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참혹한 인권유린 똑똑히 기억..월정리 마을성담1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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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참혹한 인권유린 똑똑히 기억..월정리 마을성담1구역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1.18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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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단원,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온갖 악행을 저질러 가장 악명이 높았다.

월정리 마을성담1구역

위치 : 구좌읍 월정리 274번지와 265-1번지의 경계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방어유적(성담)

월정리_마을성담

 

4·3 당시 구좌중앙국민학교는 무장대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던 9연대의 주둔지였다가 1948년 12월 29일에는 9연대가 철수하고 2연대가 중대 단위로 지역 곳곳에 파견되면서 2연대 관할이 되었다. 2연대 2대대 11중대는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였다.

무장대와 중산간 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작전을 바꾼 이승만 정권이 서울에서 서청단원을 모집해 그 해 12일간의 단기 교육을 마치고 제주에 급파한 군인들이었다. 이들이 성산포(성산동초등학교)와 구좌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온갖 악행을 저질러 가장 악명이 높았다.

당시 제주지역 실정을 전혀 모르는 특별중대에 의해 구좌지역 주민들의 희생이 속출되었던 것이다. 학교에는 진보적인 교사들이 많았는데 특히 평대 출신인 김홍만 선생은 학교에서 군인들에게 매맞아 죽었으며 김지한 선생과 강영희 선생은 현재 마을포구인 ᄆᆞᆯ물개에 끌려가 총살되었다.

1949년 1월 8일 11중대 토벌대는 인근 한동리 주민 조대연(37세), 김봉선(36세), 송봉언(39), 임창손(22세) 등을 구좌중앙국교로 끌고 와 밤새 고문을 가하여 다음 날 학교 앞 비석거리에서 총살시키기도 했다.

일본 도쿄에 거주하는 고춘선(2007년 77세) 할머니는 4·3 당시 5·10 단선 때 입산도피했다가 토벌대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군인에게 시집가라는 아버지의 청을 물리치고 일본 밀항을 감행하여 살아날 수 있었다.

“군인들은 학교에 주둔하자마자 사람 묻으려고 학교 옆 밭에 구덩이를 팠어요, 그 선생님들 이름은 기억에 없으나, 마을 바닷가에 끌고 가 그 생사람을 대창으로 쏘니까 사람이 탁탁 튀죠. 그러다가 군인들은 총으로 쏘아 죽여 버리고. 우리 집에 살았던 선생님은 탁 쏘니까 그 창을 팍 심더구만, 어떻게 힘이 있었는지 그 창대가 부러졌어. 그렇지만 어떻게 해 그 불쌍한 선생님들.”

4·3 당시 구좌면 월정리의 상황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토벌대에게 읍소와 상납으로 인명피해를 줄인 대표적인 마을이기도 하다. 1948년 11월 18일 벌어졌던 월정리 주민에 대한 함덕리에서의 학살사건은 마을 설촌 이래 최대의 주민 희생으로 남아 있다.

이 날의 일은 1948년 11월 중순쯤 토벌대가 마을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모아 16명을 추려내어 김녕지서로 끌고 간 다음 함덕 주둔군에 넘겨진 후 백사장에서 학살된 사건이다.

토벌대는 산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씌워 월정리 주민들을 학살했는데, 이 날 희생된 사람들은 안두현(33), 우경식(29), 한덕종(27), 강태홍(24), 안중석(20), 곽찬오(17), 곽명원 등 16명이다. 함덕리에서의 주민 몰살 사건이 일어난 이후, 월정리의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도피 입산하게 된다.

1948년 11월 19일에는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하여 구장인 박창하의 아내인 윤원길(34)과 어린 딸 박매화(3)를 살해하고 집에 돌아와 있던 농업학교 학생인 강창익(21)을 죽창으로 살해하고 돌아갔다.

경찰들은 입산피신 중이었던 윤보옥을 마을회관 앞으로 잡아와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하기도 했다.

1948년 11월 중순, 월정리 주민들은 북촌 사건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 다행히 희생은 없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다음은 고봉수(2007년 87세) 할아버지의 말씀.

“모든 주민들을 학교운동장에 모아놓고 남녀노소로 분리한 후, 복면을 한 사람이 나와 주민들을 지목하기 시작했주. 운동장에는 수류탄과 총이 준비돼 있어서 죽일려고 한 거주. 조금 있으니까 지프차를 타고 온 한 중위가 '백성없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만류한 거주.”

당시 11중대 소속 서북청년단들은 주민들을 모아 놓고 뺨 때리기를 시키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할아버지와 손자간에도 강요할 정도로 반인륜적인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했다. 주민들이 돈을 갖다주거나 소를 끌고가야 그 짓을 중단했던 것이다.

월정리의 4·3 피해가 주변마을보다 비교적 적은 이유는 주민과 토벌대간의 상납을 통한 교섭이 잘 이루어졌던 것이 큰 이유로 작용했다. 월정리는 서청특별중대의 반인륜적인 탄압과 함덕에서의 집단학살을 겪으며 4·3으로 인해 40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월정리는 4·3 당시에는 340여세대가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지금은 250여호로 줄어들었다. 마을 주민들은 11중대가 구좌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시작된 인근마을 주민들에 대한 참혹한 인권유린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고봉수(2007년 87세) 할아버지는 4·3 당시 민보단 활동을 하며 월정학교에 주둔했던 11중대의 악행을 거의 보았다. 그 자신도 오늘 내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나날을 보내며 4·3 기간을 보냈다.

“11중대의 본부는 함덕대대였주. 1948년 12월 말, 중앙국민학교에 50명 가량 군인들이 주둔했는데 우리 월정 말고도 주변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사람들 하영 죽였주. 군인들의 먹을 물을 조합별로 여자들이 허벅에 길어 나르는 등, 그 겨울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주.”

“당시 강영희(태흥 출신) 선생은 향사 앞에 있는 민보단 사무실에 와서 '곧 군인들에게 잡혀 죽을 것 같다' 라는 말을 했는데 3일 후에 죽더라.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향사에 있는 우리들에게 책임자를 물으며 모이라고 해서 모이니까 물몰개로 끌고 갔주. 거기에는 강영희, 김지한(하도 출신) 선생이 있었어. 군인들은 '저들이 폭도니까, 대창으로 찔러 죽일 사람은 손들라' 라고 하자 모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명령을 거부하면 곧 죽음이니까. 그 착한 선생들을 우리 손으로 죽여야 하는 심정을 헤아려 주시오.”그들은 결국 군인들에 의해 총살되었다.(한라일보 071016)

“당시 저는 18세에 결혼하고 분가해서 살았습니다. 당시에는 위험한 일이 많아서 젊은 사람들은 마을을 피해 있었습니다. 그렇게 숨어 사는 사람들 20명을 마을에서 설득하여 17명을 데려왔습니다.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갔습니다.

곧 풀려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동복-북촌 사이에서 군인들이 습격당한 사건이 벌어지자 월정리 사람 17명을 1렬로 세워서 총살시켜 버렸습니다. 2∼3일 후에 연고자들이 가서 시신을 찾아왔고 연고자 없는 사람은 마을에서 무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귀순하는 게 불안하다고 계속 숨어 있던 사람들은 살아 남았습니다.

구좌중앙국민학교에 있는 11중대는 이북 사람들인데 군인들을 위안한다고 노래도 좀 부르는 여자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마을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니까 군인들이 와서 총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리고 바로 쏘아 죽일 듯했습니다.

민보단에서는 술, 돼지고기, 소라 등으로 군인들을 달랬습니다. 처녀들도 위안한다고 해서 노래도 불러 주었는데 군인들이 그 여자를 소개시켜 달라고 하는데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험악한 시절이었습니다.”(2010년『월정리』79세 곽◎◎ 증언)

2003년말에 발간된 『제주4·3유적』에는 월정리 마을성담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마을 주민의 안내로 남아 있는 성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성 18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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