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찾아가고 싶은 100대 정원 선정..해안동 해안과원 터 산물낭(산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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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찾아가고 싶은 100대 정원 선정..해안동 해안과원 터 산물낭(산귤나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3.1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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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과원은 16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9세기 중반에는 54개소에 이르렀다

해안동 해안과원 터 산물낭(산귤나무)

위치 ; 해안동 1065, 1066, 1067, 1068번지(해안마을5길46-59)
시대 : 조선
유형 ; 생산기술유적, 나무

해안동_해안과원터산물낭

 

해안동_해안과원터


제주과원은 16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9세기 중반에는 54개소에 이르렀다. 이원조의 탐라지초본(1842-1843년) 과원조에 나타난 과원 현황을 살펴보면 제주목이 43개, 정의현의 6개, 대정현 5개로 총 54개소이다.

감귤은 제주에서만 나는 귀한 과실로 고려시대, 조선시대 제주의 중요한 진상품이었다. 진상은 공헌과 같은 뜻으로 봉상, 즉 밑에서 위로 진헌하는 것을 말한다.

진상제도는 고려초 이래로 행해졌던 것으로 조선왕조 시대에는 그것을 정비하여 조선조 말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진상의 종류에는 물선진상과 방물진상, 제향진상, 약재진상, 응자진상, 별례진상 등이 있다. 제주도에 부과되었던 것은 물선진상, 방물진상, 제향진상, 약재진상 등이었다.

제주도에서 감귤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지 단정할 수는 없으나 감귤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으로 고려 문종6년(1052)에 '세공귤자를 100포로 정한다'고 하였으니 제주도에서 이미 11세기부터 감귤은 진상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 시대부터 감귤이 재배되어졌다고 생각되며 제주감귤의 재배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본다.

이원진의 《탐라지》(1653)에 果園總說로 〈가정병술년(중종21, 1526)에 목사 李壽童이 進獻하기 위하여 다섯 防護所에 각각 과원을 설치하고 감귤나무를 옮겨심게 하여 그곳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는 것을 겸하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편안하였다.

여지승람에 의하면 새로 증설할 때의 과원은 제주 19곳, 정의 5곳, 대정 6곳이었는데 지금은 제주에 3곳, 정의에 2곳을 더 증설하였다.

그러므로 민가에서 가꾸는 감귤을 침해하고 책임지우는 폐단은 심하다고 할 수 없다. 하물며 지금 따로 監官과 많은 直軍을 差定하여 더욱 더 헐어진 데를 고쳐 쌓고 감귤나무를 재배하면 저절로 민가의 감귤을 침해할 염려가 없게 된다.

만약 稀結之歲(매우 드물게 맺힌 해)를 만나면 돈을 주고 사서 封進之數(봉진해야 할 수량)에 넉넉하게 모으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썼다. 따라서 이 시기에 제주목의 과원은 22개소였다.

해안과원에 대해서는〈海安 在州西南十五里 柚子五十一根 新栽各果二十根 楮百根 漆三十三根 百日紅二根(해안과원은 제주 西南 15리에 있다. 유자 151그루, 새로 심은 각종 과일나무 20그루, 닥나무 100그루, 옻나무 33그루, 백일홍 2그루가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1653년에 기록된 해안과원에서 올린 공물은 유자 151, 등자 33, 옻나무 100, 신재과 20 등으로 인근의 광령과원의 2배에 달했다.

이형상의 《南宦博物》(1703)에도 〈가정병술년(중종21, 1526)에 목사 李壽童이 다섯 防護所에 과원을 설치하고 감귤을 심어 그곳 군사들로 하여금 典守를 겸하게 하였다.

그 뒤 점차로 더 설치하였다〉는 기사와 함께 제주목 29개의 과원 중에 海安果園이 포함되어 있다. 더불어 〈제주의 과원은 무릇 42곳인데 直軍이 880명이다. 밤낮으로 지키니 백성들은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라고 썼다.

산귤(제주어로는 산물)에 대해서는 〈山橘 이것이 陳皮가 된다. 열매가 작은 것은 유자와 비슷하나 맛은 달면서 시다.

11월이 되어서야 익는다. 현재 2,252그루가 있는데 열매는 185,455개이다〉라고 하여 그 숫자까지 관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과원터로 확인되는 원통과원(정의현:유자), 해안과원(제주목:유자), 용동과원(제주목:유자) 등에는 '산물낭'이라고 불리는 진귤나무가 재배된 것으로 보이며, 위 고문서에는 해안과원에 산물낭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위 번지의 해안과원 터에는 아직도 약 300년 된 산물낭(진귤나무) 5그루가 남아 있다.

이 땅에는 1990년 경에 일본에 살고 있는 前주인으로부터 과원을 잘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김학운씨가 매입하여 정원을 꾸몄는데 국립수목원이 정한 찾아가고 싶은 100대 정원에 선정되었다.(耽羅志, 南宦博物, 조선시대 제주과원 설치와 감귤진상에 관한 연구, 海安洞誌)
《작성 19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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