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전도민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 작성..상대리 김여석 지사 묘
상태바
[향토문화] 전도민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 작성..상대리 김여석 지사 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3.04 10: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미격문의거로 옥고를 겪은 후 1920년대초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하다가 귀국

상대리 김여석 지사 묘

위치 : 한림읍 상대리 2179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묘

상대리_김여석묘


1910년 일본에 의해 경술국치를 당하자, 백성들의 울분은 항일운동으로 번져, 1919년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런 속에서도 특히 도내 유림의 지도자와 한말 관료들이 소위 한ㆍ일합방(韓日合邦)이란 명목으로 동년 10월에 조선총독부에서 주는 막대한 은사금(恩賜金)과 기로금(耆老金) 등을 받거나 횡령하여 입을 다물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 임금이 주는 은사금은 당시 최고 1인당 50원으로부터 15원까지 본도의 유생 81명과 효자ㆍ절부(節婦)들에게 뿌려졌다.

이에 젊은 서당 훈장들의 분노는 하늘에 솟구쳤고 이러한 적성(敵性)국가의 뇌물을 받는 노회(老獪)한 유림들을 믿을 수 없고 이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데 기의(起義)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때마침 제주도에서는 무오법정사항일운동으로 애국지사들이 잡혀가 있는 상황이고, 1919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제주도 안에서도 조천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또 기독교를 중심으로 조선독립희생회의 목사(牧師)와 일부 신도들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軍資金) 모금 운동이 진행되어 성과를 내었다.

이와 같은 운동에 영향을 받은 舊右面 楮旨里의 서당 훈장 박세현(39:전남 장흥)과 樂泉里의 훈장 김여석(27)ㆍ조무빈(33), 新左面 新村里의 훈장 신계선(45) 등은 의기가 투합되어 주도적으로 시위 운동을 계획하였다.

전도민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거사전(擧事前)에 소를 잡아 항일의거의 고사(告祀)라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을 거행한 다음, 다중이 볼 수 있는 장소에 벽보를 붙이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19년 10월 5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는 이른바 정사법(政事法) 위반으로 박세현과 김여석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무빈과 신계선은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2년 6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김여석(1891~1961) 선생은 한경면 낙천리 1927번지(낙천리 복지회관 마당)에서 김대일(金大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일본식 성명은 가네모도(金本汝錫)이다.

기미격문의거로 옥고를 겪은 후 1920년대초에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하다가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 3ㆍ1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한국역대인물정보시스템, 제주인물대사전,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미디어제주 050222, 한라일보 180814, 제민일보 181118)

낙천리 복지회관 마당에 기념비가 있다. 묘에는 국가보훈처장과 북제주군수 명의로 2006년 5월 10일에 세워진 비석과 동자석이 있다.
《작성 190129》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