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 연주현씨(延州玄氏) 족보(族譜) 변천사(變遷史)-(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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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 연주현씨(延州玄氏) 족보(族譜) 변천사(變遷史)-(2)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4.03.05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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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역주 ‧ 엮음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에 대해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이후 다시 '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를 주제로 새로운 연재를 계속한다. 이 원고는 지난 2024년 02월 12일(월요일), 하니관광호텔 연회장에서 열린 연주현씨제주도친족회 신년하례회에서 행한 특강 자료이다. 각 친족회의 족보 편찬이나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돼 특강내용을 전문 게재한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2. 연주현씨(延州玄氏) 문헌족징(文獻足徵) - 역대 족보(族譜) 서문의 찬자(撰者) 및 발간 요지

 

초간보(初刊譜) - 《정묘보(丁卯譜)》

• 발간 연대 : 영조(英祖) 23년, 정묘(丁卯, 1747)년 초가을

• 서문 찬자 : 파평(坡平) 윤봉구(尹鳳九, 1683~1767)

• 주요 요지 : 연주현씨 세 개의 지파인 성산(星山) ‧ 창원(昌原) ‧ 순 천(順天)을 ‘연주(延州)’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통합하자는 의견으로 모아지게 됨에 따라 그것에 근거해서 새로운 족보를 만들 것을 천명했다.

<참고> ‘정묘보(丁卯譜) 질문의 조목’

자경(子敬) 현명직(玄命直)의 물음에 도암(陶庵) 이재(李縡) 선생과 구암(久庵) 윤봉구(尹鳳九) 선생의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추가로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선생에게도 재차 질의를 하여 똑같은 대답을 얻어낸다. 결국 “모든 종친이 연주(延州)로 본관을 통일하기로 한다.”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재수보(再修譜) - 《기미보(己未譜)》

• 발간 연대 : 정조(正祖) 23년, 기미(己未, 1799)년 7월 상순

• 서문 찬자 : 덕은(德殷) 송환기(宋煥箕, 1728~1807)

• 주요 요지 : 사람으로서 한 집안의 족보를 분명하게 밝히는 일을 다함이란 종족을 한데 모이도록 하면서 풍속을 도탑게 하는 일이요, 충의를 세워서 조정에 이익이 되게 하는 까닭임을 천명했다.

특히 소식(蘇軾) 집안의 족보와 관련된 설을 인용하면서 족보의 완성을 통한 효제(孝悌)의 마음이 절로 생겨날 것이란 기대와 함께, 문장과 절의가 뛰어난 현씨의 인물 가운데 특히 희암(希庵) 현덕승(玄德升, 1564~1627)과 관봉(冠峯) 현상벽(玄尙璧, 1673~1731)을 그 사례로 거론하면서 더불어 화수회(花樹會) 등의 조직을 통한 친족간 화애와 친목을 다져나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삼수보(三修譜) - 《갑진보(甲辰譜)》

• 발간 연대 : 헌종(憲宗) 10년, 갑진(甲辰, 1844)년

• 서문 찬자 : 당성(唐城) 홍직필(洪直弼, 1776~1852)

• 주요 요지 : 연주현씨 집안은 동쪽 바다에서 명망 있는 세족으로서 고려시대 때부터 조선에 들어와서까지 대대로 그 명성과 인망이 높았다고 했다.

고려조에선 시조인 장군공(將軍公; *諱 覃胤)과 그 아들인 상서공(尙書公; *諱 德秀), 그리고 그 아우들이 교활한 무리들을 평정하여 그 공적이 기상(旂常)에까지 드러났다고 칭송했다.

조선조에 들어와선 판관공(判官公; * 諱 得利)이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전사했고, 희암공(希庵公; *諱 德升)은 벼슬을 사양하고 은둔했으며, 관봉(冠峯; *諱 尙璧)과 불능와(不能窩; *諱 守中)의 연원 깊은 학문은 삼벽당(三碧堂; *諱 若昊)의 절조를 이어받았고, 팔학사(八學士)의 반열에 나란히 들어섰다고 했고, 백암(白庵; *諱 以規) ‧ 이암(彛庵; *諱 鳳謙)공 같은 분들은 관북(關北) 지역에서 문명(文名)을 날렸다고 흠모했다.

현씨 종족이 《주역(周易)》에서 강조한 ‘내복(來復)의 이치’를 잘 깨우쳐 스스로 체험하면서 발전해나가길 기대했다.

 

사수보(四修譜) - 《신축보(辛丑譜)》

• 발간 연대(年代) : 대한제국 광무(光武) 5년, 신축(辛丑, 1901)년

• 서문 찬자(撰者) : 월성(月城) 최익현(崔益鉉, 1833~1906)

• 주요 요지(要旨) : 천안에 거주하는 현익동(玄翼東)이란 사람이 어느 날 정산(定山)에 사는 면암(勉庵) 선생의 자택으로 찾아와서 새로 만든 족보의 서문을 부탁받아 짓게 된 사연을 먼저 밝혔다.

아울러 뭇 선현의 자문을 얻어 큰 도리를 질의하고, 시조를 따라서 본관을 바꾸고 지파를 통합하여 족보를 하나로 합친 사실이 조상을 추모하고 근본을 잊지 않으려는 발로에서 비롯한 일임을 높이 치하하며 종족을 수합하고 풍속을 도탑게 하는 일이라고 크게 강조했다.

벼슬을 사지 않고 집안에 머물게 될 때는 집안을 잘 다스리고, 세상에 쓰임을 받으면 그 소임대로 일을 잘 처리해가면서 선조의 덕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노력함이 후손 된 도리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는 곧 “일이 잘 안 풀려 궁색할 때는 홀로 자기 몸을 닦는 데 힘쓰고, 일이 잘 풀릴 때는 세상에 나가서 좋은 일을 하라[窮卽獨善其身 達卽兼善天下].”라고 한 맹자(孟子)의 말과도 상통한다.

 

오수보(五修譜) - 《갑자보(甲子譜)》

• 발간 연대(年代) : 일제강점기 갑자(甲子, 1924)년 단오절(端午節)

• 서문 찬자(撰者) : 시랑공 25세손 현재승(玄在升, 1862~1925)

• 주요 요지(要旨) : 연주현씨의 시조인 고려문하시랑평장사(高麗門下侍郎平章事) 연산군(延山君) 시호 경헌공(景憲公; *諱 覃胤)과 더불어 아들 병부상서(兵部尙書) 성산군(星山君; *諱 德秀)과 용호장군(龍虎將軍) 광성군(廣城君; *諱 利厚)에 대한 치적을 소개하면서 그 공적이 기상(旂常)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아울러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경사가 자자손손 이어지면서 태평성대를 이루도록 했음이 역사책에 명백하게 남아있다고 강조했다.

그 구체적 사례로 판관공(判官公; *諱 得利)의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순국함, 찬성공(贊成公; *諱 碩圭)의 높은 절조, 희암공(希庵公; *諱 德升)의 세속을 멀리해 은둔함, 죽림공(竹林公; *諱 徵)의 효사(孝思)와 더불어 백암(白庵; *諱 以規) ‧ 이암(彛庵; *諱 鳳謙) 두 분 공의 독서를 통한 학문 정진, 관봉(冠峯; *諱 尙璧) ‧ 심초재(尋初齋; *諱 命直)의 천도와 인사를 관통한 학문 창달 사항을 특별히 거론했다.

족보의 완성은 곧 현씨 종족의 효제(孝悌)의 의리를 시연(示演)함이라고 했다.

 

육수보(六修譜) - 《정유보(丁酉譜)》

• 발간 연대(年代) : 정유(丁酉, 1957)년 섣달

• 서문 찬자(撰者) : 시랑공(侍郎公) 25세손 현응주(玄應周, 1890~?)

• 주요 요지(要旨) : 족보를 편찬해냄에 있어 지난 과거의 역사가 현저하고, 문헌을 통해 명백하게 밝혀지는 이상 옛 규약을 모두 준수함에 조금도 의혹이 없어야 함을 강조했다.

더욱이 6‧25 한국전쟁의 결과로 남북 분단이 고착화(固着化)되면서 북한 쪽 연주현씨 족보의 자료를 얻을 수 없음이 큰 아쉬움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목사공(牧使公)파와 도령낭장공(都令郎將公)파의 자료를 함께 실어 통합된 족보인 대동보의 완성을 보게 되어 오랜 숙원(宿願)사업이 이뤄짐을 경하(慶賀)해 마지않았다.

 

<참고자료>

칠수보(七修譜) - 《임술대동보(壬戌大同譜)》

• 발간 연대(年代) : 임술(壬戌, 1982)년 음력 10월

• 서문 찬자(撰者) : 성균관대학교 총장 현승종(玄勝種)

• 주요 요지(要旨) : 연주현씨 족보의 서문이 육수보(六修譜)까지는 순한문체로 쓰였지만, 칠수보(七修譜) 이후로는 그 체제가 국한문 혼용으로 바뀌었다.

본시 현씨의 본관이 연주(延州) ‧ 성주(星州) ‧ 창원(昌原) ‧ 순천(順天) 등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연주(延州)로 귀일(歸一)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는 이미 서기 1747년의 《정묘보(丁卯譜)》를 편수(編修)할 때에 휘(諱) 명직(命直)께서 제기하여 당대의 거유(巨儒)인 문신(文臣) 이재(李縡) ‧ 구암(久庵) 윤봉구(尹鳳九) ‧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제위(諸位)께 <정묘보문목(丁卯譜問目)>과 같이 문의한 바 있으며, 그 일치된 의견에 따라 연주현씨(延州玄氏)로 통일된 《정묘보(丁卯譜)》를 만들었던 것임을 밝혔다.

따라서 모든 현씨는 본관을 연주(延州)로 환원하는 것이 시조에 대한 도리요 현씨의 중흥 발전을 위하여 바람직한 일임을 강조했다.

※ 이하 팔수보(八修譜) - 《연주현씨대동보(延州玄氏大同譜)》와 구수보(九修譜) - 《연주현씨전자족보(延州玄氏電子族譜)》의 내용 소개는 생략함.

 

참가회원 단체 사진(*사진제공 : 연주현씨제주도친족회)

 

3. 북송(北宋) 소순(蘇洵)의 <족보서(族譜序)>

* 출전 ;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後集)》

【원문(原文】

〈族譜序〉蘇洵(明允)

蘇氏族譜 譜蘇氏之族也 蘇氏出於高陽 而蔓延於天下 唐神堯初 長史味道刺眉州 卒于官 一子留于眉 眉之有蘇氏 自此始而譜不及者 親盡也 親盡則曷爲不及 譜爲親作也 凡子得書而孫不得書者 何也 著代也 自吾之父 以至吾之高祖 仕不仕 娶某氏 享年幾 某日卒 皆書 而它不書者 何也 詳吾之所自出也 自吾之父 以至吾之高祖 皆曰諱某 而它則遂名之 何也 尊吾之所自出也 譜爲蘇氏作 而獨吾之所自出 得詳與尊 何也 譜吾作也 嗚呼 觀吾之譜者 孝悌之心 可以油然而生矣 情見于親 親見于服 服始于衰 而至于緦麻 而至于無服 無服則親盡 親盡則情盡 情盡則喜不慶 憂不弔 喜不慶 憂不弔 則塗人也 吾所與相視如塗人者 其初 兄弟也 兄弟其初 一人之身也 悲夫 一人之身 分而至於塗人 吾譜之所以作也 其意曰 分而至於塗人者 勢也 勢 吾無如之何也 幸其未至於塗人也 使其無致於忽忘焉 可也 嗚呼 觀吾之譜者 孝悌之心 可以油然而生矣

系之以詩 曰 吾父之子 今爲吾兄 吾疾在身 兄呻不寧 數世之後 不知何人 彼死而生 不爲戚欣 兄弟之情 如足如手 其能幾何 彼不相能 彼獨何心

 

【해석(解釋)】

<족보(族譜) 서(序)> - 소순(蘇洵, 1009~1066)

소씨(蘇氏)의 《족보(族譜)》는 소씨 집안의 계보를 적은 것이다. 소씨는 고양씨(高陽氏; 顓頊)에게서 나와 천하로 뻗어 퍼졌다.

당(唐) 고조(高祖) 초 장사(長史) 벼슬을 지낸 소미도(蘇味道)가 미주자사(眉州刺史)로 와있다가 관직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 중 한 아들이 미주에 남아 미주에 소씨가 있게 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족보로서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친족관계가 다하였기 때문이다.

친족관계가 다하면 어찌 족보에 미치지 못하게 되는가? 《족보》는 친족을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릇 자식들에 대해서는 기록하면서 손자에 대하여는 기록하지 않는 것은 무슨 때문인가? 이는 한 세대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나의 아버지로부터 나의 고조(高祖)에 이르기까지는 벼슬을 했는지의 여부, 어느 집안에 장가를 들었는지, 향년(享年)은 얼마인지, 죽은 날짜 등을 모두 기록하면서 다른 분들에 대해서는 이런 것들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나온 계보를 상세히 밝히기 위해서이다.

나의 아버지로부터 나의 고조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휘모(諱某)라고 부르면서 다른 사람이라면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내가 나온 바를 존중해서이다.

족보는 소씨를 위해 만든 것인데 유독 내가 나온 바에 대해서만 상세히 하고 존중함은 어째서인가? 《족보》는 내가 만들기 때문이다.

아! 내가 만든 《족보》를 보는 자는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생기게 될 것이다. 정(情)은 친척에게서 드러나고 친척은 상복에서 드러나며, 상복은 참최(斬衰)에서 시작하여 사마(緦麻)에 이르며,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관계까지 있다.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되면 친족관계가 다 된 것이며, 친족관계가 다하면 정도 다한 것이고, 정이 다했다면 기쁜 일에도 경하하지 않아도 되고, 슬픈 일에도 조문하지 않아도 된다.

기쁜 일에 경하하지 않고, 슬픈 일에 조문하지 않는 관계라면 길 가는 사람이다. 내가 그를 함께 길 가는 사람으로 보게 되는 사람도 그 처음에는 형제였을 것이며, 형제의 처음에는 한 사람의 몸에서 나왔을 것이다.

슬프도다! 한 사람의 몸에서 나뉘어 길 가는 사람에 이르게 되니, 이것이 내가 족보를 짓게 된 까닭이다.

그 뜻은 “분리되어 길 가는 사람에게 이르게 되는 것은 세(勢)이니, 세는 나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다. 다행히 아직 길 가는 사람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로 하여금 소홀히 하거나 잊지 않도록 함이 옳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아! 내가 지은 《족보》를 보는 자는 효제(孝悌)의 마음이 가히 유연(油然)히 생기게 될 것이다.

이에 연관 지어 이렇게 시로 읊노라.

 

吾父之子 내 아버지의 아들이

今爲吾兄 지금 나의 형이 되어

吾疾在身 내 몸에 질병이 생기면

兄呻不寧 형은 신음하여 편안치 못하니라.

數世之後 몇 세대가 지난 뒤에

不知何人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 하리라.

彼死而生 저가 죽고 내가 살아도

不爲戚欣 슬퍼하거나 기뻐하지도 않게 되고 만다.

兄弟之情 형제의 정은

如足如手 마치 발과 같고 손과 같지만

其能幾何 능히 그 얼마나 가겠는가?

彼不相能 서로 능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

彼獨何心 그런 자는 유독 어떤 마음에서인가?

(※ 2024. 02. 12 馬鳴 )

 

○ ‘연주현씨 대종회 창립70주년’ 기념식장에서 ‘연주현씨찬가’를 노래하는 테너 현행복

 

 

연주현씨찬가(延州玄氏讚歌)

Hymn to Hyun’s Family

현행복 작사

현제명 작곡

 

【가사】

평안도 약산동대 연주성에서

포악한 반란 무리 물리친 역사

드높인 무인 정신, 구국의 결단

빛나도다, 그 인물!

연주현씨(延州玄氏)일세

 

2. 검각산 숲 어둠길 현장군 앞에

횃불 든 산도깨비 길 밝힌 전설

거룩한 나라 사랑, 빛나는 업적

꿋꿋하다, 그 기개!

일편단심(一片丹心)일세

 

3. 가믈코 가믈토다 가믈 ‘현(玄)’ 글자

오묘한 하늘 빛깔 현씨 성 되어

대대로 이어오는 명문가 혈통

복되도다, 그 전통!

‘현무둔재(玄無鈍才)’일세

 

【악보】

 

【창작배경】

○ 이 노래 ‘연주현씨찬가’는 연주현씨대종회(대종회장 현경대)가 올해로 창립 7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음. 악보의 원곡은 본래 현제명 선생님이 작곡한 <조선의 노래>이고, 가사는 현행복 님이 개사하여 새로 덧붙여 만듦

○ 이 노랫말의 기본 구성은 우리 가문의 비조이신 고려대장군 휘(諱) 담윤(覃胤)공의 구국정신과 빛난 위업의 전통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음. 아울러 현씨 성을 지닌 모든 이들에게 자긍심을 고취 시키며, 명가의 혈통을 이어나갈 역량의 함양과 친족간 친목을 돈독히 함을 주요 내용으로 함

○ 더욱이 우리의 성씨 ‘현(玄)’이란 글자의 본뜻인 ‘가믈토다’란 의미를 되살림. 이는 바로 <노자도덕경> ‘제1장’에서 “가믈코 가믈토다! 뭇 오묘함이 모두 그 문에서 나온다[玄之又玄 衆妙之門]”라고 함과 <천자문>의 서두에서 “하늘은 가믈코 땅은 누르다[天地玄黃]”라고 새삼 강조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상기시키는 효과를 지님

○ 이 노래 악보상의 조성은 사장조(G Major)이지만, 실제 가창 시에는 바장조(F Major)로 낮춰 노래해도 무방함

○ 박자표가 ‘4/4’로서 행진곡풍에 해당하기에 그 노랫말의 의미를 생각하며 활기가 넘치고 장엄하게 부르기에 적합함

○ 악보상의 기보가 혼성4부(소프라노, 앨토, 테너, 베이스)로 편성된 ‘찬송가’ 형태로 되었기에 합창 악보로도 그 활용이 가능함

○ 이 노래 끝부분 가사 중 ‘현무둔재(玄無鈍才)’는 “현씨는 우둔한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서, 이는 현재 대전의 뿌리공원 내 <연주현씨조형물>에 새겨져 전하는 내용이기도 함(※ 글 ‧ 현행복)(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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