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신도리 출신 항일투쟁가..신도1리 김일영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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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신도리 출신 항일투쟁가..신도1리 김일영기념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4.02 1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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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개국공신 익화군 휘 인찬의 자 훈련도감 휘 검룡의 17대 손이다.

신도1리 김일영기념비 

당시 주소 ; 대정면 도원리
위치 ; 대정읍 신도리 1727-2번지의 동쪽 대도로변(기념비), 신도리 1342번지(생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기념비

 

김일영묘와원비

 

신도리_김일영기념비

 


김일영(金日榮 1852~1936)은 본관이 경주이며 대정읍 신도리 태생으로 자는 권삼(權三), 호는 제남(濟南)이다. 일생 훈학으로 이름이 알려져 산남 지방의 신도, 의귀, 예촌 등지와 산북의 귀덕, 신창, 조수, 고산 등지에 초빙되어 훈장으로 유명했다.

김일영은 신도 큰훈장 또는 ᄆᆞ르왓훈장, 동생 김일해는 신도 작은훈장 또는 무드내(제주시 용강동)훈장이라고 불렸다. 형제 모두 대정향교 도훈장을 역임했다.

1901년에는 대정 유림이 日本勢·佛國勢에 저항하는 봉기가 있었다. 이는 일본 어선이 대정 해안에서 노략질하는 데 대한 유림의 분노와 맥을 같이 한다. 말년에는 향리에 재래식 서당을 개설하여 강한 민족 주체성과 외세배격을 중심으로 훈학하였다.

신도리에서는 많은 항일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는데 이들은 1927년에 창립한 신도소년단원들이며 2,3년이 지나자 신도청년단으로 바뀌었다. 이 무렵 마을 바닷가 거문여 근처에 일본 화물선이 좌초했을 때 청년단원들이 왜선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한 적이 있었다.

이를 사건화하여 모슬포경찰관주재소의 일본인 순사 오무라(大村)가 마을에 이르러 청년단 간부를 연행하였는데 청년 김승지(金承址)는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청년단 활동도 중지되었다.

신도리 출신 항일투쟁가로는 제주공립농업학교 동맹휴학 사건의 주동자로 독립유공자 서훈(애족장)을 받은 김희봉을 비롯하여, 미서훈 독립운동가로 좌행옥(左行玉, 1907년생)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인청년동맹과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5년형을 복역하였으며, 김익휴(金益休, 1913년생)는 일본공산당 청년동맹의 항일활동으로 2년형을, 부태환(夫泰煥, 1910년생)도 제주농업학교의 학생활동으로 퇴학당하였고 이어 제주청년동맹과 혁우동맹, 해녀항일투쟁의 배후 인물로 2년형을 받았으며, 강규찬(姜圭贊, 1910년생)도 일본 오사카에서 노동운동(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에 앞장서다 투옥된 바 있다. 이들 활동의 연원에는 김일영과 김일해가 있었다.(제주인물대사전)

병환으로 타계하여 3년상이 지난 1938년에 문하생들이 제남김일영선생기념비를 마을 신작로 옆에 세웠다. 그러나 비석 앞면 상단에 음각된 태극 문양에 대하여 일본 경찰이 배일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새긴 것이라 하여 문제삼았다.

비석을 세운 주동 인물들을 심문한 바 있다. 결국은 태극 문양을 제거하고 비를 철거하기로 하여 일단락되었다. 문하생들은 제남김선생일영기념비를 새로 만들어 세웠다.

문제가 되었던 원비가 있는 신도리 1342번지는 후손이 소유하고 있으나 현재는 다른 사람에게 빌려줘 있고, 비석은 건물 서쪽 울담에 기대어 보존되고 있다.

김일영의 묘는 신도리 1383-2번지(옛 학교터=산경도예 북쪽 경작지) 가운데에, 김일해의 묘는 같은 번지의 동쪽 끝 부분에 있다. 기념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濟南 金先生 日榮 紀念碑 제남 김선생 일영 기념비


天生我師(천생아사) : 하늘이 우리 스승님을 내시니
德備厥躬(덕비궐궁) : 덕이 그 몸에 갖춰지셨네.
家素淸儉(가소청검) : 가풍은 본래 청빈하고 검소하시며
學遂專攻(학수전공) : 학문은 전공을 이루셨네


卅載絳帳(삽재강장) : 삼십 년 동안의 붉은 휘장 드리우니
一世牗蒙(일세유몽) : 한평생 아이들을 가르치셨네.
風流文采(풍류문채) : 풍류와 문채가
眞是詞宗(진시사종) : 진실로 사종이라 하겠다.


漢山瀛海(한산영해) ; 한라산과 영해가
瞻仰高風(첨앙고풍) : 고상한 풍격 우러르니
短碣千秋(단갈천추) : 작은 비석 영원히 남아
淚表孤衷(누표고충) : 눈물로 외로운 충정 나타내리라.


昭和十三年四月日 門人一同謹竪 : 1938년 4월 일 문인 일동 삼가 세우다.
(번역 김태국)


絳帳 : 붉은 비단 장막. 가르치는 곳. 스승의 처소. 강유(絳帷). 강사장(絳紗帳). 후한(後漢)의 학자 마융(馬融)이 제자들에게 경전을 가르칠 때 비단 장막을 치고, 앞에서는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강장 뒤에는 음악 하는 여공[여악女樂]들을 두었음. ①붉은 빛깔의 휘장(揮帳)  ②스승의 자리  ③학자(學者)의 서재(書齋)


牗蒙(유몽) : 牖蒙. 어린 아이들을 깨우치다. 어린 아이들을 인도하다.
詞宗 : 시문에 뛰어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

옛 학교터 북쪽 밭에 그의 묘가 있으며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있다.

〈공의 계는 경주니 휘는 일영이고 자는 권삼이며 호는 제남이다. 이조 개국공신 익화군 휘 인찬의 자 훈련도감 휘 검룡의 17대 손이다.

고조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지내시니 휘는 용(墉)이고 증조는 통덕랑 휘 영충(穎忠)이고 조는 통덕랑 휘 종안이고 고는 장사랑 휘 태문이고 어머니는 남평문씨니 공께서는 철종 임자년(1852)에 태어나셨다.

배는 양씨 희공의 딸이나 일찍 돌아가시고 계배는 진주강씨 사무의 딸이니 2남 1녀를 낳으셨다. 장남은 성하이고 차남은 성빈이며 딸은 진명렬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헌직, 훈직, 한직이고 증손은 대철 대륜이다. 공께서는 천성이 순수하고 어질었으며, 마음을 가라앉혀 학문에 뜻을 두고 스스로 대성할 것을 기약하며 고부 이상사(上舍: 생원, 진사) 회익 문하에 나가 성리학을 익히고 연구하였고 또 시경과 예기를 배워 마침내 유림의 영수가 되니 따르는 무리가 문하에 가득하였다.

정축년 9월 2일 돌아가시니 녹남오름 서쪽 ᄆᆞ루왓 갑좌이니 후학들의 추모비가 앞에 있다. 양씨묘는 사계리 ○삼당밭 임좌이고 강씨묘는 산지천 남쪽 묘좌이다. 소화 경진년(1940) 가을 장손 헌식이 삼가 세우다.〉(번역 김태국)
《작성 19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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