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0)-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갑인봉사(甲寅封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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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0)-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갑인봉사(甲寅封事)'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2.10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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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제주 대정현 유배 10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모리재(某里齋)로 들어가는 관문인 화엽루(花葉樓 )

 

(이어서 계속)

<참고자료> ○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갑인봉사(甲寅封事)> 전문

【원문(原文)】

<그림 ()>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상소문 <갑인봉사(甲寅封事)> (1)

 

【판독(判讀)】

甲寅封事以弼善遆付司直時二月二十日

伏以嗚呼 以殿下仁聖之德 不幸遭人倫之變 欲盡其處之之道 而終不得自由 未免假手改見斯於鹿悍之武夫 其爲聖德之累 不旣大矣乎 今之論㼁之罪者 一則曰禍本也 二則曰奇貨也 其言固不爲無理 而試以濟王竑之事 援而比之 則亦有說焉 濟王初爲皇太子 見嫉於奸臣 退處藩邦 未幾爲賊徒所擁 黃袍加身 約誓已成 雖知其事之不濟 旋有討平之功 而身負惡名則有之矣 以今觀之 當時禍本 莫竑若也 兇賊奇貨 亦莫如竑也 彌遠陰謀殺之 可謂安社之忠 而時人冤其死 後世甚其殺者 何歟 觀夫眞德秀之言曰 三綱五常者 扶持宇宙之棟榦 奠安生民之柱石 人而無此 冠裳而禽犢矣 國而無此 中夏而裔夷矣 其言之痛切如此者 誠以竑之跡 雖或云云 而其心本無可疑 故原其情而雪其冤 仍請追封立後 古之君子 不計一時之利害 惟論義理之當否 惓惓以倫紀之或紊 君德之或愆 告戒而勸導之者 爲如何哉 今㼁 一王子耳 心跡與此懸殊 只出賊

 

【해석(解釋)】

<갑인봉사(甲寅封事)> 필선(弼善)을 체직(遞職)하고 사직(司直)에 부직(付職)하였을 때이니, 2월 20일이다.

삼가 아룁니다. 아, 인성(仁聖)의 덕을 가지신 전하께서 불행하게도 인륜(人倫)의 변고를 당하시어 그 처리할 방도를 다하고자 하셨으나, 끝내 뜻대로 되지 않아 억세고 모진 무부(武夫)의 속임을 받는 것을 면치 못하셨으니, 성스러운 덕에 누가 된 게 이미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의(㼁)의 죄를 의논하는 자들이 첫째는 화본(禍本)이라고 말하고, 둘째는 기화(奇貨)라고 말하는데, 그 말이 전혀 무리한 말은 아닙니다마는, 한번 제왕 횡(濟王竑)의 일을 원용(援用)하여 비교해 보면 역시 할 말이 있습니다.

제왕이 처음 황태자가 되었을 때에 간신(奸臣)의 질시를 받아 변방으로 쫓겨갔다가 얼마 후에 적도(賊徒)들의 옹호를 받아 몸에 황포(黃袍)를 두르고 서약(誓約)을 하였습니다. 비록 그 일이 성공하지 못할 줄 알고 곧바로 토평(討平)한 공이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악명(惡名)을 진 점은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정으로 비추어 보면 당시의 화본이 횡만 한 자가 없었고, 흉적의 기화도 횡만 한 자가 없었습니다. 사미원(史彌遠)이 음모를 꾸며 살해한 것이 사직을 안보하기 위한 충성심이라고는 할 수 있겠으나, 당시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원통해 했고, 후세에도 그를 살해한 것이 심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진덕수(眞德秀)가 말하기를,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은 우주를 떠받들고 있는 동간(棟幹)이며,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보장해 주는 주석(柱石)이다. 사람에게 이것이 없다면 갓을 쓰고 옷을 입었더라도 짐승에 지나지 않고, 나라에 이것이 없다면 중하(中夏)일지라도 오랑캐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는데, 그가 이렇게까지 통절하게 말한 것은 진실로 횡의 자취가 비록 이러저러하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본래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본정(本情)을 찾아서 그의 원통함을 씻어 주자는 차원에서 추급하여 봉호(封號)를 주고 후사(後嗣)를 세워 주기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옛날의 군자(君子)가 한때의 이해(利害)를 따지지 않고 오직 의리에 합당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논하고, 윤기(倫紀)가 혹시라도 문란해지지 않을까, 임금의 덕에 혹시라도 흠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경계를 주고 선을 권장하여 인도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 그랬겠습니까. 지금 의(㼁)는 일개 왕자(王子)일 뿐이니, 심적(心迹)이 이 횡과는 현격하게 다릅니다. 단지 역적의 공초에서 나왔을 뿐,

【원문(原文)】

<그림 ()>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상소문 <갑인봉사(甲寅封事)> (2)

 

【판독(判讀)】

招 未嘗有擁立之迹矣 蒙無知識 亦安有謀逆之心乎 如使德秀之輩 立乎本朝 則其不肯請殺也明矣 恭惟殿下 深憐童子之無知 仰體先王之遺敎 思所以保護而全安之者 蓋無所不用其極 百僚盈庭 三司交章 自去年迄今春 凡幾何日月 而惻念難遏 兪音終閟 嗚呼 殿下之於㼁 豈不知其不相容也 然而留時引日 愈久而愈拒者 豈不以逆賊之子 猶有待年之事 況於幼稚之弟 豈合遽施刑章 安置江都 待其年滿 觀志行之如何 而徐爲之處 亦非晩也 聖意所在 灼然可知 而推鞫諸臣 經年入侍 無一言將順其美 三司多官 善爲雷同 無一人愛君以德 其視君德之得失 不啻若越瘠之秦視 噫 殿下之勢 可謂孤立而無助矣 尤可痛者 殿下待之以不死 而鄭沆待之以死 朝廷論之以其法 而鄭沆迫之使死 使殿下不能如大舜之處象 而未免爲漢 唐以下人君處置未盡合理之歸焉 噫 殺人者死 國法甚嚴 殺凡人無辜 且罔赦 況殺吾君同氣之親乎 臣愚以爲不斬鄭沆 恐殿下無面目入於先王廟庭也 嗚呼 旣往之咎 雖不可諫 將來之美 猶或可追 生不相容者 勢也 死有贈典者 情也 昔宋太宗之於

【해석(解釋)】

일찍이 옹립한 흔적이 없습니다. 어려서 아는 것이 없는데 어찌 역모(逆謀)를 꾀할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만약 진덕수와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본조에 와서 벼슬하게 했더라면 그는 기꺼이 죽이기를 청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불쌍하게 여기시고 선왕(先王)이 남기신 가르침을 체득하셔서 그를 안전하게 보호하기를 생각하시어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으실 것입니다마는, 백관들이 뜰에 가득하고 삼사(三司)가 번갈아 상소를 하였습니다.

지난해부터 올해 봄까지 많은 시일이 지났지만 측은한 생각을 막기가 어려워 끝내 윤허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아, 전하께서 의(㼁)에 대하여 서로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이리저리 시일을 끌면서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욱 거부하신 것은, 어찌 역적의 자식일지라도 오히려 성장하기를 기다린 일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어린 아우에게 어찌 갑자기 형장(刑章)을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강도(江都)에 안치(安置)하여 나이가 찰 때까지 기다려서 마음 씀씀이와 행동거지가 어떤지를 보아 서서히 처리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도 추국(推鞫)을 담당했던 신하들이 지난해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그 아름다운 뜻을 받들어 이루어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삼사의 많은 관원들도 부화뇌동(附化雷同)하여 임금을 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 임금 행실의 잘잘못 보기를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었으니, 아, 전하의 형세가 신하들의 협조를 받지 못하고 고립되었다 하겠습니다.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전하께서 죽이지 않는 것으로 그를 대하였는데 정항(鄭沆)은 죽이는 것으로 그를 대하였고, 조정에서는 정당한 법을 가지고 의논하였는데 정항은 협박하여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하로 하여금 대순(大舜)이 아우인 상(象)을 처리했던 것처럼 하지 못하게 하였고, 한(漢)ㆍ당(唐) 이하의 임금들이 처치한 것이 다 이치에 맞지 못하였던 그런 상황에 귀결되는 것을 면치 못하게 하였습니다. 아,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는 국법이 매우 엄격합니다.

죄 없는 보통 사람을 죽여도 용서받지 못할 터인데, 더구나 우리 임금의 동기간을 죽인 경우이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이 생각하기에는 정항을 참형에 처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전하께서 선왕의 묘정(廟庭)에 들어갈 면목이 없을 듯합니다.

아, 이미 지나간 잘못은 간언(諫言)할 수 없다 하더라도 장차 올 아름다움은 오히려 추구할 수 있습니다. 살아서 서로 용납하지 못한 것이 형세(形勢)라고 한다면, 죽어서 증전(贈典)을 두는 것은 인정(人情)이라 할 것입니다. 옛날 송(宋)나라 태종(太宗)은

【원문(原文)】

<그림 ()>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상소문 <갑인봉사(甲寅封事)> (3)

 

【판독(判讀)】

廷美 旣致之死 而旋有封爵恤孤之恩 眞宗之於元佐 只誅首謀而起封於久廢之中 此盛德事也 仁人之於弟也 不藏怒焉 不宿怨焉 況殿下之於㼁 旣無可藏之怒 焉有可宿之怨乎 其死之冤 路人猶悲 況聖上哀痛之懷 當復何如 近日玉候之靡寧 臣知其出於哀傷之過也 臣愚以爲宜命有司 追復永昌之號 葬以大君之禮 又下哀痛之敎 使四方臣庶 曉然知殿下至誠友愛之本心 則上可以慰先王在天之靈 下可以解萬民視聽之惑 而傳之後世 亦將有辭 今日淸明之朝 必無章墍之繳詔 殿下何憚而莫之爲也 抑臣之私憂過慮 又有甚於此者 不得不盡其說焉 善乎 宋臣韓琦之言 曰 父母慈而子孝 此常事 不足道 惟父母不慈而子不失孝 乃爲可稱 大妃雖或不慈於殿下 殿下安得不盡孝於大妃乎 況㼁已死矣 復何疑間之有哉 願繼自今 斥絶讒邪之言 杜塞交搆之路 如有奸細之徒 敢以不好語 及於大妃 卽付有司 論以重律 殿下亦宜恭爲子職 不廢問安之禮 無怠視膳之誠 務得大妃之歡心 重見母子之如初 則豈不足以掩前失而明新化乎 雖然 爲此有道 遠佞人而已 嗚

【해석(解釋)】

정미(廷美)에 대하여 이미 죽이도록 하고서 곧바로 봉작(封爵)과 가족을 보살펴 주는 은혜를 내리도록 하였으며, 진종(眞宗)은 원좌(元佐)에 대하여 단지 역모의 우두머리만 주벌하고 오랫동안 폐기했던 가운데에서 봉해 주도록 하였으니, 이는 성덕(盛德)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어진 사람은 아우에게 노여움을 간직하지 않으며 원한을 묵혀 두지 않는 법입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의(㼁)에 대하여 이미 간직해 둔 노여움이 없는데 어찌 묵혀 둔 원한이 있겠습니까. 그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길 가는 사람도 슬퍼하는데 더구나 성상의 애통한 마음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요즘 들어 옥후(玉候)가 편치 못하신 것도 지나치게 비통해하신 데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신이 생각하기에는,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영창(永昌)이란 호를 추급하여 회복시키고 대군(大君)의 예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시고, 또 애통해하는 전교를 내려서 온 나라의 백성들로 하여금 전하의 지극한 정성과 우애(友愛)로운 본심을 분명히 알게 하셔야만, 위로는 하늘에 계신 선왕의 혼령을 위로하게 될 것이고, 아래로는 모든 백성들의 의혹에 찬 마음을 풀어 줄 수 있을 것이며, 후세에 전하더라도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청명한 조정에는 필시 장기(章墍)의 교조(矯詔)가 없을 것인데 전하께서는 무엇을 꺼리시어 그 일을 하지 않으십니까.

신의 사사로운 염려에 지나친 걱정인지는 모르지만, 또한 이것보다 심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훌륭한 송나라 신하인 한기(韓琦)가 말하기를, “부모가 자애로울 때 자식이 효도하는 것은 이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언급할 게 못 되고, 부모가 자애롭지 않은데도 자식이 효성을 잃지 않아야 그것을 일컬을 만하다.” 하였습니다.

대비(大妃)께서 설사 전하를 자애로이 대하지 않더라도 전하께서 어찌 효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의(㼁)는 이미 죽었는데, 다시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원컨대 지금부터는 참소(讒疏)하는 말을 근절시키고, 얽어매어 무함하는 길을 막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만일 간사한 무리가 감히 좋지 않은 말로 대비를 언급할 경우에는 즉시 유사에게 넘겨서 중률(重律)로 논죄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전하께서도 자식 된 직분을 공손히 다하여 문안하는 예를 폐기하지 마시고 진짓상 살피는 정성을 게을리하지 말아서 대비께서 기뻐하시도록 노력하여 처음과 같은 모자 관계를 다시 보게 된다면, 어찌 예전의 잘못을 덮고 새로운 덕화를 밝히기에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이렇게 하는 방법은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뿐입니다.

【원문(原文)】

<그림 ()>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상소문 <갑인봉사(甲寅封事)> (4)

 

【판독(判讀)】

呼 母子兄弟之間 人豈易言之哉 設有當誅之罪如管蔡 可廢之惡如呂 武 爲言官者 所當先議同僚 次通他司 上告大臣 下詢諸宰 待其論議歸一 然後發於啓箚 乃所以重其事也 頃者 鄭造 尹認 丁好寬等 首發廢妃殺弟之議 而不議於同僚 不通於他司 不告於大臣 不詢於諸宰 而竊發於完席之上 遽暴於避嫌之中 曾不若論一守令劾一庶官之猶或持難 此其心不難知矣 蓋自近年以來 倖門一開 勳名太濫 貪功樂禍之徒 接跡而起 至以吾君之至親 爲自己富貴之餌 比如逐獸者擠人獨走 冀得先殺之功 噫 爲人臣子而是可忍耶 臣愚以爲殿下欲全母子之恩 亟取三人者 投諸四裔 不與同中國 後讒說者不得作 而三綱五常昭揭於宇宙矣 臣本以孤遠之蹤 猥荷聖明之知 旣參勳盟 又廁淸班 自料材力 無他報效 惟將勿欺犯三字 爲平生事君之節 竊自附於莫如我敬王之義矣 方當大論之發 或在罷散 或以疾病 一未隨參於百僚之後 日者 人言罔極 目以護逆 必欲置之死地 臣自念職非言責 堂有老母 與其徒死於讒鋒 曷若一言而死於雷霆之下哉 力疾就庭 一啓乃退 思懷尺疏 仰叫閶闔 庶幾

【해석(解釋)】

아, 부모와 자식과 형제 사이를 남이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마땅히 주벌해야 할 죄가 관숙(管叔)ㆍ채숙(蔡叔)과 같은 점이 있고, 폐출해야 할 악이 여태후(呂太后)ㆍ무측천(武則天)과 같은 점이 있을지라도 언관이 된 자는 마땅히 먼저 동료와 의논하고 다음에는 다른 관사에 통보한 다음, 위로는 대신(大臣)에게 알리고 아래로는 재신(宰臣)들에게 물어서 논의가 한 곳으로 귀결되기를 기다린 뒤에 계사(啓辭)나 차자(箚子)를 올려야 하는 것이니, 바로 그 일을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정조(鄭造), 윤인(尹認), 정호관(丁好寬) 등이 맨 처음 대비를 폐하고 아우를 살해하도록 하는 논의를 제기하면서 동료들에게 의논하지도 않고, 다른 관사에 통보하지도 않았으며, 대신에게 고하지도 않고, 재신들에게 묻지도 않았습니다.

슬그머니 완석(完席)에서 발언하고 갑자기 피혐하는 중에 드러냄으로써 한 사람의 수령을 논죄하고 한 사람의 관리를 탄핵하는 데에 오히려 신중을 기하는 것처럼 하지도 않았으니, 이는 그 속셈을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대개 요 몇해 전부터 요행(僥倖)의 문이 한번 열리고 훈명(勳名)이 지나치게 남발되자, 공(功)을 탐하고 화(禍)를 즐기는 무리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우리 임금의 지친(至親)을 자기네의 부귀(富貴)를 낚는 미끼로 삼기까지 하였으니, 비유하면 짐승을 쫓는 자가 남들을 제치고 혼자 달려가 먼저 죽인 공을 얻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아, 남의 신하가 되어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전하께서 모자간(母子間)의 은혜를 온전히 하고자 하신다면, 속히 세 사람을 잡아다가 변방으로 쫓아 보내서 나라 안에 함께 있지 않도록 하셔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다음에야 참소하는 말을 늘어놓는 자들이 발생하지 않게 되고, 삼강오상(三綱五常)이 우주에 밝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

신은 본래 고단(孤單)하고 소원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성명(聖明)의 인정을 받아서 이미 훈맹(勳盟)에 참여하였고 또 청반(淸班)에 들었습니다마는, 스스로 신의 재력(材力)을 헤아려 보건대, 달리 보답할 길은 없고 오직 ‘물기범(勿欺犯)’이라는 세 자(字)를 가지고 평생에 임금을 섬기는 신조로 삼아 왔었기 때문에 저 나름대로는 임금을 공경하는 의리로 볼 때 나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자부하였습니다.

바야흐로 큰 논의가 제기된 때를 당하여 혹은 파산(罷散) 중에 있거나 혹은 질병 때문에 그동안 한 번도 백관들의 뒤를 따라 참석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일전에 사람들의 말이 망극하게도 역적을 비호하였다고 지목하면서 기어이 사지(死地)에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혼자서 생각하기를, ‘언론을 맡고 있는 직책은 아니지만 집에는 노모(老母)가 계시니, 참소에 의한 칼날에 죽는 것이 어찌 한 말씀을 드리고 임금님의 노여움을 사서 죽는 것만 같겠는가. 병을 무릅쓰고 조정에 나아가 한 번 아뢰고 물러와서 생각나는 것을 간단히 적어 대궐에 바친다면

【원문(原文)】

<그림 ()>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상소문 <갑인봉사(甲寅封事)> (5)

 

【판독(判讀)】

暴微臣之志而補衮職之闕 搆思未就 以至今日 不及捄正之罪 臣實有之 請殺無辜之罪 臣亦難免 伏願殿下先正臣之罪 以彰其不忠 臣雖萬殞 不敢怨悔 臣無任激切戰兢之至 謹昧死以聞 疏入光海大憑震電 切責政院 勘罷捧疏承旨 於是三司幷論以削奪 絶島安置 光海猶怒其罰輕 誚責三司峻 於是直請拿鞫 公三月 就獄 六月 光海親鞫 秋再招 仍命安置大靜

【해석(解釋)】

아마도 하찮은 신의 뜻을 알릴 수 있고 곤직(袞職)이 빠뜨린 점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말았으니, 미처 바로잡지 못한 죄가 신에게도 실제로 있는 것이며, 무고한 자를 죽이도록 청한 죄를 신도 역시 모면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먼저 신의 죄를 다스려서 그 불충한 점을 드러내도록 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신이 비록 만번 죽더라도 감히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떨리는 마음을 가누지 못한 채,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상소가 들어가자 광해(光海)가 크게 진노하여 정원을 책망하고 상소를 받아들인 승지를 파직시켰다.

이때에 삼사가 삭탈하여 먼 데 있는 섬에다 안치시킬 것을 논하였으나 광해가 오히려 그 벌이 가볍다고 노여워하여 삼사를 꾸짖자, 이에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3월에 옥에 갇히고 6월에 광해가 친히 국문하였으며, 가을에 재차 공초하여 대정(大靜)에 안치시키도록 명하였다.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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