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일본 정부로부터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받아..이도1동 정병조(친일파) 유배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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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일본 정부로부터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받아..이도1동 정병조(친일파) 유배지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3.25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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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거중 운양 김윤식(雲養金允植)을 중심으로 유배인들과 지방문인들이 귤원시회(橘園詩會)활동 전개

이도1동 정병조(친일파) 유배지 터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421-19번지
시대 : 대한제국
유형 ; 유배생활 터

정병조
이도1동_정병조적거터


정병조는 1863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판관 정기우(鄭基雨)의 아들이며, 유명한 유학자 정만조(鄭萬朝)의 아우로서 소론 가문에서 태어났다. 정만조와 마찬가지로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편집국장을 지낸 정인익(鄭寅翼)의 아버지이다.

1882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1894년 동궁시종관이 되었다. 1896년 명성황후 살해사건에 연루(알고도 고변하지 않았다는 죄)되어 종신형을 받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901년 이재수란으로 위도로 이배되어 1907년까지 총11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1907년 특사로 풀려났다. 1908년 궁내부 예장원과 중추원에서 다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908년 궁내부 장례원 전사에 임용되어 중추원 부찬의를 지냈으며, 1908년 기호흥학회 찬무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전별위원을 지냈다. 일제강점 직전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통치가 정당함을 주장하는 국시유세단의 유세위원, 임시의장을 지내는 등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전부터 일본과 가까이 지냈다.

유교 계열의 친일 단체 공자교회에도 가담하여 공자교 규칙제정위원·상의원,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사살되었을 때는 국장 한국조문사절단 종교계 대표로 참가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조중응을 수행하여 2대 통감인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곧이어 조선총독부 취조국 위원, 1913년 중추원 부찬의(8년간 재직), 1921년 중추원 편제 개편 후 참의, 촉탁 등을 지냈다. 중추원 근무 기간은 총 14년 가량이다.

학식이 뛰어난 정병조는 《대전회통》 번역, 1917년부터 2년 동안 조선도서해제 사무담임, 1918년 조선어사전 심사위원, 1920년부터 1925년까지 친일단체 국민협회 총무, 부회장, 고문 등을 지내며 이 단체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했다.

국민협회 간부로서 신일본주의를 선전한 일은 국민들의 공분을 사서, 제주도에 강연을 왔던 정병조에게 협박장이 전달되고 범인이 잡혀 징역형을 선고받는 일도 있었다.

신일본주의는 일본이 대한제국 병합으로 일본만의 일본이 아닌 새로운 일본이 되었다면서, 조선 민족은 일본 제국의 신민임을 강조하며 내선일체를 전파한 논리였다.

이 때 협박장을 보낸 이는 조천 만세운동에 앞장서다 징역형을 받았던 박두규 지사이다. 당시 동아일보(1921-03-07)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脅迫狀에 八個月 불복하고 공소해
작년 십월즁순경에 제주(濟州)셩내에 드러와서 국민협회(國民協會)의 신일본주의를 선젼하든 그 회 총무 정병조(鄭丙朝)씨에게 협박장을 보내인 동디 조텬거주 박두규(朝天 朴斗奎)는 오래동안 예심중에 잇든바 지난 오일에 광주(光州)디방법원디텽에서 징역팔개월의 판결언도를 하얏는데 박두규는 이에 불복하고 다시 공소할터이라더라(광주)〉

1927년에는 충청북도 지역에서 민정 시찰을 하며 군수의 안내를 받은 기록이 있다. 1928년부터 11년 동안 중추원 조사과 촉탁 등을 맡아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한 기반 조사 작업에 꾸준히 종사했다. 1931년 단군신전봉찬회 고문, 1932년 조선유교회 명리원 학정, 1935년 『일월시보』 문학부 고문, 1939년 친일유교단체 조선유도연합회 참여, 1943년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일본 정부로부터 1912년의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의 다이쇼대례기념장이라는 서훈을 받았다. 1945년 6월 10일 사망했다.

정병조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96∼114)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해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경학원 대제학을 역임한 형 정만조와 《매일신보》 편집국장을 지낸 아들 정인익 역시 친일파 708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모두 선정되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길가에 있는 표석에는 〈鄭丙朝적거터 : 한말의 유학자 규원 정병조(鄭丙朝)가 제주에 유배되어 적거했던 터. 1896년(건양1)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된 규원은 처음 교동 이종문가에 잠시 적거한 뒤 이곳 사마재(司馬齋) 터에서 적거했다.

적거중에는 운양 김윤식(雲養金允植)을 중심으로 유배인들과 지방문인들이 어우러 귤원시회(橘園詩會)활동을 전개했다. 1901년(광무5) 천주교난으로 전라도 위도(蝟島)로 이배되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적극적인 친일파였던 사실을 누락하였다.
《작성 190224, 보완 1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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