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제주-오사카 연락선 운영..낙천리 조무빈(趙武彬) 지사 생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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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제주-오사카 연락선 운영..낙천리 조무빈(趙武彬) 지사 생가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3.05 07: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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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로서 낙천리의 서당 훈장을 지내며 후학들에게 민족자존과 외세배격을 강조하였다

낙천리 조무빈(趙武彬) 지사 생가 터

위치 ; 한경면 낙천리 1686-1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집 터

낙천리_조무빈생가터


1910년 일본에 의해 경술국치를 당하자, 백성들의 울분은 항일운동으로 번져, 1919년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런 속에서도 특히 도내 유림의 지도자와 한말 관료들이 소위 한ㆍ일합방(韓日合邦)이란 명목으로 동년 10월에 조선총독부에서 주는 막대한 은사금(恩賜金)과 기로금(耆老金) 등을 받거나 횡령하여 입을 다물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 임금이 주는 은사금은 당시 최고 1인당 50원으로부터 15원까지 본도의 유생 81명과 효자ㆍ절부(節婦)들에게 뿌려졌다.

이에 젊은 서당 훈장들의 분노는 하늘에 솟구쳤고 이러한 적성(敵性)국가의 뇌물을 받는 노회(老獪)한 유림들을 믿을 수 없고 이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데 기의(起義)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때마침 제주도에서는 무오법정사항일운동으로 애국지사들이 잡혀가 있는 상황이고, 1919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제주도 안에서도 조천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또 기독교를 중심으로 조선독립희생회의 목사(牧師)와 일부 신도들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軍資金) 모금 운동이 진행되어 성과를 내었다.

이와 같은 운동에 영향을 받은 舊右面 楮旨里의 서당 훈장 박세현(39:전남 장흥)과 樂泉里의 훈장 김여석(27)ㆍ조무빈(33), 新左面 新村里의 훈장 신계선(45) 등은 의기가 투합되어 주도적으로 시위 운동을 계획하였다.

전도민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거사전(擧事前)에 소를 잡아 항일의거의 고사(告祀)라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을 거행한 다음, 다중이 볼 수 있는 장소에 벽보를 붙이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19년 10월 5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는 이른바 정사법(政事法) 위반으로 박세현과 김여석은 징역 3년형을, 또 조무빈과 신계선은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2년 6월을 각각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조무빈(1886∼1952) 지사는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조용하의 아들이다. 제주도 구우면(舊右面) 낙천리(섯새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생가는 지금은 건물이 철거되었으며 이웃 토지와 번지가 병합되었다.

유학자로서 낙천리의 서당 훈장을 지내며 후학들에게 민족자존과 외세배격을 강조하였다. 기미격문의거로 옥고를 겪은 후 1920년대에 부인과 아들 둘을 데리고 渡日하여 살았다. 일본에서는 격문사건의 동지들이 모두 만났다고 한다.

일본 오사카에서 통항조합을 설립해 제주와 오사카를 오가는 연락선을 운영했으며, 1932년에는 이재수의 누이 이순옥씨와 함께 '이재수실기'를 집필해 배포하다 일제에 의해 '부정발간' 혐의로 책 판매가 금지되기도 했다. 1948년 일시귀국했으나 4·3의 혼란을 보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2005년경부터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였으나 출소 후 행적 불분명을 이유로 2회 반려되었다가, 2018년 광복절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1월 17일(순국선열의 날)에 제주항일기념관에 위패가 봉안되었다.(한국역대인물정보시스템, 제주인물대사전,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미디어제주 050222, 한라일보 180814, 제민일보 181118, 從손자 조정배 전교장과 면담 190127) 묘는 조수리 3800번지 가족묘지에 있다.
《작성 19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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