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7)-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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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7)-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2.28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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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제주 대정현 유배 10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게속)

 

10. 나오는 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 “이날, 우리가 어찌 목놓아 크게 울지 않을 수 있으리오”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바로 대한제국 시절 언론인이었던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이 《황성신문》에 게재했던 논설의 한 제목이다.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대한제국에 대한 침탈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일본은 1905년 11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내용의 을사늑약을 통과시켰다.

이에 이의 부당성과 일제의 침략성을 그해 11월 20일자 신문 지상을 통해 고발한 게 바로 이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 조약의 체결에 앞장선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을 비롯한 여럿을 통렬히 비판하였고, 동양 삼국의 평화를 주장해왔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기만성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어 새삼 눈길을 끈다.

<그림 (34)> 장지연(張志淵)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기사 원문 -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

 

국한문혼용체로 된 이 신문 기사의 오른쪽 아랫부분을 주목해 보면 이렇게 읽힌다.

“ … 金淸陰의 裂書哭도 不能ᄒᆞ고 鄭桐溪의 刃割腹도 不能ᄒᆞ고 偃然生存ᄒᆞ야 世上에 更立ᄒᆞ니 何面目으로 强硬하신 皇上陛下를 更對ᄒᆞ며 何面目으로 二千萬 同胞를 更對ᄒᆞ리오 嗚呼痛矣며 嗚呼憤矣라

이를 다시 현대어로 옮기면 이렇다.

“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어버리지도 못하고, 동계(桐溪) 정온(鄭蘊)처럼 배를 갈라 할복자살도 시도하지 못한 채, 그저 편안히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다시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이천만 동포의 얼굴을 다시 마주한단 말인가. 아, 원통하도다! 아, 분하도다!”

 

 

<그림 (35)>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초상

 

당시로 250여 년이 넘는 세월 속에 잊혀질 법도 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인물들을 새삼 거론해 상기시키며, 구국의 결단을 단행하지 못한 자신들을 자책하는 조선 선비의 기상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이 귤림서원에 추향(追享) 되기 시작한 것은 귤림서원이 선 이듬해인 현종(顯宗) 10년(1669) 때로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과 동시에 이뤄지게 된다.

그 뒤로 제주 목사를 역임한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이 뒤늦게 배향되기에 이르고, 숙종 8년(1682)에는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숙종 21년(1695)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귤림서원에 향사(享祀) 되면서 제주 오현(五賢)의 다섯 신위가 최종 확정되기에 이른다.

귤림서원에 대한 제주 오현의 봉향 과정에 대해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학교고>에 그 기록이 실려 전한다.

귤림서원은 현종 9년(1668)에 처음 세워졌고,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기까지 212년 동안 존속하면서 유림을 대표하던 오현의 신위를 모셔 제사를 이어왔던 사당(祠堂)이었고, 제주 유생의 교육을 맡아 주관했던 학당(學堂)으로서 제향(祭享)과 강학(講學)의 요람이었던 셈이다.

<그림 (36)> 일제강점기 때(1932) 조두석 앞에서 행해진 오현단(五賢壇) 제사
(*사진출처 - 《제주100년》)

 

동계 선생이 제주에 유배를 오기 이전까지의 학문적 경향이란 대개 ‘남명(南冥) 조식(曺植) →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 동계(桐溪) 정온(鄭蘊)’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남명학파(南冥學派)가 주류인 대북파(大北派)의 경향이었다.

그러나 제주에서 10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해배(解配) 된 이후의 학풍이란 ‘퇴계(退溪) 이황(李滉) → 한강(寒岡) 정구(鄭逑) →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학맥으로 이어지는 남인계(南人系)의 특성을 나타낸다고 봄이 학계의 일반적 통념이다.

역사적 사실로서 유배지가 제주의 최남단인 대정현이고, 유배 기간이 10년 가까운 세월에 해당함은, 동계 정온 선생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삶이 우연히 서로 닮아있다.

비록 그 시간적 터울이란 2백 년이 넘는 다소 긴 세월이긴 해도, 여느 적객(謫客)들과는 달리 비교적 긴 유배 생활을 했으면서도 해배(解配) 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음 또한 서로 공유했다. 그러기에 자연스레 동계(桐溪)와 추사(秋史)란 두 인물이 서로 비교 대상이 되곤 한다.

<그림 (37)> 추사(秋史) 선생의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

 

추사 선생의 경우, 추사체(秋史體)의 완성이 <세한도(歲寒圖)>란 작품을 통해 대표된다면, 동계 선생은 <덕변록(德辨錄)>이란 저술을 남김으로써 중국 은(殷)나라 시대부터 남송(南宋) 때까지 학자 59인의 행적을 추적해 볼 수 있는 사상적 지평을 열었다.

동계 정온 선생이 이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도 평소 마음속에 간직했던 덕목을 꼽으라면, ‘삶이 곤란(困難)하더라도 덕(德)으로 극복해나가는 지혜를 발휘함’이라고 추단(推斷)할 수 있을 듯하다.

이는, 그의 <덕변록 서문>에서 밝혔듯이, “《주역》 곤괘(困卦)의 ‘움직일 때마다 후회하게 될 것이라 하여 후회하는 마음을 둔다.’는 것으로 귀감을 삼기로 하였다.”고 강조한 바와도 상통한다. <끝>

 

 

 

(오현 연재 다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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