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설치 시기, 주둔 부대 등은 미상..상천리 경찰주둔소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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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설치 시기, 주둔 부대 등은 미상..상천리 경찰주둔소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11.14 07: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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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동쪽 모퉁이에는 망루를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시설 남아

상천리 경찰주둔소 터

위치 ; 안덕면 상천리 산100번지
유형 ; 방어유적
시대 ; 대한민국

상천리_경찰주둔소터(다음지도)가공

 

 

상천리_경찰주둔소터

 

제주4·3사건은 1949년 3월 제주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의 귀순작전 등으로 무장대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또한 6월 무장대 총책임자 이덕구가 피살되면서 무장대는 궤멸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잔여 무장대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주민납치 등으로 세력을 불려나갔고 마을습격 등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에 제주도경찰국은 토벌대의 침식해결과 무장대와 주민들간의 연결을 차단하기 위해 제주도 산간 곳곳에 주둔소를 설치하였다. 이 주둔소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무장대의 활동을 제한하고 효율적인 토벌을 위해 각 경찰서별로 설치하기 시작했는데, 1952년 4월 기준 전도에 32개(추정)의 주둔소가 있었다.

주둔소는 마을주민을 동원하여 석축을 쌓고, 경찰 1명과 마을청년 5~6명이 상주하며 경계를 했으며, 토벌대 60명이 동시에 취침 및 식사를 할 수 있을 규모였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잔여 무장대의 활동이 왕성해지자 제주도경찰국은 적극적인 무장대 섬멸계획을 세우고, 1952년 11월 4개부대로 구성된 500여 명 규모의 ‘100전투사령부’를 창설했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상천리 경찰주둔소의 설치 시기, 주둔 부대 등은 미상이다.
주둔소 터는 위 그림과 같이 약간 비뚤어진 직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이다. 북쪽 성벽은 높이 1.1m, 길이 44m의 외담, 동쪽 성벽은 높이 1.5m, 길이 29m의 외담, 남쪽 성벽은 서남쪽에 겹담이 혼재하며 높은 곳은 1.5m, 길이는 39m 정도이다.(이상 길이는 다음 지도에서 거리 재기로 확인)

서쪽 성벽은 없어졌다. 북동쪽 모퉁이에는 망루를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남아 있으나 형태가 분명하지는 않다. 가시덤불이 가득하여 내부에 어떤 시설이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위 그림 노란색은 성담 있음, 분홍색은 멸실
《작성 17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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