이 장중(莊重)하여 언소(言笑)가 적었다. 문장은 정묘하고 심오하여 멀리 서한(西漢) 체재를 따랐고, 시는 성당체(盛唐體)를 배웠다. 경전(經傳)에 침잠하고 밤낮으로 무릎을 꿇려서 앉아 공경하는 것을 익히고 정(靜)을 주장하는 학문을 하였다.

의견을 말하고 일을 행할 때는 반드시 성현을 표준으로 삼았다.” 하고, 또, “살림을 돌보지 않았고 청탁[關節]은 통하지 아니하였다. 추종하는 자를 문에 들이지 않았고 녹봉은 친척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 하였으며, 또, “공이 남쪽으로 갈 때 순창 고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순창의 백성 남녀노유가 술과 찬을 앞다투어 가지고 와서

【독원문(讀原文)】

(涕)泣勸留曰。吾舊使君也。濟州之俗。尙淫祀而矇禮制。公述喪葬祭儀。以導氓俗。俗大變。於此亦可見風俗之一端矣。宋判書麟壽述 太常按謚法。博聞多見曰文。直道不撓曰貞。賜謚曰文貞公。

【역문(譯文)】

길을 막고 눈물을 흘리며 머물러 가기를 권하면서, “옛날 우리 고을 사또였다.”라고 하였다.

제주의 풍속이 잡신을 숭상하고 예제(禮制)를 모르므로, 공이 초상ㆍ장사ㆍ제사에 대한 의식을 기술하여 백성을 지도하니, 풍속이 크게 변화하였다. 여기에도 또한 풍교(風敎)의 일단을 보겠다.” 하였다. 판서 송인수(宋麟壽)가 지었다. 태상(太常)에서 시법(諡法)을 상고하건대,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곧은 도로 흔들리지 않음을 정(貞)이라 한다.” 하여, 문정공(文貞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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