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33)-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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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33)-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神道碑)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4.01.24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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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의 제주 목사 재임 3개월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6.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의 유적지

(1)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神道碑)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남계리 산 69-3에 위치한 규암 송인수 선생의 묘소를 처음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길가에 서 있는 표지석에 보면 묘소 입구를 안내하는 화살표의 방향대로라면 분명히 길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서 올라 가게끔 되어 있다.

<그림 (17)> 은진송씨 문충공 규암 인수 선생 묘소 안내 표지석

 

그렇게 표시된 대로 따라서 산등성이를 오르고 올라 약 30여 분 동안 찾아 헤맸는데, 아무리 찾아도 규암의 묘소는 나타나지 않고 엉뚱하게도 다른 무덤들만 드러나 보였다. 마침 그때가 겨울로 들어서는 초입 시기라 주위를 둘러보니 멧돼지의 배설물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혹시나 예상치 못한 불상사와 맞닥뜨리는 건 아닌지 하는 불안한 생각에 한편 겁도 덜컥 나기도 했다. 길을 잘못 찾아든 것이란 생각이 들어 인근 마을의 주민에게 찾아가 물었더니 당초 우리가 찾았던 길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난 길 바로 옆으로 가라고 했다. 울창한 송림 속 고즈넉한 언덕배기에 묘소는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받침석에 ‘入口’라고 쓴 글자 오른편에 놓여 있는 화살표는 그 위치가 왼편에 있어야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셈이 되기에 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된 ‘청주(淸州) 송인수(宋麟壽) 묘소(墓所) 및 신도비(神道碑)’ 안내판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조선 중종 때 명신 송인수(1499~1547)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묘소 입구에 세운 것이다. 송인수의 자는 미수(眉叟), 호는 규암(圭庵),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 을사사화로 삭탈관직 당하고 낙향하여 후학에 전념하던 중 1547년 정미사화에 사약을 받았다.

1568년(선조 원년)에 신원(伸冤)되고, 복작(復爵)되었으며, 1661년(현종2)에 이조판서 및 대제학을 추증(追贈)받고,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받았다. 신도비는 1578년(선조11)에 세워졌으며, 선생의 종제(從弟)인 송기수가 지었고 뒷면에는 종증손(從曾孫)인 송시열이 1669년에 지은 신도비 음기(陰記)가 있다.

전체적으로 조선중기 신도비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건립당시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고, 묘소도 조선시대 묘제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림 (18)>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묘소 전경(前景)

 

묘소 앞쪽에서 바라볼 때, 왼쪽이 규암 선생의 묘이고 오른쪽은 선생의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의 묘이다.

뒤쪽의 묘는 선생의 아들인 장사랑(將仕郎) 송응경(宋應慶)의 묘로서 부인 함안이씨(咸安李氏)와 합장된 채 조성되었다.

<그림 (19) >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묘소 후경(後景)

 

<그림 (20)>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신도비(神道碑)

 

규암의 신도비는 묘소의 왼쪽 문인석 옆에 우람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 비문의 찬자(撰者)는 선생의 종제(從弟)인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송기수(宋麒壽)이고, 서자(書者)는 봉헌대부(奉憲大夫) 위성군(威成君) 송인(宋寅)이며, 전서체(篆書體)의 글씨로 ‘吏曹參判宋公神道碑銘(이조참판송공신도비명)’이라고 쓴 이는 중훈대부(中訓大夫)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지제교(知製敎) 겸(兼)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이제신(李濟臣)임을 읽어낼 수 있다.

신도비의 판석 재질이 대리석이어서 그런지 세월의 흐름에 씻겨 육안(肉眼)으로 보기에 비문이 그리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 비해 비문 상단에 조각된 쌍룡(雙龍)의 꿈틀거림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을 자아내게 하고, 연화 무늬의 받침석은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 비문 뒤쪽 면에는 선생의 종증손(從曾孫) 되는 우암(尤庵) 송시열이 쓴 ‘신도비음기(神道碑陰記)’가 새겨져 있다. 신도비 형태로서 이런 요인들이 잘 갖추어진 것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수많은 조선 사대부들의 모범적 사례로 꼽힐 만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림 (21)>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의 묘소를 찾아가 배례하는 필자

 

이 신도비 비문 내용 중 마지막 부분에 보면 선생의 가족관계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특히 참조할 만하다.

“ … 공(公)은 휘(諱) 인수(麟壽)이고 자가 미수(眉叟)이며 규암(圭庵)은 그의 호이다. (돌아가신) 그해 11월[辛卯]에 문의현(文義縣)의 치소(治所) 서쪽 저자산(楮子山)에 있는 부인의 무덤 오른쪽에 장사를 치렀다.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상주목사 권박(權搏)의 따님이며 국재(菊齋) 문정공(文正公) 권부(權溥)의 후손이다.

어질어 범절(凡節)이 있었으니, 지아비를 섬김에 어김이 없었고 자녀를 가르침에 법도가 있었으며, 집안을 다스림에 엄격하였고 아랫사람을 거느림에 자애로왔다. 공보다 앞서 돌아가셨다. 아들은 응경(應慶)으로 부사 이진녀(李震女)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딸은 사인(士人) 권이(權頤)에게 시집갔으니 충민공(忠敏公) 권건(權健)의 증손이다. 응경이 딸은 있으나 아들이 없어서 공의 형의 손자인 승조(承祚)로 뒤를 이었다.”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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