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조합장·반장 사건'과 '곱은재우영 학살' 등..행원리 곱은재우영(학살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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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조합장·반장 사건'과 '곱은재우영 학살' 등..행원리 곱은재우영(학살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1.22 1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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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원리는 굵직한 집단학살을 겪으며 4·3으로 인해 1백2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행원리 곱은재우영(학살 터)

위치 ; 행원리 1394-5번지.
시대 : 대한민국(1948년)
유형 : 학살 터

행원리_곱은재우영
행원리_곱은재우영(행원리지)

 

곱은재우영은 밭 모양이 기역자로 굽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합장·반장학살사건이 벌어진 이후, 행원리의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도피 입산하였다.

1948년 12월13일 월정리 구좌중앙교에 주둔하고 있던 서청 특별중대가 들이닥쳐 주민들을 속칭 '곱은재우영'에서 학살했다.

이날의 학살사건은 '연대봉' 아래쪽으로 성을 쌓아 보초를 서던 중 추위를 막기 위해 불을 지핀 것이 봉화 신호를 했다는 이유로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다가 그 전날 무장대들이 삐라를 뿌림으로써 토벌대를 자극한 게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이 날 희생된 행원리 주민들은 강태일(41), 고사만(38), 강태옥(26), 강윤봉(24), 김태현(22), 김춘길(21), 김춘봉(21), 안기문(21), 이신호(21), 강태경(20), 김용택(20), 강태빈(19), 임호배(19) 등 20여명에 이른다.

1949년 1월18일에도 토벌대는 '행원리는 빨갱이 소굴'이라며 이응문(31세), 윤태경(28세), 임선익(21세), 고득보(17세) 등을 '곱은재우영'에서 학살했다.

이 사건 이후 주민들은 소와 닭을 잡아 상납해야 했고, 여성들이 수난을 당했으며, 그들의 취사실에 물까지 길어다 바쳐야 삶이 보장되었다.

곱은재우영의 기역자 모양의 밭은 그대로이나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행원리 마을 회관에서 북서쪽 2백미터 지점에 창고와 민가 한 곳이 떨어져 있는데 민가 뒤쪽에 위치해 있다.

행원리 주민들은 이외에도 쉬영물, 오름생이 등지에서 피신해 있다가 토벌대에 의해 죽어갔다. 행원리는 '조합장·반장 사건'과 '곱은재우영 학살사건' 등 굵직한 집단학살을 겪으며 4·3으로 인해 1백2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행원리 1573번지(우회도로변)에는 마을 단위로 건립한 4·3 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져 있는데 여기에는 조합장반장학살사건 및 곱은재우영학살사건의 희생자를 비롯한 희생자 93위가 모셔져 있다.
《작성 18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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