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4)-척화파(斥和派)의 상징,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동계(桐溪) 정온(鄭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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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4)-척화파(斥和派)의 상징,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동계(桐溪) 정온(鄭蘊)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2.20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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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제주 대정현 유배 10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6.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척화파(斥和派)의 상징이 된 두 인물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동계(桐溪) 정온(鄭蘊)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에 머물며 청나라에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한 인물로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더불어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병자호란이 끝난 뒤 평생의 절개를 지킨 두 사람의 행적이 거의 대동소이한데도 불구하고 청음 선생에 비해 동계 선생에 대한 추앙의 소홀함을 두고 이를 비판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동계 사후 그의 신도비명을 쓰기도 한 조경(趙絅)이란 인물이 그러한데, 대명의리(大明義理)를 지킨 인물들을 표창하자고 상소를 올려 제안했다.

그는 동계 선생보다는 열일곱 살 아래지만, 효종 원년(1650) 4월에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척화신(斥和臣)으로 지목되어 청(淸)나라로 끌려가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가장 주목하여 표창하려고 한 인물이 다름 아닌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이었다. 그는 특히 정온의 행적을 거론하며 이에 그 충절을 포상해야 한다고 적극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했는데, 《효종실록(孝宗實錄)》 ‘3년 11월 13일’조에 보면, 그의 주장이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전 판서 조경이 포천(抱川)에서 분부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 … 또 생각건대, 어려움을 당하여 신하가 죽는 의리를 안 자는 고상(故相) 김상헌(金尙憲)과 고(故) 참판 정온(鄭蘊) 두 사람뿐입니다. 정온은 그때 병든 몸으로 시골에 내려간 뒤에 죽지 못한 것을 스스로 허물하여 처자를 물리치고 사는 집을 버리고 궁벽한 산중에서 혼자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고난을 받으며 절조를 지킨 것은 자결을 시도했으나 죽지 못한 유감을 보상하기에 충분한데 아직 증시(贈諡)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또한 어찌 성조(聖朝)의 부족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유사에 명하여 조헌(趙憲)의 예에 따라 특별히 증시하고 후손을 등용하게 하소서. 정온의 평생 지절(志節)이 어찌 죽은 뒤의 시호를 명예롭게 여기겠습니까.’”

한편 조경(趙絅)의 《용주유고(龍洲遺稿)》에 실려 전하는 <포충절소(褒忠節疏)>란 상소문에는 이보다 더 구체적 내용을 담아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삼가 아룁니다. 일개 선비가 하나의 절개를 세우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와 관계가 없는 듯하지만, 옛날의 제왕은 반드시 그 아름다움을 표창하고 그 이름을 널리 알리며 천하 후세 사람들이 그 일을 듣지 못할까 두려워 급급해하였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군신과 부자는 하늘이 부여한 본성입니다. 위급하여 존망이 달린 때를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버려 자기 임금에게 보답하지 않을 수 없고, 자식은 제 몸을 잊고 자기 아버이에게 보답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은 고금 천하에 공통된 도리입니다.

하지만 신하로서 임금을 뒷전으로 여기는 자가 있고,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버리는 자가 있으니, 악행을 저지하고 선행을 권면하는 군주의 도리를 그 사이에 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략)

신은 병자년(1636, 인조14) 난리가 일어났을 때 호종하는 신하들의 반열에 있지 않았으니, 도망한 죄로 처벌받지 않은 것만도 다행입니다. 어찌 감히 입을 열어 정온을 위해 유세하겠습니까.

단지 정온의 일이 이 세상에 밝혀지지 않으면 성상께서는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의리를 후세에 알릴 수가 없고, 과거 제왕들이 절의를 표창한 도가 전하에 이르러 끊어질 것이니, 신하된 자가 이익을 생각하며 임금을 섬기고, 자식된 자가 이익을 생각하며 어버이를 섬기는 모습을 장차 보게 될 것입니다. (…)

신은 예전에 정온의 일을 목격한 시종신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화친하는 일이 처음 결정되던 날, 정온은 새벽에 일어나 강개하게 통곡하고는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스스로 자기 배를 찔렀습니다.

한집에 있던 사람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 그 이야기를 듣고 구하러 달려갔더니, 칼날이 배에 파묻히고 피가 침석에 가득하였는데 한참 동안 기절해 있다가 성상께서 내의(內醫)에게 치료해주라고 명하신 덕택에 마침내 살아났다고 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정온에게 칼날이 목에 닿는 다급한 상황이 있었습니까, 방패와 창을 들고 적에게 달려가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무슨 이유로 전혀 위태롭지 않은 곳에서 혼자서 칼로 자신을 찌를 생각을 하여 부모가 남겨준 몸을 해치려 했겠습니까.

정온이 평생 수립한 바를 가지고 논하자면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의리를 평소 가슴속에 품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병자년의 일을 당하자 자기도 모르게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만약 거짓 죽음으로 명예를 구한 것이라 여긴다면 정온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죽기로 작정하고도 끝내 죽지 못한 것을 정온의 죄로 삼는다면 정온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중략)

정온은 일단 남한산성을 나간 뒤로 일절 죄인으로 자처하며 감히 편안하게 처자의 봉양을 받을 수 없어 풀로 엮은 움집에 살면서 항상 석고대죄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장자(章子)입니다. 또 그 당시 시종일관 변치 않고 절개를 지킨 사람은 오직 정온과 김상헌(金尙憲)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전하께서 김상헌에 대해서는 우뚝 솟은 천 길 절벽과 같은 기상이 있다고 칭찬하며 삼공의 지위를 내려 총애하셨는데, 정온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우하시니, 신은 밝으신 성상께서 충신을 현양하는 방도를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로써 정온 선생은 뒤늦게 효종 3년(1652)에는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그로부터 5년 뒤인 효종 8년(1657)에는 ‘문간공(文簡公)’이란 시호를 받기에 이른다.

<그림 (16)> 문간공(文簡公) 시호(諡號)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 章子(장자) : 맹자》 〈이루 하(離婁下)〉편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장자는 제(齊)나라 사람 광장(匡章)이다. 광장은 부친과 뜻이 맞지 않아 쫓겨났는데, 아내를 내보내고 자식을 멀리하여 평생 처자의 봉양을 받지 않았다.

맹자는 “장자라고 어찌 처자가 있기를 바라지 않았겠는가마는 부친에게 죄를 지어 가까이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아내를 내보내고 자식들을 물리쳐서 종신토록 봉양을 받지 않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죄가 크다.’라고 여겼으니, 이것이 바로 장자이다.”라고 하였다.

<참고자료> 동계 정온 선생에게 시호(諡號)를 내린 <교지(敎旨)>

【판독(判讀)】

敎旨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世子左賓客 行 嘉義大夫 吏曹參判 兼 同知經筵 義禁府 春秋館事 鄭蘊 贈諡 文簡公者

順治十四年 二月 初七日

【해석(解釋)】

<교지(敎旨)>

“순치(順治) 14년, 곧 조선 효종(孝宗) 8년(1657) 2월 7일에 행(行) 가의대부(嘉義大夫) ‧ 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동지경연(同知經筵) 의금부(義禁府) 춘추관사(春秋館事)인 정온(鄭蘊)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 ‧ 이조판서(吏曹判書) 겸(兼) 지경연(知經筵) 의금부(義禁府) 춘추관(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와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과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로 문간공(文簡公)을 내린다.”

한편 동계의 지조를 높이 산 정조(正祖) 임금은 제문과 함께 한 편의 시를 지어 동계의 집안에 내려보냈는데, 이 내용은 현재 동계종택의 사당에 현판으로 걸려 있기도 하다.

 

 

<그림 (17)> 동계사당에 걸린 정조 임금의 어제시(御製詩)

 

○ 정조 임금이 하사한 어제시(御製詩)

 

日長山色碧嵯峨 / 일장산(日長山) 산빛이 푸르게 우뚝 솟았나니

鍾得乾坤精氣多 / 천지의 바른 기운 많이 모아 간직했네.

北去南來同一義 / 북으로 갔건 남으로 왔건 똑같은 의리이니

精金堅石不曾磨 / 견고한 금석처럼 결코 닳은 적이 없다네.

 

이 시의 표현 중 3구의 ‘북으로 갔건 남으로 왔건 똑같은 의리[北去南來同一義]’란 표현은 절묘하다. 북(北)으로 간 인사로는 중국 심양(瀋陽)에 끌려가 6년간 옥살이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을 상징해내고, 남으로 온 인사로는 대정현에서 10년간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어 귀양살이를 산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을 상징화해 서로 엮어 표현한 시구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7. 모리(某里)에서 보낸 만년(晩年)의 삶 다섯 해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다고 하자 동계 선생은 칼을 뽑아 스스로 배를 찔러서 자결을 시도했다. 당시 선생의 나이 69세였기에 너무 늙어 힘이 모자라 죽지 않고 기절했다가 임금이 보낸 어의(御醫)의 구원으로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편여(箯輿)에 누운 채로 고향인 거창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곧바로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서쪽에 은둔처를 마련해서 임시 거처로 삼았다. 이 당시 선생이 스스로 탄식하며 말한 내용이 <동계연보(桐溪年譜)>에 실려 전한다.

“내가 남한산성에서 죽어 국은(國恩)에 보답하지 못했으니, 어찌 차마 나라의 백성 노릇을 하며 처자(妻子)와 함께 사는 즐거움을 누려서 스스로 보통 사람과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 해가 정축(丁丑, 1637)년으로서 숭정(崇禎) 10년에 해당하는데, 이 때 일명 ‘화엽시(花葉詩)’로도 불리는 <숭정십년력(崇禎十年曆)에 시를 적음>이란 시를 지었다.

 

“숭정(崇禎)이란 연호가 여기에서 그쳤으니[崇禎年號止於斯] /

내년에는 어찌 차마 다른 책력 펼치겠는가[明歲那堪異曆披]. /

이제부터 산골 사람은 일이 더욱 줄었으니[從此山人尤省事] /

단지 꽃과 잎을 보고서 계절 바뀜을 알리라[只看花葉驗時移].”

 

<그림 (18)> 석침(石枕)의 화엽시(花葉詩)
(*소장처 - 동계종택)

 

이윽고 덕유산 남쪽 기슭의 수목이 우거진 곳으로 옮겨와서는 풀을 엮어 집을 만들고 흙을 쌓아 침상을 만들어 모리구소(某里鳩巢)라 이름 붙이고, 산밭을 개간하여 기장과 조를 심어서 스스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왜 ‘아무개 마을’이란 뜻의 모리(某里)를 내세우게 되었는가에 대해선 동계 선생이 지은 <모리구소기(某里鳩巢記)>의 내용을 참조할 만하다.

곧, “… 이로부터 나의 이름을 감추고 나의 자취를 감추어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하여 모리(某里)에서 노닐려 하는 것이다[自是藏某之名 秘某之跡 使世人 不知 某爲誰某而遊於某里也].”라고 했다.

<그림 (19)> 모리재(某里齋) 편액 <br>
<그림 (19)> 모리재(某里齋) 편액

 

<그림 ()> 모리재(某里齋)로 들어가는 관문인 화엽루(花葉樓 )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책력을 보지 않고 단지 꽃이 피고 지고, 나뭇잎이 변하는 것으로 계절의 변화를 가늠하며 지내다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온 지 5년 뒤 세상을 하직하니 그때가 인조 19년(1641) 음력 6월 21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계 선생이 사망한 지 열흘 뒤인 7월 1일엔 제주에 이배된 광해군마저 세상을 뜨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뒤인 1644년에 명(明)나라 의종(懿宗)이 자살하고, 이자성(李自成)에 의해서 북경이 함락되면서 명(明)과 청(淸)이 교체되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는다.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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