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샘이 솟던 흔적 역력..해안동 서천암(逝川庵)지 미륵석상
상태바
[향토문화] 샘이 솟던 흔적 역력..해안동 서천암(逝川庵)지 미륵석상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1.05 09: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절이 없어진 후에도 미륵석상이 있어 신앙민들이 기도하러 많이 다녔다고 한다.

해안동 서천암(逝川庵)지 미륵석상

 

위치 : 해안동 2365-1번지(노형로 27-10) 돌나무식당 정원
시대 : 고려(추정)
유형 ; 불교유적

해안동_서천암터미륵석상

 


해안동 2278-2번지 서천암(逝川庵) 터에는 샘이 솟던 흔적이 역력한데 이 옹달샘 바로 위에 오래도록 石佛(미륵불, 미륵석상, 석불입상)이 모셔져 있었다. 절이 없어진 후에도 미륵석상이 있어 신앙민들이 기도하러 많이 다녔다고 한다.

이는 불교에 민간신앙이 혼재되어 발전하게 됐고, 이 미륵불에 치성을 드리면 득남과 평안의 대상으로 숭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간혹 촛대도 발견되곤 했다.

1970년대까지도 그런 신앙민이 많았으므로 농사에 지장이 있다고 밭 임자는 누가 옮겨 주기를 바랐는데, 신이 깃들어 있는 석상이라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것을 1980년대에 돌나무식당의 주인 양재후씨가 경운기를 이용하여 옮겨 왔다고 한다. 현재 서천암지 미륵불은 돌나무식당 경내에 향나무 밑에 자리해 있다.(제주불교 120912)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의 정언(正言) 이영(李潁)이 완도에 유배되자, 그의 숙부인 중 혜일이 따라와서 찾아보고 곧 섬(제주)으로 들어가 절을 짓고 살았다”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유추해보면 혜일 스님이 제주도에 들어와 여러 절들을 돌며 시를 남긴 것은 이영의 완도 유배시기인 고려 고종36년(1250) 후인 것이 확실하며, 혜일이 제주에 머문 시기는 고려 충렬왕 무렵인 1275년에서 1308년 사이다.

그가 이때 도인이 서천암을 창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최소한 1200년대 초반부터 이 사찰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미륵석상을 살펴보면 그 조성양식이 고려초기의 민중적인 미륵부처의 형태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미륵석상은 1200년 이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제주불교(20160108)는 이 미륵석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돌과 바람으로 척박했던 땅 제주도. 제주민중들은 살아남기 위해 땅 속에 박혀있는 돌을 캐내면서 농경지를 넓혀갔다. 이런 척박한 환경으로부터 민중들은 위로를 받을 믿음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로써 민중들은 돌을 향한 다산의 희망과 생활의 풍요를 기원하는데서 제주의‘돌미륵’이 확산되고 뿌리내려졌다.

그 대표적 돌미륵이 서천암지(덕절) 돌미륵으로 관세음보살처럼 옷주름이 용암을 타고 내리듯 다른 미륵에 비해 화려하다. 그 형상에 눈과 코, 입 모양새를 새겨 넣어 주었다. 이 미륵불은 땅 속에서 희귀한 모양이 발견됨에 따라 점안의식을 통해 믿음의 의지처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돌미륵이 발견된 덕절은 예로부터 고려시대 서천암이라는 큰 절이 자리했던 곳이다. 서천암은 고려시대 고승인 혜일 스님이 수도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을 비롯해 남사록(1601) 등에 서천암의 존재에 대해 혜일 스님의 시가 소개되고 있다. 혜일 선사는 고려 충렬왕 무렵인 1275년에서 1308년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시승(詩僧)이다.〉(제주불교 160108)
《작성 180529》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