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당시 최고 인쇄 판각 기술 행해져..광령2리 묘련사 터
상태바
[향토문화] 당시 최고 인쇄 판각 기술 행해져..광령2리 묘련사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1.15 12: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시대 제주 불교를 새롭게 해석할 근거를 마련한 중요 사찰로 관심을 모르고 있다.

광령2리 묘련사 터

◈위치 : 애월읍 광령리 774-1번지(애월읍 광령평화4길 41) 일대
◈시대 : 고려시대
◈유형 : 불교유적(절터)

광령2리_묘련사터 기와편과 석재
광령2리_묘련사터

 

묘련사(妙蓮寺) 터는 애월읍 광령리에 있다. 남쪽에는 정련수라는 용천수가 있고 주변의 경작지에는 다량의 기와편과 도자기편들이 산포되어 이다.

주변의 민묘(民墓) 산담에는 이 사찰에 따르는 것으로 보이는 석물들이 있고, 비에는 '정련사(靜蓮寺)'라고 표기되어 있다. 현재는 대각사(大覺寺)'라고 표기되어 있다.(※조계종 소속이던 대각사는 현재는 스님이 없는 상태로 보인다.) 절터에서는 수막새, 암막새, 평와, 석제유물, 도자기 등이 발견된다.

서귀포시는 2006년 4월 25일 “현재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재조대장경판(再雕大藏經板)이 주조된 후 45년이 지난 1296년(충렬왕 22년) 제주 묘련사(妙蓮社)에서 「금광명경문구(金光明經文句)」가 판각됐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사실은 「금광명경문구」 하권 말미의 간기(刊記)에 金光明經文句疏卷下 元貞二年高麗國濟州妙蓮社奉宣重彫 幹善瀑布寺住持禪師 安立(금광명경문구소권하 원정이년고려국제주묘련사봉선중조 간선폭포사주지선사 안립 : … 고려국 제주 묘련사에서 폭포사 주지인 안립선사의 주도하에 판각됐다)는 기록을 통해 확인됐다.

「금광명경문구」는 석가여래가 왕사성에 있는 기사굴산에서 처음 신상보살과의 대화로 시작돼 설법한 경전인 「금광명경」에 대해 천태종 창시자인 중국 수나라 천태 지자대사(538∼597)가 어려운 구절에 대해 풀이한 것을 그의 제자 장안 관정대사(章安大師 灌頂, 561∼632)가 기록한 주석서로 천태종의 오소부(五小部) 중 하나이다.

천태스님은 수(隋)나라의 고승으로서 천태종의 개조이다. 38세에 천태산에 들어가 수선사를 창건하고 법화경을 중심으로 천태종을 만들었으며, 법화현의(法華玄義), 금광명경문구 등 30여종의 많은 논소를 남겼다.(서귀포신문 060425)

「금광명경」은 석가여래가 모든 경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경이라 할 정도로 의미가 큰 경전이기 때문에 「법화경」·「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과 함께 호국삼부경(鎭護國三部經)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변란이나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임금이 고승을 초청해 법회를 열어 이를 통해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궁중에서 주로 법석(法席)이 베풀어질 정도로) 호국경전이다.

고려조에서는 1180년(명종 10년)3월에 불같은 붉은 기운이 나타나자 이를 불력을 빌어 소멸하고자 하여 금광명경 법석을 대안사(大安寺)에 차려 이러한 기운을 소멸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초 「금광명경문구」는 상·중·하권 등 3책으로 발간됐지만 현재 전하는 자료에는 하권만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번에 확인된 묘련사판 「금광명경문구」는 목판본으로 전 3권 중 1책으로서 1296년 판각됐지만 현전하는 간본 소장처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간인 자료에 의한 판본 상태를 살펴보면 권수두(卷首頭)의 1장(張)은 온전하나 24장과 마지막 31장은 많이 마모돼 있음을 알 수 있고 1장인 경우 당초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보각(補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금광명경문구」가 간행된 1296년은 원나라의 지배세력이 막강하던 시기다. 당시 제주지역은 원의 요구에 의해 말을 비롯한 각종 특산물 등이 강제 공출되는 등 많은 피폐가 잇따랐다.

바로 이런 시기에 사찰에서 「금광명경문구」가 판각됐다는 것은 「금광명경」의 의미로 볼 때 당시 스님들이 국가적 어려움을 불력을 통해 소멸하고자 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제주는 난대림 지역으로 「팔만대장경」의 판목으로 사용된 ‘후박나무’를 비롯한 녹나무·담팔수나무 등 목판 판각에 적합한 나무들이 풍부했다.

그러나 목판을 판각해 간행할 정도의 기술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사세(寺勢)와 위상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당시 묘련사는 제주를 대표하는 사찰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금광명경」이 천태종의 오수부 중 하나인 점을 감안할 때 당시 제주지역에 천태종의 교세가 확장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묘련사는 천태사상과 밀접했거나 천태종의 교세 확장에 있어 중심 역할을 했던 사찰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처럼 「금광명경문구」 목판본이 고려시대 제주에서 판각됐다는 사실은 그동안 막연히 제시됐던 제주지역에서의 불교 위상 제고는 물론 고려시대 사찰과 스님들의 역할 등을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제주불교 060427, 서귀포신문 060425)

이번 확인된 「금광명경문구(金光明經文句)」는 서지학을 연구하고 있는 윤봉택씨가 최근 1934년까지 「금광명경문구」 권하 1책이 보존됐던 송광사 성보박물관과 1938년 이 책을 사진으로 인화 편집했던 「순천송광사장고려판천순판불전」의 자료 사실을 확인하면서 밝혀졌다.

이에 따라 이 「금광명경문구」는 제주도에서 주조된 목판본 중 가장 시대가 앞선 것(最古本)이며 현재까지 확인된 것 중 고려시대 제주에서 발간된 유일본(唯一本)이 된다.(제주불교 060427)

순천송광사장고려판천순판불전(順天松廣寺藏高麗板天順板佛典)이라는 기록에 따라 최근 제주 묘련사에서 불경 판각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밝혀지면서 고려시대 제주 불교를 새롭게 해석할 근거를 마련한 중요 사찰로 관심을 모르고 있다.

위 기록은 1296년에 작성되었으며, 오랜 제작 기간을 고려한다면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시간상 수십 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또한 송광사 경판 제작을 지원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제주 불교가 육지의 사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묘련사 경판 제작을 폭포사의 안립선사가 주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묘련사 이외에도 크고 작은 규모의 경판 제작이 제주도 각지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인쇄술이었던 판각 기술이 묘련사에서 행해졌다는 사실은 원의 지배기 이전에 이미 제주 불교가 상당한 세력과 수준 높은 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佛宇條)에는 〈묘련사 : 재주서이십오리(在州西二十五里)〉라고 되어 있고 이원진의 『탐라지』 제주목 불우조에는 〈묘련사 : 在西南二十里〉라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의 기록은 방향이나 거리가 다르다. 또한 『증보탐라지(增補耽羅志)』에는 애월읍 곽지리 서쪽이라고 표기하고 있어 위치상으로 좀 다른 감이 있다.

이와 같이 위치상의 불분명함으로 인해 발굴 조사에 어려움이 있었다. 때문에 1987년부터 1990년까지 발굴 조사는 계속되었지만 확증할 자료가 없었다. 다만 수막새, 암막새, 평와, 석제 유물, 도자기 등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대각사에 보관되어 있는 평와 중에서 동원차처관이원촌(同願此處官李員村), 만호이萬戶李)라는 글귀가 새겨진 명문 기와가 발견되었고, 또 1991년 제주목 관아 발굴 조사에서 같은 명문 기와가 출토되면서, 현재 대각사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 묘련사 터였음을 뒷받침해 주었다. 같은 글자가 1987년 제주시 외도동 수정사 절터에서도 확인된 일이 있다.

《탐라지》에는 “종루는 영의 대문루인데, 누 위에는 종을 매달고 아침저녁으로 이를 쳐서 성문을 열고 닫았다. 본래 묘련사에서 만든 옛 종이다.”라고 하여 폐사된 묘련사의 종을 종루에 걸어서 인정(통금)과 파루(해제)를 알리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묘련사는 관련된 유물이나 문헌으로 그 시기를 추정하면, 고려시대 중기 경에 창건되어 조선시대 1600년 경에 폐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38 「제주목 불우조(佛宇條)」에는 혜일 스님이 묘련사와 서천암에서 지은 시가 전해오고 있다.


주(州) 서쪽 25리 묘련사(妙蓮寺) 시


南荒天氣喜頻陰(남황천기희빈음: 남쪽 하늘은 황량하여 자주 흐려지던데)
此夕新晴洗客心(차석신청세객심: 이 저녁엔 맑게 개어 나그네 마음을 씻어주네)
一夢人生榮與悴(일몽인생영여췌: 꿈같은 인생은 피었다가도 곧 시들고 말지만)
中秋月色古猶今(중추월색고유금: 한가위 달빛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逈臨渺渺烟汀闊(형임묘묘연정활: 멀리 아득하기만 한 이곳에 다다르니 안개 낀 물가 참으로 넓고)
斜影沉沉竹屋深(사영침침죽옥심: 비스듬히 기운 그림자에 잠긴 대 집은 어둡기만 하구나)
賞到夜闊淸入思(상도야활청입사: 밤이 깊도록 노니니 생각은 더욱 맑아져)
不禁頭側動微吟(불금두측동미음: 머리 기울일 때마다 가만가만 시가 흐르는 걸 막을 수가 없도다)

《작성 18062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