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 연주현씨(延州玄氏) 족보(族譜) 변천사(變遷史)-(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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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 연주현씨(延州玄氏) 족보(族譜) 변천사(變遷史)-(1)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4.03.04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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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역주 ‧ 엮음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에 대해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이후 다시 '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를 주제로 새로운 연재를 계속한다. 이 원고는 지난 2024년 02월 12일(월요일), 하니관광호텔 연회장에서 열린 연주현씨제주도친족회 신년하례회에서 행한 특강 자료이다. 각 친족회의 족보 편찬이나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돼 특강내용을 전문 게재한다.(편집자주)

 

사진) 평안북도 영변군 약산동대에 남아 있는 철옹성(영변읍성). 본성의 남문과 문루 전경. 문루 아래층에 만노문(萬弩門), 위층에 고연주성문(古延州城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미디어한국학 제공) 

 

 

연주현씨(延州玄氏) 족보(族譜) 변천사(變遷史)

현행복(玄行福) 역주 ‧ 엮음

 

1. 새로 발굴한 제주 연주현씨 족보 관련 서문 2편

(1) 기우만(奇宇萬)의 <연주현씨족보서(延州玄氏族譜序)>

 

【원문(原文)】

* 출전;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송사집(松沙集)》

 

【판독(判讀)】

延州玄氏族譜序

玄氏延州譜凡三修 而陶菴 屛溪 性潭諸賢 後先相役 備陳其會源歸本之意 尊祖敬宗之道 而梅山洪文敬公之文最後出 大筆揄揚 斤斤以左海顯族稱 歷敍將軍公之誠激義旅 忠感狡虜 尙書公之昆季削平猾賊 功著旂常 其他或謝簪遯世 扶植名敎 或淵源正學 講服道義 皆爲延州氏百世帲幪 而此序全譜也 其一枝之入耽羅 爲二十世 蓋牧使公嘗宰是州 其三子因家焉 其入海微意 未易窺測 而槩不過乎擊磬襄之遺意耳 公生簪紱名家 一朝翩然高蹈 與世相忘 爵祿不入于心 百世之下 猶想像其高尙之志 而古人遺子孫安 亦默寓於其中 不食之報 子姓寔繁 今數千家 衣冠文行 往往有可稱述 孝烈爲家風 文藝作世業 寔至今無替 而見今尊周爲時義 帝秦爲深恥 而所蹈卽海 豈入海之祖 先見今日景色而然爾耶 諸子孫相與謀曰 竊見古家世族 多遺失先系者 皆在於兵火流散之餘 懲前毖後 譜不容緩 而廣收同貫 勢有所不通 情有所不行 宜若古人譜近之爲 而牧使公三胤之後 追念入海當日事 當百世如一家 不可分也 譜將竣 秀士圭弼 圭鎔 仁學 聯轡渡海 問序於宇萬 善哉是役也 念祖者所以垂後 所垂於後者 講明祖德 吾知海上玄氏之興未艾也 方今文敎頹廢 讀書種子 頗聞在海上 古所謂海外鄒魯者 可見於今日 願以是奉勖焉

 

【해석(解釋)】

<연주현씨족보 서문>

연주현씨(延州玄氏)의 족보(族譜)는 모두 세 차례나 개수(改修)하였는데, 도암(陶菴; *李縡) ‧ 병계(屛溪; *尹鳳九) ‧ 성담(性潭; *宋煥箕) 등 여러 현인(賢人)들이 앞뒤로 일을 맡아서 그 근원으로 모이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뜻을 자세히 진술(陳述)하였다.

특히 ‘조상을 높이고, 종자(宗子)를 공경한다’는 뜻의 ‘존조경종(尊祖敬宗)’이란 말은 매산(梅山) 홍문경공(洪文敬公; *洪直弼)의 글로서 맨 뒤로 나왔다. 썩 잘 쓴 문장 솜씨로 연주현씨를 선양(宣揚)하길, 근근이 동쪽 바다의 명망(名望) 높은 세족(世族)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두루 서술하길, 장군공(將軍公; *諱 覃胤) 께서 의병의 군사들을 참으로 분기시켜 그 충성스러움이 교활한 오랑캐들을 감복시켰다고 했는가 하면, 상서공(尙書公; *諱 德秀)과 아우형제들은 교활한 적의 무리들을 평정하여 그 공적이 기상(旂常)에까지 드러났다고 했다.

그 밖에 혹 벼슬을 사양하고 은둔생활을 한 이라든지, 명교(名敎)를 숭상하여 부식(扶植)함에 앞장선 사람, 연원 깊은 바른 학문을 추구한 사람, 도의(道義)를 익히고 마음에 깊이 새긴 사람 등을 소개했다. 모두 연주현씨(延州玄氏) 일백 세대의 가림막과 덮개가 되어준 인물들로서 이게 온전한 족보의 서문(序文) 내용이다.

그 가운데 한 지파가 탐라(耽羅)였던 제주(濟州)로 들어와서 이제 연주현씨(延州玄氏) 20세손이 되었다. 대개 목사공(牧使公; *諱 思敬)이 이 고을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때, 이로 인해 세 아드님(*諱 壽仁 ‧ 富仁 ‧ 貴仁)도 함께 살게 되었다.

그 바다 섬으로 들어간 숨은 뜻을 쉽게 규찰(窺察)하여 추측할 수는 없지만, 이는 대개 노(魯)나라가 쇠미해지자 경쇠 치던 양(襄)이 바다 섬으로 들어가야 했던 남겨진 뜻에 불과할 따름으로 여겨진다.

공은 대대로 벼슬하던 명망(名望)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하루아침에 뒤틀린 모습으로 높은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세상사는 서로 잊은 채 관작과 봉록도 외면했던 마음이란 일백 세대나 지난 뒤에서야 그 고상한 뜻을 상상해볼 수 있으리라.

옛사람(*龐德公)이 자손에게 편안함을 물려주었다는 고사 또한 암묵 중에 마음에 담고, 조상의 음덕(蔭德)으로 자손이 잘되는 보응(報應)에 힘입어 자손이 실로 불어나서 이제 수천 가구가 되었다.

더욱이 사대부(士大夫)로서의 의관(衣冠)을 갖춤이나, 문명(文名)을 날리는 여러 행동들이 왕왕 거론되며 칭찬의 말로 이어지기도 한다.

효자(孝子)와 열녀(烈女)로 태어남은 집안의 유풍(遺風)이 되었으며 문화와 예술을 사랑함은 대대로 이어지는 가업(家業)으로 작용한다. 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바뀜이 없으니, 이제 주(周)나라의 문물을 존대함이 시대적 의의가 되었음을 보게 된다.

진(秦)나라가 황제(皇帝)로 칭함을 깊이 부끄러워했던 사람(*魯仲連)이 밟는다고 말한 게 곧 바다였는데, 어찌 바다로 들어간 선조가 오늘날 산수의 아름다운 모양들을 미리 예견해서 그랬을 리야 있겠는가.

여러 자손이 서로 함께 모의(謀議)하며 이렇게 말했다.

“가만히 보건대 여러 세대에 걸쳐 세도를 누린 집안에서조차 선대(先代)의 계보(系譜)를 많이 빠뜨리게 된 원인이 전쟁으로 인한 화마(火魔)의 손길이 뻗쳐 흩어져버린 끝에 나타난 결과이니 지난날의 실패를 교훈 삼아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족보의 편찬을 늦출 수가 없는 일입니다.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본관이 같아지도록 함에는 형세(形勢)가 통하지 않고, 정리(情理)가 행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의당 고인(古人)이 가까운 사람으로 족보를 만들었던 것처럼 해야 하는데, 목사공(牧使公) 세 아들의 후손들은 바다에 들어갈 당시의 일을 떠올려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일백 세대는 응당 한 집안으로 여겨 지파를 나누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족보가 곧 완성될 무렵이 되자, 수사(秀士)인 규필(圭弼) ‧ 규용(圭鎔) ‧ 인학(仁學) 등 세 사람이 나란히 말을 타고 바다를 건넜다. 나 우만(宇萬)에게 찾아와서 서문(序文)을 써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좋소이다, 이 일을 내게 맡기심이!” 조상을 생각함이란 후손에게 드리워지는 법이니, 그 후손에게 드리워짐이란 조상의 덕을 해설하여 명백하게 밝힘일지라. 바다 고을에서 현씨 집안의 부흥(復興)이 끊기지 않을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바야흐로 오늘날의 문치(文治)로 교화함이 쇠퇴하고 황폐해졌지만,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자못 바다 가운데 섬인 제주에 많다고 알려져 있다. 옛사람들이 말하던 이른바 바다 밖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고을로 불리던 곳을 오늘날 볼 수 있게 됨이라.

바라건대, 이로써 힘써 받들기를 권면(勸勉)하노라!

(2) 고경준(高景晙)의 <연주현씨세계서(延州玄氏世系序)>

 

【원문(原文)】

 

* 출전 고경준(高景晙, 1839~1897), 《영운집(靈雲集)》

 

【판독(判讀)】

延州玄氏世系序

宗出乎祖 派分乎源 㴑流而尋源 收族而尊祖 則此譜之所爲作也 由是定世系辨昭穆 而厚風俗勸忠義 其管攝人心裨益世敎 豈淺尠哉 玄氏望延州 高麗大將軍覃胤之後 將軍與二子 俱載盟府 軒裳圭組 累葉燀爀 乃若入海之事在革除際 或曰 官於濟因家 而文獻靡稽不敢直接先緖而起元焉 地遠土瘠 以農桑爲業 不事馳騖於榮途 故文行多稱於鄕黨 而祿位未顯於朝廷 歷二十世五百年于玆 而子姓蕃衍 殆遍一郡 豈非上世潛德毓慶 而流福於無窮也耶 商休命汝愳 其先代實蹟 後來本派支愈久而愈遠 遂至於忽忘而散泆也 乃定宗會繕修舊譜 歷月而訖 使族人仁瑢來徵序焉 余於玄則爲甥耳 謹述其大畧如此 嗚呼父之子爲己之兄弟 由父以上溯而至于始祖 俱爲父之父 自祖以下分 而至己及其他子孫 同是子之子 然則凡在同祖 共譜之內 莫非骨肉之親 而念先祖止慈之仁 推兄弟孔懷之恩 於以興孝弟廣親睦 而美風俗立忠義 則熾昌光大延州之門 其必自今始 而幸各勉旃

【해석(解釋)】

《연주현씨세계延州玄氏世系)》 <서(序)>

종족은 시조에서부터 나오고, 지파(支派)는 원류에서 나뉜다.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서 친족을 수합(收合)하고 선조를 높이려는 것이 이런 족보를 만들려는 까닭이다. 이렇기에 대대로의 계통(系統)이 정해지고, 소(昭)와 목(穆)이 판별되게 되면서 풍속을 북돋아 충의를 권장하게 된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관할하고 통제하게 됨이 세상을 교화해 나감에 있어 유익한 보탬이 어찌 적다고 할 수야 있겠는가.

현씨(玄氏)는 연주(延州) 땅을 우러러보게 되는데, 고려 대장군 담윤(覃胤)의 후예들이다. 장군과 더불어 두 아들이 (공을 세워) 기상(旂常)이라는 맹부(盟府)에 기록되어 있고, 화려한 관작(官爵)을 수여 받았으며, 여러 대에 걸쳐 그 위풍과 기세가 빛났다.

바다고을에 들어온 일에 대해선, 혁제(革除)의 시절인 때, 관리로 제주에 왔다가 눌러앉아 일가를 이뤘다고 혹자는 말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문헌 기록이 없기에 감히 처음 일어난 기원으로 삼는다고 직접 말할 수는 없다.

땅이 궁벽하고 토질이 척박하여 농사일과 양잠업을 하면서도 바삐 돌아다니면서 영달(榮達)에 이르도록 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문명(文名)을 떨침이 향당(鄕黨)에는 많았다 하더라도 조정으로 진출해 벼슬한 이는 적었다.

이십 세대 오백 년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손들이 번창해서 한 고을에 두루 퍼져 살게 되었으니 이게 어찌 조상의 숨은 음덕이 쌓여 낳은 경사가 아니겠는가. 복을 불러들임이 무궁할 것이리라.

천지신명(天地神明)의 뜻을 헤아려 보건대, 그대가 두려워한 건 선대의 실적(實蹟)이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본파(本派)의 갈림이 오래면 오랠수록 더욱 멀어져가기 마련이라서, 끝내는 홀연히 잊어버리거나 산실(散失)되어 버리고 만다.

마침내 종회(宗會)에서 옛날 족보를 수선(修繕)하기로 결정했고, 몇 달이 걸린 뒤 일을 마치고 족인(族人)인 인용(仁瑢)을 시켜 내게 찾아오도록 해 서문(序文)을 부탁하게 했다.

나도 현씨(玄氏)의 외손이 된다. 삼가 아래와 같이 그 대략(大略)을 기술해 둔다. 아! 아버지의 아들이 자기의 형제가 되고, 아버지로 말미암아 그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시조(始祖)에 이른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갖추어지면 절로 조상이 되고, 아래로 나뉘어져 나에게 이르는데, 더욱이 기타 자손도 똑같이 아들의 아들이다. 그러기에 무릇 같은 조상을 모시고 있게 되면 같은 족보 내에 있게 되는데, 육친(肉親)이 아닐 수 없다.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은, 선조께서 베푸신 자식에 대한 자극한 사랑을 생각할 때, 형제간에 그리워하는 마음을 늘 되새기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이나 어른을 공경하면서 친목을 다져나가는 일이다.

풍속(風俗)을 아름답게 가꾸고, 충의(忠義)를 세우는 일은 연주현씨 가문을 흥성(興盛)하게 만들고 빛나게 하는 일이다. 기필코 이제부터 시작하여 제각기 힘써 노력하면 다행이겠다.

 

‘주제 강연을 펼치는 필자’(사진제공 : 연주현씨제주도친족회)

 

※ 【윗글의 요지(要旨)】

(1) 위의 기우만 족보 서문은, 《연주현씨족보(延州玄氏族譜)》 제3수보인 <갑진보(甲辰譜)>(헌종 10년, 1844)가 나온 이후에 쓰인 서문의 글임을 알 수 있다.

(2) 제삼자의 글에서 연주현씨 제주 입도조인 목사공(牧使公)과 세 아들의 존재를 문헌 기록을 통해 언급하고 있음은 중요한 징험(徵驗)이 아닐 수 없다.

(3) 기우만에게 서문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간 현씨 종친 세 사람인 현규필(玄圭弼) ‧ 현규용(玄圭鎔) ‧ 현인학(玄仁學)과 고경준에게 서문을 부탁한 현인용(玄仁瑢) 등은 모두 목사공의 후손임을 《연주현씨 족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4) 실제로 제주 목사공 후손의 족보가 연주현씨 중앙종친회(연주현씨대종회)에서 발간한 족보에 처음 편입된 시기는, 제6수보인 <정유보(丁酉譜)>(1957) 때로 추정된다. 그 ‘서문’에서 언급하길, “비로소 오늘에 이르러 목사공파(牧使公派)와 도령낭장공파(都令郎將公派)를 함께 실어 그 완성을 극복하게 되었다.”란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제주 친족들의 족보가 이때 공식적으로 전국 단위의 단일 족보에 편성되었던 것으로 본다.

(5) 제주 목사공(牧使公) 휘(諱) 사경(思敬)이 제주도에 입도한 시기를 두고서 고경준의 서문에 보면, ‘혁제제(革除際)’라고 표기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15세기 초인 조선조 태종(太宗) 연간(1401~1418)으로 추정된다.

 

-각주해설

1)奇宇萬(기우만) :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은 본관이 행주(幸州)이고, 자는 회일(會一)이며 호는 송사(松沙)로서 전라남도 장성 출신이다. 참봉 벼슬을 하였으므로 기참봉(奇參奉)으로도 불렸는데, 호남에서 이름 높았던 참판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서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개항기 을미사변 후 호남창의 총수로서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남긴 저서로 《송사집(松沙集)》이 있다.

2)備陳(비진) : 자세히 진술(陳述). 빠짐없이 진열함.

3)梅山洪文敬公(매산홍문경공) :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을 두고 이름이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 문장에 뛰어났고 육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다.

4)大筆揄揚(대필유양) : 썩 잘 쓴 문장 솜씨로 선양(宣揚)함.

5)斤斤(근근) : 자세히 살핌. 삼감. 근신함.

6)左海(좌해) : 동쪽 바다. 중국의 입장에서 본 시각으로 조선을 두고 ‘동국(東國)’이라 함과 통한다.

7)將軍公(장군공) : 연주현씨(延州玄氏)의 시조(始祖)인 현담윤(玄覃胤)을 두고 이름이다. 북송(北宋) 때 여진족이 침입하자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는데, 이때 현담윤을 원병(援兵)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 출정시켜 대공(大功)을 세웠기에 ‘장군공(將軍公)’이란 호칭이 생겨났다. 달리 시랑공(侍郎公)이라고도 한다.

8)尙書公(상서공) : 연주현씨(延州玄氏) 시조(始祖) 현담윤(玄覃胤) 공의 장자(長子)인 현덕수(玄德秀)를 두고 이름이다. 그의 최종 관직이 병부상서(兵部尙書)였기에 그렇게 불리는데, 달리 성산공(星山公)이라고도 한다.

9)旂常(기상) : 왕후(王侯)를 상징하는 기(旗). 왕조에 공덕(功德)이 있는 신하를 여기에 기록한다고 알려져 있다.

10)扶植(부식) : 인재(人才)나 세력 따위를 육성하고 확립함.

11)名敎(명교) : 바른 명분을 중시하는 예교(禮敎).

12)帲幪(병몽) : 장막. 둘러치는 것은 ‘帲(병)’이라 하고, 위를 가리는 것은 ‘幪(몽)’이라고 함. 인신하여, 덮어 가림.

13)牧使公(목사공) : 제주(濟州) 입도조(入島祖)인 행(行) 제주목사(濟州牧使) 현사경(玄思敬)을 두고 이름이다.

14)其三子(기삼자) : 세 아드님. 곧 현수인(玄壽仁) ‧ 현부인(玄富仁) ‧ 현귀인(玄貴仁)을 두고 이름이다. 이들이 각각 거로파(巨老派) ‧ 신산파(神山派) ‧ 양의막파(羊衣幕派)의 파조(派祖)로 불린다.

15)擊磬襄(격경양) : 경(磬)쇠를 치던 양(襄). 노(魯)나라가 쇠미해져 예악(禮樂)이 무너지자, 예관(禮官)과 악관(樂官)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다른 곳으로 떠나갔는데, 그중에 “소사(少師) 양(陽)과 격경(擊磬) 양(襄)은 바닷속 섬으로 들어갔다.〔少師陽擊磬襄入於海〕”라는 말이 《논어》 〈미자(微子)〉에 나온다. 소사(少師)는 악관(樂官)의 보좌관이고, 격경(擊磬)은 경쇠를 치는 악인(樂人)이며, 양(陽)과 양(襄)은 각각 그들의 이름이다.

16)簪紱(잠불) : 관에 꽂는 비녀와 갓끈. 관리의 예복으로, 현귀함 또는 벼슬아치의 비유.

17)古人(고인) … 其中(기중) : 옛사람이 자손에게 편안함을 물려줌 또한 가슴에 담다. 이는 달리 ‘방덕공이안(龐德公以安)’이란 고사와 관련이 깊다. 곧 형주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가 방덕(龐德)의 처자가 앞에서 김매는 것을 가리키며 방덕공에게 물었다. “선생께서 괴로이 밭고랑에서 고생하면서 관직‧녹봉을 기꺼이 받지 않으니, 후세에 무엇으로 자손에게 물려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방덕공(龎德公)이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위태로운 것을 물려주지만 지금 다만 편안함으로 물려줍니다. 비록 물려주는 것이 같지 않지만 물려주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들은 유표(劉表)는 감탄하면서 떠나갔다고 한다. 참조 《후한서(後漢書)》(卷83) 〈방공전(龎公傳〉.

18)不食之報(불식지보) : 조상의 음덕(蔭德)으로 자손이 잘 되는 보응(報應). 이의 용례(用例)로 북송(北宋) 때의 학자 소식(蘇軾)의 <삼괴당명(三槐堂銘)>에 보인다. 곧, “나라가 흥하려면 반드시 대대로 덕을 쌓은 신하가 있어 후하게 베풀고 그 보답을 누리지 않은 자가 있은 뒤에라야 그 자손들이 재능이 있고 법을 지키는 태평성세의 군주와 천하의 복록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이다.[國之將興 必有世德之臣 厚施而不食其報 然後其子孫 能與守文太平之主 共天下之福]”라고 했다.

19)衣冠(의관) : 사대부(士大夫). 벼슬아치.

20)帝秦(제진) : 진(秦)나라를 황제(皇帝)로 칭함. 이는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인 노중련(노중련(魯仲連)과 그 관련성이 깊다. 곧 그가 조(趙)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칭한다면 나는 동해를 밟고 빠져 죽겠다.” 하니,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50리 뒤로 물렸다고 한다. 《사기(史記)》(卷83) <노중련열전(魯仲連列傳)>편 참조.

21)景色(경색) : 경치. 풍경.

22)竊見(절견) : 가만히 보건대, ….

23)古家世族(고가세족) : 여러 세대(世代)에 걸쳐 세도(勢道)를 누린 큰 집안.

24)懲前毖後(징전비후) : 지난날의 실패를 교훈 삼아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조심함. 참고로 조선 중기의 문신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戰況)을 기록한 책이 바로 《징비록(懲毖錄)》이다. 여기에서 ‘懲(징)’이란 글자는 본래 징벌하다의 뜻이 있지만, 여기에선 교훈 삼다의 뜻으로 쓰였다.

25)秀士(수사) : 학식이 빼어난 선비.

26)圭弼(규필) : 현규필(玄圭弼, 1863~1945). 족보에 보면, 자(字)는 공열(公說)이고 호(號)는 금계(錦溪)인데 연주현씨(延州玄氏) 27세손으로 제주 목사공파이다.

27)圭鎔(규용) : 현규용(玄圭鎔, 1865~1932). 족보에 보면, 자(字)는 군석(君錫)이고 연주현씨(延州玄氏) 27세손으로 제주 목사공파이다.

28)仁學(인학) : 현인학(玄仁學, 1872~1938). 족보에 보면, 자(字)가 달부(達夫)이고, 호(號)가 광헌(廣軒)인데, 연주현씨(延州玄氏) 26세손으로 제주 목사공파이다.

29)講明(강명) : 해설하여 명백하게 함.

30)艾(애) : 엉거시(지느러미엉겅퀴)과의 다년초 풀인 쑥. 그런데 ‘艾’라는 글자는 그 독음이 ‘애’와 ‘예’ 두 형태가 있다. 여기서는 ‘예’로 읽혀 베이다, 혹은 끊기다의 뜻으로 쓰였다.

31)文敎(문교) : 예악과 법도로써 민속(民俗)을 교화함. 곧, 문치(文治)로 교화함.

32)頹廢(퇴폐) : 기울어지고 황폐해짐. 쇠퇴하여 해이해짐.

33)鄒魯(추로) : 추(鄒)나라와 노(魯)나라. 여기서 ‘鄒(추)’는 맹자(孟子)의 고향인 데서, ‘魯(노)는 공자(孔子)의 고향인 데서, 문화와 예의가 흥성한 지방. 또는 공자와 맹자를 이름.

34)奉勖(봉욱) : 힘써 받들기를 권면(勸勉)하다.

35)高景晙(고경준) : 고경준(高景晙, 1839~1897)은 고종(高宗) 때의 문신으로 제주판관(濟州判官)을 역임했다. 자는 진경(晉卿)이고, 호는 영운(靈雲)으로 방조인 고득종(高得宗)의 후손이다. 6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15세 때에 광평마을 연주현씨 집안에 장가들어 이후 줄곧 처가에 살며 오현단 귤림서원에 나가 글공부를 하였다. 한편 그의 묘갈명의 문장은 호남의 의병장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지었다. 방선문에 가면 암벽에 ‘판관(判官) 고경준(高景晙)’이란 글씨로 음각되어 있다.

36)㴑流(소류) : 물을 거슬러 올라감. 여기서 ‘㴑(소)’는 ‘溯(소)’ 또는 ‘泝(소)’와 동자(同字)임.

37)昭穆(소목) : 종묘나 사당에서 신주를 모시는 차례. 시조를 중앙에 두고, 2세 ‧ 4세 ‧ 6세를 왼쪽에 두는 데 이를 소(昭)라 하고, 3세 ‧ 5세 ‧ 7세를 시조의 오른쪽에 두는데 이를 목(穆)이라고 한다.

38)管攝(관섭) : 관할(管轄)하고 통제(統制)함.

39)裨益(비익) : 보충하고 더함.

40)淺尠(천선) : 얕고 적음. 보잘것 없음. 여기서 ‘尠(선)’은 ‘鮮(선)’과 통용되는 글자이다.

41)盟府(맹부) : 맹약(盟約)의 문서를 관장(管掌)하는 관부(官府).

42)軒裳圭組(헌상규조) : 헌상(軒裳)은 신분이 고귀한 사람이 지니는 수레와 의복을 뜻하고, 규조(圭組)는 벼슬아치가 지니는 옥규(玉圭)와 인수(印綬)를 가리킨다. 전하여 모두 관작(官爵)을 비유한다.

43)累葉(누엽) : 여러 대(代). 누대(累代).

44)燀爀(천혁) : 위풍(威風)과 기세(氣勢) 등이 빛남.

45)乃若(내약) : 이에 ~와 같다면. 또는 ~에 이르러서는.

46)革除際(혁제제) : ‘혁제(革除)의 시기’란 뜻이다. 여기서 ‘革除(혁제)’란 말의 본뜻은 ‘간악한 자를 제거함’이다. 그런데 이 말이 주요하게 쓰인 용례는 명(明)나라 성조(成祖)가 건문제(建文帝)의 자리를 빼앗고서 조서를 내려 건문제의 연호를 제거하고 다시 홍무(洪武)의 연호를 연장해 썼다. 그런데 신하들이 이를 싫어하여 건문(建文) 연간을 ‘혁제(革除) 연간’이라고 표현했다. 이 글에서는 아마도 ‘조선조 태종(太宗) 때’란 의미로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

47)馳騖(치무) : 바삐 돌아다님.

48)子姓蕃衍(자성번연) : 자손이 번창하여 매우 많음.

49)潛德(잠덕) : 숨겨진 덕.

50)毓慶(육경) : 가문(家門)에 경사(慶事)를 가져올 자손이 태어난 것을 가리키는 말로, 예컨대 왕가(王家)에서 세손(世孫)의 탄생 등을 의미하는 말로 쓰여왔다.

51)商休命(휴명) : 휴명(休命)을 헤아리다. 여기서 ‘休命(휴명)’이란 천자(天子) 혹은 천지신명(天地神明)의 뜻을 이룸의 의미이다.

52)愳(구) : 두려워하다. 여기서 ‘愳(구)’는 ‘懼(구)’의 고자(古字)임.

53)散泆(산일) : 흩어져 없어짐. 산일(散逸).

54)訖(흘) : 마치다. 끝내다.

55)仁瑢(인용) : 현인용(玄仁瑢, 1857~1933). 족보에 보면, 자는 군백(君伯)이고 호는 막헌(漠軒)으로서 연주현씨 26세손으로서 제주목사공파이다.

56)骨肉之親(골육지친) : 부자 ‧ 형제와 같이 서로 피를 나눈 사이. 육친(肉親).

57)止慈(지자) :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대학장구(大學章句)》 3장에 보면,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심원하도다, 우리 문왕이시여. 아, 실로 계속해서 공경하는 덕을 밝히셨나니.’ 하였으니, 문왕께서는,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그치고, 신하가 되어서는 공경에 그치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에 그치고, 아버지가 되어서는 인자함에 그치고, 나라 사람들과 사귈 때는 신에 그치셨다.[詩云“穆穆文王, 於緝煕敬止”. 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爲人子止於孝, 爲人父止於慈, 與國人交止於信.]”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58)孔懷之恩(공회지은) :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함. 공회(孔懷)는 《시경》 〈상체(常棣)〉에 “죽음의 두려움을 형제간에 심히 걱정하며 언덕과 습지에 쌓인 시신을 형제가 찾아 나서느니라.〔死喪之威 兄弟孔懷 原隰裒矣 兄弟求矣〕”라고 한 데서 유래된 용어로 후에 형제간에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형제를 지칭하는 뜻으로 쓰였다.

59)熾昌(치창) : 흥성(興盛)함.

60)勉旃(면전) : 힘씀. 또는 힘쓰도록 함.

 
 

(다음에 계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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