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청소년·소녀들 계몽, 독립 사상 고취..대흘1리 김순탁 지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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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청소년·소녀들 계몽, 독립 사상 고취..대흘1리 김순탁 지사 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3.0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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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차례에 걸쳐 조천·신촌·신흥·함덕 등 4개 마을에서 항일운동이 거세게 전개될 때 앞장 섰다.

대흘1리 김순탁 지사 묘 

위치 ; 조천읍 대흘리 1804-1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묘

김순탁
대흘1리_김순탁지사묘

 

김순탁(金淳鐸, 1895~1938)은 호는 양천(襄泉), 본관은 김해, 조천리 2840번지에서 진사(進士) 김우종(金寓鍾)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부친을 잃어 모친과 친형 순용(淳容)이 맡아 키웠다.

조천읍 조천의 신명사숙에서 학업을 마쳐 1916년 3월 25일 항일동지 박두규(朴斗圭)와 함께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신명사숙(新明私塾, 숙장 김태호)의 교사로 부임하여 같은 교직자인 안세훈, 박두규와 함께 민족정기를 고양시켰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전국 경향 각지에서 독립을 절규하는 함성이 퍼지자 조천에서도 독립 만세 운동을 하기로 결의, 3월 21∼24일 네 차례에 걸쳐 조천·신촌·신흥·함덕 등 4개 마을에서 항일운동이 거세게 전개될 때 앞장섰다.

이 때 일경에 체포되어 동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칙령 제7호(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하지 않아 미결기간 옥고를 치렀다.

제주도에서는 1920년대 후반부터 청년운동이 자생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여 1928년 8월 21일 제주청년동맹(약칭: 靑盟) 조천지부가 54명으로 조직되고 그는 집행위원장에 피선되었다.

제주청맹 가운데 가장 활발하다고 인정받아 위원장을 비롯해 김시추, 김서호, 윤창석, 김지환 등은 1929년 후반부터 노동야학(勞動夜學)을 실시하였다.

이 노동야학은 진학하지 못한 많은 청소년·소녀들을 계몽시키고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다. 조천지부의 활동은 제주청년동맹 각 지부 가운데 가장 두드러졌다.

조천지부에서는 청맹원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 소년운동의 지도, 여성 계몽 운동, 각 반(班)별 조직 확대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신좌(新左)소비조합을 중심으로 소비조합 운동을 전개하고, 지속적으로 신좌(新左)문고를 운영하여 사상 선도에 나섰고, 야학도 계속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천지부 청맹원들이 가장 주력하였던 사업은 신좌 문고의 운영과 노동야학의 개설을 통한 민족주의 사상의 보급과 계몽 활동이었다.

이러한 조천지부의 활동 과정에서 지부원 다수가 경찰의 검거를 당하기도 하였다.

1930년 2월 14일 경찰은 신좌문고(新左文庫)를 비롯해 다수의 집을 수색, 김순탁, 김유환, 김시추, 김서호, 윤창석 등의 맹원(盟員)을 검거, 동년 3월 26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는 잡화상을 운영하고 또 신좌소비조합 상무이사이며 동아일보 제주지국 기자인 김순탁과 제주청년동맹 조천지부 위원 대표 김시추에게 각각 징역 8월을, 또 청맹원 김서호, 김지환, 윤창석 등에게 각각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4년을 선고하였다. 이 가운데 김순탁과 김시추는 항소, 대구복심법원에서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다.

1929년 조천리 향회의 결의로 음력 정월 보름을 기하여 금주를 실행하기로 대대적인 민풍운동을 전개, 이로 인하여 동년 8월에 향장·부향장(副鄕長)과 금주 실행위원 30여 명이 조천경찰관주재소에 구인되어 취조를 받았다.

이 때 향장 김희주(金熙胄: 76)는 무죄, 부향장 김우방(黃祐邦: 61), 조천 1구장 한순택(韓順澤: 54), 2구장 김정천(金正天), 금주실행의원 김순탁(金淳鐸: 35), 김희룡(金羲龍: 56), 김사홍(金仕弘: 41), 한원병(韓遠炳: 38) 등은 각각 벌금 20원씩을, 윤성종(尹性鍾: 41), 김시추(金時秋: 28), 김유환(28) 등은 검사의 항소로 대구복심법원 형사부에 회부되었으나 무죄 선고를 받았다.

1938년 3월 12일 병사하니 동년 10월 벗 안요검(安堯儉: 일명 世勳)이 비문을 짓고 우인(友人)과 문하생들이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군은 김해, 김순탁이오. 3세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형 순용(淳容)씨가 그를 길렀다.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회고컨대 당시 봉건적 구문화의 파괴와 시대적 신문화의 건설운동이 있었다.

군은 분명히 역사적 발전에 사명을 다하여 혹은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교육자로서의 활동을 하고 혹은 가두에 출전(出戰)하여 신문화 건설자로서 분투하니 그 길고 긴 도정(道程)은 기구한 험난의 극치였으나 단지 한 길로 파괴와 건설을 위한 희생적 역사는 무한한 과거에서 영구한 장래에 전할 유산이다.

오호! 군은 그 생을 마치니 나이 44세라. 5남 3녀를 남겼다. 벗과 문인(門人) 들은 기구한 그 일생을 추모키 위하여 단갈(短碣)을 세울 즈음에 나에게 행장(行狀)을 요구하니 소지(素志)대로 쓰지 못하고 오직 군은 시대적 희생자며, 군의 불행은 사회의 불행임을 병탄(病歎)할 뿐이다. 오호통재(嗚呼痛哉)!” 1938년 10월 우인(友人) 안요검 지(誌)

결국 이 비석은 일제 당국에 의해서 항일적인 요소가 있다고 문제시되어 글을 지은 안요검이 후일 소비조합사건에 연루시켜 투옥되는 결과를 가져왔다.(위키백과) 이 비석은 항일기념관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정갈하게 가꾸어진 가족묘지의 중앙에 모셔져 있는데 묘 앞에는 비석이 2개와 동자석이 세워져 있다.

1994년에 세워진 비석

〈抗日鬪士源泉金公淳鐸之墓 女史金氏次淑祔左〉에는 ‘∼. 어려서 漢文을 배울 때 매우 聰明하였고 濟州農校를 졸업 서울에 遊學하다. 公은 强而柔하고 柔而强한 心性의 所有者로 社交와 友宜에 圓滿하고 正義와 公事에 强勇하며 家庭에 孝道하고 社會에 充實한 것이 그를 證한다. 回顧컨대 當時 日帝末期는 二次大戰 勃發 直前. 時代의 흐름에 敏感한 公은 25세 젊은 血氣는 분연히 3월 21일 萬歲運動에 參加 獨立을 왜처 倭警에 체포되어 投獄되기도 하였으며, 末年 小學校에서 敎鞭을 들어 敎育者로 排日思想을 注入시키고 혹은 街頭에서 反日運動隊列에 參加하기도 한 公은 崎嶇險難의 極이였으니 破壞와 建設 위한 犧牲的 歷史는 無限한 過去에서 解放의 기쁨도 누려 보지 못한 채 西紀1938년 3월 12일 그 生涯를 마쳤으니 슬픔이 그지없도다. 解放되어 50여년간 잠든 歷史에서 名譽가 回復되고 獨立鬪士로 濟州報勳廳에 先烈記錄에 登載되다. ∼’라고 써 있다.

2010년에 세워진 비석은 〈愛國志士金淳鐸志士夫人金次淑祔左之墓〉이며 ‘∼. 公은 매우 聰明하고 遊學時에도 正義와 公事에 透徹한 人格所有者로서 그 時代 社會에 充實함을 知人에 認定받던 분이시다. 1919년 3월 朝天三一獨立萬歲運動에 參與하여 日警에 逮捕되어 懲役 6월에 執行猶豫 3년을 받은 바 있으며, 1928년 濟州靑年同盟支部 新左消費組合 간부로 활동하며 夜學을 통하여 民族敎育을 실시하며 활동하다 1930년 2월에 逮捕되어 4月餘 獄苦를 치렀다. 이에 그 功勳을 기리어 1997년 8월 15일 大統領表彰을 追敍하였다. ∼’라는 내용으로 새겨져 있다.
《작성 19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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