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 “한시(漢詩)로 읽는 제주 역사”(6-1)-소총(篠叢) 홍유손(洪裕孫)의 ‘제주 유배시’ 2수(1498)
상태바
[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 “한시(漢詩)로 읽는 제주 역사”(6-1)-소총(篠叢) 홍유손(洪裕孫)의 ‘제주 유배시’ 2수(1498)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4.04.12 07: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엮어 옮김[編譯] ‧ 마명(馬鳴) 현 행 복(玄行福)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최근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에 대해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이후 다시 '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를 주제로 새로운 연재를 계속한다. 한시로 읽는 제주 역사는 고려-조선시대 한시 중 그동안 발표되지 않은 제주관련 한시들을 모아 해석한 내용이다. 특히 각주내용을 따로 수록, 한시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편집자주)

 

“한시(漢詩)로 읽는 제주 역사”<6>

6. 소총(篠叢) 홍유손(洪裕孫)의 ‘제주 유배시’ 2수(1498)

 

(1) <해도술회(海島述懷)>

【원문(原文)】

<그림 (1)> 홍유손(洪裕孫)의 ‘해도술회(海島述懷)’
* 출처 : 홍유손 문집 《소총유고(篠叢遺稿)》 (하편)

 

【판독(判讀)】

海島述懷

謫居島嶼瘴雲㴱 鬢邊還過幾光陰 奇花異卉開幽

思 麗海佳山入細吟 麥飯盛㙧肥肉減 麻衣掩骼雪

霜侵 天明日照竆林草 㪅發新芽雨露心 還一作閑

 

【해석(解釋)】

海島述懷(해도술회) ○ 바다 섬에서 회포를 진술함

 

謫居島嶼瘴雲㴱(적거도서장운심) 귀양 사는 바다 섬이라 장기 가득 머금었고

鬢邊還過幾光陰(빈변환과기광음) 살쩍 밑 흰머리 사이, 세월 얼마나 지났던가.

奇花異卉開幽思(기화이훼개유사) 기이하게 생긴 꽃과 풀, 닫힌 마음 열게 해

麗海佳山入細吟(여해가산입세음) 아름다운 바다와 산, 시구 속에 읊조려 드네.

麥飯盛㙧肥肉減(맥반성류비육감) 꽁보리밥 질그릇 가득, 살진 몸 절로 야위고

麻衣掩骼雪霜侵(마의엄격설상침) 삼베 차림 앙상한 몰골, 눈서리에 살 에는듯.

天明日照竆林草(천명일조궁림초) 날씨 맑아 궁벽한 숲 초목에 햇살 비치고

㪅發新芽雨露心(경발신아우로심) 다시 돋은 새로운 싹, 비이슬 마음 결정체라.

 

還一作閑(환일작한) ‘환(還)’은 달리 ‘閑(한)’으로 지어져 쓰임

※ 운자 : 평성(平聲) ‘侵(침)’운 - 㴱, 陰, 吟, 侵, 心

 

【해설(解說)】

소총(篠叢) 홍유손(洪裕孫)이 제주로 유배의 길을 나선 건 연산군 4년(1498) 9월이었다. 당시 자신과 교류를 나누던 남효온(南孝溫) ‧ 김시습(金時習) 등은 이미 5년 전에 한 해 차로 제각기 사별한 상태였고, 죽림(竹林)을 자처하던 인사들 또한 뿔뿔이 흩어져 유배를 떠난 마당에, 더욱이 자신의 인생 늘그막에 유배형을 당한 심경이야 오죽했을까 하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된다.

그래도 유배지로 선정된 제주도 정의현(㫌義縣)에서의 그의 생활은 그리 각박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의 유고 문집인 《소총유고(篠叢遺稿)》에 보면, 제주에서의 그의 생활상을 담고 있는 몇 편의 시문이 실려 전해지고 있다.

이를테면 제주 목사가 자신을 위해 특별히 사슴고기를 보내준 데 대해 감사히 여기는 마음을 시문에 담아 표현해냈는가 하면, 정의 현감이 자신을 특별히 우대해 모정(茅亭)에서 밤새도록 위로연을 베풀어준 사실을 털어놓은 시문도 있다.

특히 그가 남긴 <정의관사중수기(旌義官舍重修記)>란 글은 바로 당시 정의 현감이었던 김종준(金從俊)의 치적을 치켜세우며, 아울러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데 대한 감사의 답례 성격이 짙게 묻어나는 글이다.

그런 가운데 그의 제주 생활상을 대표할 만한 두 편의 시, 곧 <해도술회(海島述懷)>와 <대풍출성(待風出城)>을 소개하고, 더불어 <제금강산(題金剛山)>이란 시 한 편을 통해 그의 생몰연대를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한다.

맨 먼저 살펴볼 시편은 그의 <해도술회(海島述懷)>란 작품이다.

낯설고 물설은 땅 제주 섬에 막상 당도해 맨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게 해무(海霧)로 뒤덮인 바닷가 고을일 것이다. 언뜻 장기(瘴氣) 같은 독한 기운이 몸에 스멀스멀 스며드는 것 같고, 늘그막에 어느새 귀밑털은 새어 세월의 무상함을 직감할 만하다.

그래도 시인의 눈에 보인 경이로운 제주 땅의 세계는 이상야릇한 풀잎들과 한라산과 마주한 올망졸망한 오름들 사이로 전개되는 풍광과 더불어 부서지는 파도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래도 유배인의 행색이란 삼베옷 하나 덜렁 걸쳐 입고, 뚝배기 사발인 질그릇 하나 가득 꽁보리밥으로 허기를 달래야 하니 살진 몸이 절로 야위어오지 않을 도리가 어디 있기나 할 법이겠는가.

그래도 날씨가 화창하게 갠 날이면 밝은 해가 숲속 깊숙이까지 비쳐서 생기를 북돋워 주고, 또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아나게 함이란 비와 이슬이 마음먹은 대로의 결정체인 까닭에 자연의 마음이란 생각을 절로 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깨닫는 순간 문득 자신이 처한 상황이 지금은 비록 귀양살이를 살아야만 하는 신세라 회재이불우(懷才而不遇)한 처지이긴 하지만, 미래의 어느 순간 저 한줄기의 햇살과도 같은 임금님의 도타운 정이 발동해서 그야말로 자유로운 몸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새로 꾸려나가게 될 것이라는 희망과 미래의 꿈에 대한 믿음 또한 지녔을 법도 하다.

이 작품이 빼어난 건 시문 속에 스민 작자의 감정이입(感情移入) 기법이다. 에둘러 어떤 사실적 정황이 눈에 선하게 다가오게 하면서 자신의 회포를 솔직히 진술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런 걸까. 시문의 운자도 ‘평성(平聲) 침(侵)운’으로 일관하면서 마음[心]속 깊이 절로 침투하게 하는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그림 (2)> 조선 선비의 소박한 밥상
*출처 : 《백년 전의 한국》(가톨릭출판사)

 

(2) <대풍출성(待風出城)>

【원문(原文)】

<그림 (3)> 홍유손(洪裕孫)의 ‘대풍출성(待風出城)’
* 출처 : 홍유손 문집 《소총유고(篠叢遺稿)》 (하편

 

【판독(判讀)】

待風出城

須信他鄕勝故鄕 兩兒苦別轉堪傷 厭看官柳添離

恨 愁聽角聲挽去腸 回首挐山高崒屼 送眸溟海曠

微茫 行行麗譙隔重阜 日帶薄雲照淡裝

 

【해석(解釋)】

待風出城(대풍출성) ○ 바람 기다리다가 성을 떠남

 

須信他鄕勝故鄕(수신타향승고향) 타향이 고향보다 낫다는 말 응당 믿어야 해!

兩兒苦別轉堪傷(양아고별전감상) 두 아이와 쓰라린 이별, 몹시 마음 아프구나.

厭看官柳添離恨(염간관류첨리한) 길가 버들 실컷 봐, 이별의 한 더욱 사무치고

愁聽角聲挽去腸(수청각성만거장) 시각 알림 뿔피리 소리, 매번 애간장 태우네.

回首挐山高崒屼(회수나산고줄올) 고개 돌려 한라산 바라보면 산 높고 험준한데

送眸溟海曠微茫(송모명해광미망) 눈길 따라 창해 응시하니 아득히 넓기만 해.

行行麗譙隔重阜(행행려초격중부) 갈수록 높은 누각, 언덕으로 겹쳐 가로막히고

日帶薄雲照淡裝(일대박운조담장) 엷은 구름 띤 노을, 소박한 내 행장 비추네.

※ 운자 : 평성(平聲) ‘陽(양)’운 - 鄕, 傷, 腸, 茫, 裝

 

【해설(解說)】

이 시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대로라면 작자인 홍유손이 유배에서 풀려 제주를 떠날 때 지어진 것이라고 봄이 옳을 듯하다. 보통 제주 섬에서 뭍으로 나갈 때 겪는 공통 사항이 배를 띄우기 전 사전에 ‘바람의 상황[風勢]’을 점검하는 일이다.

이를 흔히 ‘대풍(待風)’ 혹은 ‘후풍(候風)’이라 하는데, 그래서 순풍이 불기를 기다리며 잠시 머무는 곳을 ‘대풍처(待風處)’ 혹은 ‘후풍처(候風處)’라고 일컫는다.

이 시의 첫 구절 ‘타향이 고향보다 낫다.[他鄕勝故鄕]’는 표현을 쓴 이는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이다. 그는 당시 고향에서 난리통에 고생하는 동생 두영(杜穎)의 소식을 접하고서 이렇게 표현했던 시가 있다.

그런데 둘째 구를 보면 ‘두 아이와의 쓰라린 이별, 몹시 마음 아프구나[兩兒苦別轉堪傷]’라고 서술하고 있어 대단히 충격적이고 놀랍다. 이 말은 결국 자신이 낳은 자식인 두 아이와의 이별을 예시(豫示)함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에 대한 기록을 보면, 작자인 홍유손이 정의현에서 귀양살이를 사는 동안 배수첩(配囚妾)과 서자(庶子)를 두었다는 기록은 없다.

이 시문의 표현대로라면 홍유손은 제주에서 10년 가까이 유배 생활을 하면서 제주 여인(?)과의 사이에 두 아이를 낳았다는 말로 해석된다. 그렇게 보면 첫째 구절의 내용인 “타향이 고향보다 낫다는 말 응당 믿게 된다.”는 표현 또한 실감하게 됨은 물론이다.

한편 이런 심사는 그의 문집에 실린 또 다른 시 <삼가 홍기시서(紅旗侍胥)께 받들어 부침[謹奉寄紅旗侍胥](6수)>에서도 보인다.

그 5수에서 “두 아이를 생각하매 눈물이 샘솟듯 침상을 적시네.[仍憶兩兒淚迸牀]”라고 표현했고, 아울러 6수의 시편에선 “불쌍해라!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니[苦憐兒子號爺哭], 한밤중에도 정신이 놀라 침상에서 떨어진다오.[半夜神驚墮下牀]”라고 표현하고 있을 정도이다.

여기서 작자가 이 시문을 지어 바친 대상자로는 단지 ‘홍기시서(紅旗侍胥)’라고만 지목하고 있어 구체적으로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추정컨대 아마도 중종(中宗) 4년(1509) 이전 시기에 정의 현감을 역임한 이가 아닐까 하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림 (4)> 관류(官柳)의 이별(離別)을 상상한 그림(*작자미상)

 

소총 홍유손이 유배에서 풀린 해가 중종 원년인 1506년이었고, <존자암개구유인문(尊子庵開構侑因文)>을 완성해 발표한 해가 이듬해인 1507년이었는데, 그 글의 표제 원주에 ‘제주에서 지음’을 특별히 부기해놓고 있는 형편이고 보면 그가 이듬해가 되기까지는 제주에 머물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로 그 해에 그가 제주를 떠났다고 가정해 보면, 그 뒤로 “가을꽃 들국화를 두 번 보았다.[兩見秋花野菊香]”라고 시문에서 밝힌 바처럼 결국 그로부터 2년 뒤인 1509년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그가 제주에 남겨둔 아이들 둘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홍유손에겐 두 아들이 있어 지선(至善) ‧ 지성(至誠)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혹시 이들이 과연 그들일까? 여러 궁금증이 절로 생겨나긴 해도 그저 상상의 나래만 펼칠 뿐이다.

 

(다음에 계속)

 

필자소개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

‧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태생

- 어린 시절부터 한학(漢學)과 서예(書藝) 독학(獨學)

외조부에게서 《천자문(千字文)》 ‧ 《명심보감(明心寶鑑)》 등 기초 한문 학습

 

주요 논문 및 저서

(1) 논문 : <공자(孔子)의 음악사상>, <일본에 건너간 탐라의 음악 - 도라악(度羅樂) 연구>, <한국오페라 ‘춘향전(春香傳)’에 관한 연구>, <동굴의 자연음향과 음악적 활용 가치>, <15세기 제주 유배인 홍유손(洪裕孫) 연구>, <제주 오현(五賢)의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 등

(2) 단행본 저술 : 《엔리코 카루소》(1996), 《악(樂) ‧ 관(觀) ‧ 심(深)》(2003), 《방선문(訪仙門)》(2004), 《취병담(翠屛潭)》(2006), 《탐라직방설(耽羅職方說)》(2008), 《우도가(牛島歌)》(2010),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2011), 《귤록(橘錄)》(2016), 《청용만고(聽舂漫稿)》(2018)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