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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발행인편지/담담한 환경이야기
"당 찾아 물 찾아, 가는 곳곳..이런 사연이.."(제주문화유산답사)와산,와흘,대흘 지역을 따라 걸어 본 제주역사들
고현준 기자  |  kohj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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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승인 2017.03.17  15: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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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숨어있는 문화유산 답사를 가는 날은 늘 긴장감과 함께 평화로움이 흐른다.


답사를 앞두고 사전답사팀이 미리 답사현장을  1-2번 다녀온 후 회원들의 안전 등 무사 답사를 고려한 숨은 노력과 배려가 녹아있어 더욱 뜻있는 시간이 된다.


가시덤불 숲이나 나무가 자라 거의 들어가거나 찾지 못할 정도의  답사지는 사전답사팀이 덤불 제거 등 손을 써서 출입에 지장이 없도록 사전작업까지 다해 놓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숨은 배려가 이 제주문화유산답사팀이 지난 십수년을 이어오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제주문화의 새로움에 대한 공부와 함께, 항상 상상 외의 것들에 대해 기대를 갖게 하는 제주문화유산 답사.

   
 

지난 3월12일은 조천읍 와산,와흘, 선흘지역을 답사하는 날..
이 지역 답사코스를 따라 가 보니 물이 있었던 각종 봉천수는 다 말라버려 물이 없었고..
누군가는 물이 마른 그곳에 쓰레기를 버려놓고 있었다.


더욱이 와흘 본향당은 육지부 무당들이 기를 받으러 왔다가 버리고 간 것으로 보이는 쓰레기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이처럼 제주문화유산은 제주도민과 함께 오래도록 이 산하를 지키고 버텨왔지만 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수준이 너무도 낮은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만 하다.

   
 

   
 

제주문화유산답사회(회장 고영철)가 진행하는 답사는 지난 12일(일요일) 눈미(와산) 하늘(대흘) 노늘(와흘) 세 지역 문화재를 찾아 가는 이 지역의 숨어있는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으로 이뤄졌다.

이날 답사는 회원 4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주로 제주도민이 가정의 안녕과 병을 치유하기 위해 찾던 당과 지역민들의 식수난 우마의 물을 먹이는 장소였던 봉천수 물을 중심으로 많이 다녔다.

다음 글은 제주문화유산답사회가 어렵게 수집해 집대성한 자료를 토대로 정리한 글이다.

이 내용에 더해 조금 사족을 달았을 뿐이다.

이날 답사한 와산지역에 대한 설명이 이채롭다.

와산리의 옛 이름은 누온미[臥乎山] 또는 눈미[臥山]였으며 주민들은 눈미 또는 눈메라고 부르는데, 이는 곧 ‘누운 산’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약 450여 년전 송씨가 처음 들어왔으며 그 후 정씨가 이주해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 내생잇동네·당오롬동네·종남밧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해발 고도 400m에서 100m에 이르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는 이 지역은 가운데 당오름[306.4m]이 솟아 있으며 동쪽에는 북쪽으로 버으내 혹은 멍죽내가 흐른다.

   
이날 답사 안내와 해설 맡은 제기대 안건세 선생

이날 해설을 맡은 제기대 안건세 선생은 소령 출신으로 봉개동예비군중대장으로 근무하는 분이다.

늘 답사회를 성실히 이끌어주고 있는 안건세 선생은 이날 가장 먼저 와흘리 선잣(잣담)으로 안내했다.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 산31번지에 있는 이곳은 조선시대 세종11년(1429)년 제주출신 고득종(高得宗)의 건의에 따라 제주도에 목마장이 만들어질 때 잣성이 한라산을 기준으로 가로로 만들어진데 비해 선잣은 세로로 만들어진 곳이라는 사실이 특별했다.

제주도의 잣성은 세종이 상호군 박호문을 제주에 파견하여 목마장의 적부를 조사, 도안무사(都安撫使) 장우량에 명해 한라산 중턱 지역 165리에 돌담을 쌓기 시작했고 세종12년에 10소장의 기초를 확립 한 후에도 이들 소장의 축장(築墻)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성종24년(1491)에 고대필(고득종 아들)이 올린 보고에 따르면 한라산 중턱에 10목장(소장)이 설치됐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漢拏山腰周回 設十牧場)


잣은 고어(古語)로 성(城)의 뜻이며 한라산 기슭의 소장(조선시대 목마장=10소장) 경계에 높이 1.20~1.80m로 길게 쌓은 겹돌담을 말하며 이를 흔히 잣(城), 잣담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선잣은 각소장과 소장 사이에 세로로 쌓은 잣으로 말들이 계곡이나 산림지대로 흩어져 죽거나 찾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 큰 하천을 이용하거나 돌을 쌓아 이를 간장(=간담, 선잣)이라고 했다는 설명이다.


이 2소장과 3소장의 경계인 선잣은 지금의 조천읍 와흘리와 제주시 회천동의 경계와 같다고 한다.

지금도 이 선잣을 중심으로 동쪽은 조천읍 와흘리, 서쪽은 제주시 회천동이다.

   
 


이어 와산리 동원(멸실) 터를 찾았다.


번영로에서 산굼부리로 가는 네갈래길 동남쪽 지금의 길섶나그네 자리에 있던 원(院)은 고려․조선시대에 출장하는 관원을 위해 각 요로(要路)나 인가가 드문 곳에 두었던 국영 숙식시설이었다고 한다.

원은 고려 때부터 두었는데 공양왕3년(1391)에는 그 유지를 위해 대로(大路)․중로․소로의 원으로 구분해서 원위전(院位田)을 지급했고, 사찰에서 사회사업의 하나로 원을 경영하기도 했다고 하는 곳이다.

조선초에 들어서는 폐쇄되거나 관리가 소홀하여 공용여행자에게 불편이 있었기 때문에 세종27년(1445)에는 이를 정비․보완하는 한편 원 주변의 유능한 주민을 골라 원주(院主)로 삼아 그 관리를 맡겼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에는 참(站)마다 참점(站店)이 설치되기도 하여 이것이 후에 주점․주막으로 부른 거릿집으로 발전함에 따라 원은 점차 모습을 감추어 전국 여러 곳에 ‘원’이란 글자가 붙은 지명만 남게 되었다.


보제원, 홍제원, 이태원(이상 서울), 조치원(충남), 장호원(경기도), 동제원(東濟院, 제주시 화북동) 등이 그 예이다.

제주에는 동원, 서원, 의귀원, 하원, 동제원 등 여러 곳에 있었다.

   
 

제주도 동원(東院)옛터는 번영로 주변 꾀꼬리오름 북쪽, 지금의 음식점 길섶나그네 자리에 있었고 조선시대 당시 제주목에서 정의현 가는 길에 쉬어가던 곳이었다고 한다.

〈제주목지도〉에는‘제중원(濟衆院)이라고 표기된 동원은 일명 보문원(普門院)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 원이 설치된 것은 제주목과 정의현의 중간쯤 되는 위치이며 가까운 곳에 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날 여러 번에 걸쳐 보충설명에 나섰던 숲속길님에 따르면 "서귀포에 법화사(하원), 영천관, 서길리에 서원, 화북 동자원, 제주시 동원 등 5개 원이 있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이어 답사한 와산리 엄낭굴철산이도산신당은 와산리 운동장에서 남쪽으로 500m 지점에서 서쪽으로 700m 들어간 곳의 수풀속에 있었다.

억새와 찔레나무 등이 길을 가로막는 곳을 뚫고 길에서 20m 정도 북쪽으로 들어가면 주변보다 3m 정도 도드라진 동산에 북쪽을 향하여 제단이 만들어졌고 제단 아래쪽에 다시 넓은 계단처럼 치성 드리는 곳을 만들었다.

   
 

엄낭굴이란 엄나무가 많이 자라서 붙여진 지명으로 추정되지만 주변에서 엄나무를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철산이도는 신의 명칭이라는 설명이며 도(都)는 제주의 여러 신당에서 존칭의 뜻으로 사용되는 글자이고 마을에서 멀리 목장 쪽으로 떨어진 곳에 , 산신당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목축과 관련된 신을 모시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곳이다.

와산리 베락당은 말조심을 한다는 뜻이 숨어있는 곳이었다.
베락은 벼락의 제주어.

   
 

베락당에 모셔진 신은 베락사제였다.
불돗당을 웃당이라고 하고 베락당은 알당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동북쪽에 있어 불돗당보다는 아래쪽에 있기 때문이다. 당에는 신목은 있으나 울타리를 두르거나 제단을 만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눈미마을 본향이었지만 지금은 주민들이 모두 불돗당에만 다니기 때문에 기능을 잃어 폐당됐다.
그래도 불돗당에서 당굿을 벌이는 음력 3월 13일에는 본향 당신인 베락사제도 함께 모셔 제향을 바친다고 한다.

베락당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옛날에 와산리 검은땅밭에서 송씨할머니가 큰딸과 밭에서 검질(김)을 매고 있었다.

귀가 가려워진 송씨할망은 딸에게 귓밥을 파 달라고 했다. 딸은 나뭇가지를
꺾어 귓밥을 파다가 실수로 귀청을 건드리고 말았다.


화가 난 송씨할망은 딸에게 ‘베락 맞을 년’이라고 욕을 했는데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화덕벼락장군이 그 소리를 듣고 딸에게 벼락을 쳐 버렸다.

자신의 말 때문에 딸이 벼락을 맞아 죽자 송씨할망은 두이레 동안 통곡을 했다. 애끓는 울음소리를들은 옥황상제가 땅을 내려다보니 화덕벼락장군의 실수로 죽은 사람이 보였다.


옥황상제는 화덕벼락 장군에게서 벼락몽둥이와 벼락틀을 빼앗아버렸다. 이 때문에 화덕벼락장군은 하늘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인간세상에 살게 되었는데 화덕벼락장군이 가는 곳마다 불길이 따라 다녀서 사방에 불이 났다. 마을에 계속 불이 나자 마을 사람들은 불칸밭(불탄 밭)이라는 곳에 제단을 마련하여 화덕벼락장군을 모셨다.

   
 

베락당에는 신목으로 큰 폭낭(팽나무)이 있는데 옆으로 길게 뻗은 판근(板根)이매우 발달했고, 뿌리가 엄청나게 옆으로 퍼져 있으며 수형이 웅장했다.

 

이어 와산리 강현배가옥으로 향했다.

   
 

이 집은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은 가옥이지만 4·3사건 이후 1952년 마을 재건이 이루어질 때 지어졌다는 제주도 전통가옥이다.

안거리와 정지간이 먼저 건축되었고 밖거리와 이문간은 몇 년 후에 지어졌다고 한다.

원래 초가였는데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 지붕개량사업에 따라 뼈대는 그대로 놔둔 채 지붕을 스레트로 바꾸었고 최근에 다시 양철 지붕으로 바꾸었다.


거릿길에서 이문간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딴정지가 있고 왼쪽에 안거리 오른쪽에는 밖거리가 있다.
안거리는 제주도 전형적인 공간 나누기는 아니지만 3칸집이며 잘 다듬은 현무암으로 벽을 쌓고 시멘트로 마감했다.


이문간 양쪽은 쇠막으로 사용하고 마당 가장자리를 따라 잘 다듬어진 돌로 가지런히 박은 잇돌(물이 튀지 않게 문 바로 아래 놓은 돌)은 이 집 건축 당시 주인의 경제적 수준을 짐작케 해 주었다.

 

   
 

   
 

고영철 회장은 "제주어로 고팡과 구들은 방을 뜻하지만 온돌이 있는 곳은 구들, 온돌이 없는 곳은 고팡으로 불렀다"고 했다.


특히 "제주도의 특이한 삶의 방식인 부모는 나이가 들면 밖거리로 거처를 옮기고 자식에게 안집을 내어주는데 그러나 이후 딱 한번 안방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한다. 부모 중 한사람이 임종을 할 때는 다시 안방으로 거처를 옮겨 안방에서 돌아가시도록 했다"는 이야기다.

 
   
 

이어 찾은 와산리 눈미불돗당(본향당).. 이 당은 당오름 북쪽 기슭 와산리의 옛 지명인 눈미, 또는 눌미의 당오름 밑에 자리한 데서 눈미 불돗당, 눌미 볼돗당, 웃당이라고도 한다.


당오름의 명칭은 당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누워 있는 산(와호산(臥乎山))이라는 데서 누온미, 눈미(와산(臥山))라고 했다는데 당이 들어선 후에 당오름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남쪽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두 번째 오른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끝까지 가면 숲가의 밭 가운데 큰 팽나무 아래 붉은 스레트지붕으로 지어진 단칸집안에 커다란 왕바위가 바로 당신이다.

이 건물은 한 재일동포의 성금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당의 신체(神體)는 가로 2m, 높이 1.5m, 두께 2m 정도의 큰 반석이다.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2014)에 따르면 마을 할머니들의 얘기로는 이 석상미륵에 노란 꽃(이끼)이 피면 시기가 좋고 검은 꽃이 피면 병이 들어 마을에 액운이 찾아온다고 한다.

기자(祈子)가 주기능이며 곡식의 풍족함을 가져다주는 농경신의 성격도 갖고 있는 이 당은 마을 주민들이 중시하는 당으로 마을 역사가 긴 선인동의 김씨 가문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당신(불도삼승또, 불도삼싱또)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옥황상제의 막내딸아기가 부모의 말을 거역한 죄로 민간 세계로 귀양오게 되었는데 눈미(와산)의 당오름 꼭대기에 내려와 큰 바위가 되어서 좌정했다.

마을에는 중년이 되도록 아이를 못 가진 한 부인이 허허탄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보시를 받으러 온 중에게 하소연한 즉, 홀연히 나타난 왕바위를 찾아 지성을 드리면 자식을 얻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 바위를 찾아다니던 부인은 당오름 꼭대기에 난데없는 큰 바위가 하나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정성을 다하여 제물을 마련하고 그 바위를 찾아가 제를 올렸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태기가 있고 해산 달이 가까워지자 다시 제를 지내려고 당오름을 찾았다.


무거운 몸이라 중턱에 앉아 쉬면서 부인은 "산 위에 계신 조상님이여, 영급(靈及)이 있거든 요만큼에나 내려와 좌정하십시오."하고 축수한 뒤 산꼭대기에 올라가 제를 지내고 내려왔다.

마침내 생남을 했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에서 또 제를 올리려 당오름을 오르다 보니 신기하게도 지난 번 축수를 올렸던 중턱 그 곳에 산꼭대기의 바위가 내려와 있었다.

거기서 제를 지내고 난 뒤 이번엔 "이왕이면 더 평평한 데로 내려와 좌정하십시오. 일만 자손이 조상님으로 모실 것이옵니다."하고 축원을 올리고 돌아왔다.

며칠 뒤 다시 가 보았더니 그 신령스런 바위는 마을 가까이 만년 묵은 팽나무 아래 좌정해 있었다.

그로부터 매해 음력 삼월 열사흘은 대제일(大祭日)로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를 올리게 되었으며, 그 밖에도 매달 초사흘, 열사흘, 열이렛날에는 심방을 모시고 치성을 드린다고 하며, 특히 아이 없는 여인들은 간절한 소원을 안고 곳곳에서 찾아와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이곳은 커다란 바위 하나가 당 안에 있어 신성함을 느끼게 만드는 곳이었다.


이어 찾아들어간 와산리 종남밭 마을터(잃어 버린 마을)는 가슴 아픈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곳이었다.
이날 참여한 유나님은  "종남은 떼죽나무를 말한다"고 전해 주었다.

와산리(臥山里)는 본동을 비롯 웃동네, 종남동(종남밭), 새비보리, 섯가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130여 가호가 살았던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다.

약 300여년전에 설촌된 이 마을은 목축업이 성행했고, 너른 농토로 인해 비교적 풍부한 생산성을 가진 부촌이었다.

그러나 1948년 11월 20일경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작전이 벌어지면서 와산리는 군경토벌대에 의해 방화(放火) 소개(疏開)되어 아름다운 마을공동체는 완전히 사라졌다.

당시 한달진씨 등 10여 호가 목축에 종사하며 살았던 종남밭은 1949년 11월 20일께 와산리 마을 전체가 토벌대에 의해 소개된 이후 지금까지 복구되지 않았다는 것.

   
 

4·3의 와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1949년 봄 대흘초등학교에 성을 쌓아 대흘, 와흘, 교래리민과 같이 함바집에서 집단생활을 하다가 1952년 와산본동에 돌아와 마을 재건이 이루어졌다지만 본동을 제외한 웃동네, 종남밭, 제비보리 등 자연마을은 그 후 사람이 살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있다.(전교조제주지부 2005년 교사를 위한 4·3 역사기행 자료에 의하면 종남밭에는 김시천씨가 지붕만 얹고 10년 정도 살았다고 함)

그러나, 지금도 울창한 대나무숲이 있어 마을을 찾기는 쉽다.
최근 와산리는 4·3의 폐허 위에서 마을 공동체를 지키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다.


종남밭은 다른 마을과 달리 미리 주민들이 피신해 버렸기 때문에 마을이 방화되던날이나 소개 당시에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잿더미가 된 마을을 보며 큰 고민에 빠졌다.

   
 

토벌대가 그 동안 보여 온 광포(狂暴)한 행태(行態)로 보아서는 해변마을인 조천, 함덕으로 내려간다고 해서 목숨이 보장되진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남자와 젊은 여자는 마을 주변에 남고 주로 어린아이와 노인들만 해변마을로 내려갔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낮에는 마을 위 지경인 왕모루곶이나 동산전,새미오름 등에 흩어져 피신생활을 했고 밤에는 폐허가 된 마을로 돌아와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던 것이다.

이 곳은 올래(마당 입구), 안채, 외양간, 닭 키우던 곳, 부엌, 통시(화장실), 울타리 등의 돌담 형태와 깨진 옹기조각 등의 생활 흔적까지 2∼3가구로 보이는 집터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또 마을 터 한가운데에는 식수로 사용됐던 우물터와 맞은편에 소·말에게 물을 먹였던 쇠못 흔적도 확인된다.


당시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을 생생히 보여줄 만큼 집터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다음은 와흘리를 설명한 글이다.


와흘리의 옛 이름은 누온흘 또는 눈흘, 궷드르곶이다.

주민들은 ‘논을’ 혹은 ‘눈을’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넓게 펼쳐진 큰 숲’을 뜻한다.

약 400~500여 년 전 김해김씨(김만희의 9대손)가 처음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제작된 지도에는 와흘리, 상동, 고평동, 수기동 등의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1948년 4·3으로 마을 전체가 불탔다가 1954년 재건되어 현재에 이른다. 본동, 상동, 고평동, 초평동, 전원동으로 구분되는 5개의 자연마을이 모여 와흘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해발 고도 400m에서 100m에 이르는 평탄한 경사를 이룬다.


와흘리 가운데 기시네오름[237.4m]이 솟아 있으며 하천의 발달은 미약하다.

제주시 조천읍의 서쪽 내륙에 위치한 와흘리는 현재 본동·상동·고평동 등 3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대표적인 중산간 마을로서 넓은 초지를 기반으로 한우 정착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지역이다.

   
 

답사 후반기에 찾은 대흘1리 김시범묘는 가족묘지로 만들어졌지만 아직 미완의 묘소로 남아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생각을 많이하게 만든 코스였다.

김시범(金時範, 1890∼1948)은 조천리 2828번지에서 김진호의 4남으로 태어나 뒤에 김주호의 아들로 입양한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의 중심 인물이다.

조천리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1일 부터 24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연속적으로 전개됐으며 그 지역도 조천․함덕․신흥․신촌 등 4개 마을로 점차 확대됐다고 한다.


최초의 거사일은 김시우(金時宇)의 소기일(小忌日)인데 김시우는 유학자로서 존경을 받던 분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시은(金時殷)․김시범․김장환(金章煥) 등과도 근친간이며 조천의 명문거족이었다.

1차 시위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연행된 김시범은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아 항소했는데, 동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만기출옥한 후 옥고를 치렀던 동지들이 모여 순사(殉死)한 동지 백응선의 묘비를 건립하기로 하고 이 비문을 김시범이 지었는데 일제의 연호를 쓰지 않고 단기 연호를 썼다고 한다.


김시범은 동지 김연배와 함께 사숙(私塾)이나 야학을 통하여 후생들을 가르쳤으며 조천소비조합 운동에도 참여해 임원을 맡기도 한 인물이다.


조국이 광복되어 미군정 당시에는 1945년 7월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개편할 때 부의장에 추대되었으며 1945년 9월부터 1946년 7월까지 초대 조천면장으로 재임하기도 하였다.(제주 항일인사 실기)

   
 

조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분들이 모두 보훈청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으나 김시범은 아직까지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사회주의 경력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묘 또한 마을에서 가까운 경작지 내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산담도 없고 비석조차 세우지 않고 있다.

이는 가족들의 항의표시라고 한다,

이와 관련된 사실을 들추어 보면 1947년 삼일절 기념대회 준비위 조천면 부위원장을 맡았었고 그 날 시위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벌금 3,000원을 선고받은 적이 있으며,박경훈 전 제주도지사가 의장으로 뽑힌 〈민전〉의 부의장으로 뽑힌 것이 있다.


4․3 사건 기간 중 초토화작전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제주읍내 유지들에 대한 일제검속을 강행하고, 집에서 농사를 하면서 살고 있던 김시범 선생도 군인들에게 연행된 것이다.

   
 

이 때를 전후해 아들(김용욱씨의 아버지)과 딸도 토벌대에 의해 아무런 이유없이 죽었다. 2006년 3월 29일 제주4․3실무위원회로부터 〈제주4․3사건 희생자 및 유족 결정통지서〉를 받았다.
김시범 선생이 아무런 잘못 없이 억울하게 희생됐음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문서이다.

2000년 1월 정부가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3년에 걸친 진상조사 끝에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국가가 발간하는 과거사 백서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003년 10월 제주에 와서 4.3 당시 억울하게 숨져간 희생자들과 도민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시범 선생에게 씌워진 억울한 누명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현실이다.

김시범의 묘는 원래 금대 북쪽 경작지에 있었던 것을 2010년 대흘리 가족묘지로 이장했으나 여전히 비석은 세우지 않았다. 이 가족묘지에는 김시우, 김시은의 묘도 있다.

   
 

이날 답사팀은 "김시범의 묘에 비석이 없는 이유는 후손들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후 만든다며 아직 비를 만들지 않고 있지만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될 때까지라도 집안에서라도 먼저 비석을 만들어 후세에 알리는 일도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리고 같은 밭에 있는 독립유공자 김시은의 묘소앞에서는 모두 묵념을 올려 감사함을 전하는 의식을 갖기도 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와흘리 한거리하로산당(노늘당)으로 민속자료 제9-3호로 지정된 곳이었다.

당은 마을의 정신적 공동체가 되는 공간이다.
조상 대대로 마을 결속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온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마을 옛이름을 따서 노늘당이라고도 한다.
줄기 끝이 뿌리보다 더 밑으로 쳐질 만큼 큰 팽나무 신목이 堂의 분위기를 한층 위엄있게 해 주었었지만 지금 신령해보이던 그 신목(폭낭)은 태풍에 꺾여져 버렸다.

   
 

당은 마을 사람들이 깨끗이 관리하고 있고 '백조도령'과 '서정승따님'의 신위 위패가 조그만 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마을에서는 새해를 맞이하여 풍년을 기원하고 본향당신에게 신년하례를 드리는 의미를 담고 있는 '신과세제'를 음력 정월초에 이 곳에서 치른다. 김순옥 심방이 남편인 고(故) 문성남 심방의 뒤를 이어 메인심방으로 굿을 집전하고 있다는 곳이다.

   
 

당의 경내에 있는 본풀이 비석에는 다음과 같이 堂神의 내력이 적혀 있다.


송당 소천국의 열여덟 자식 중에서 열한번째 백조도령님이 성장하여 한라영봉에서 논흘일문도성책을 맡아 사냥을 하면서 내려오다가 기시내오름에서 발도 왼발, 손도 왼손, 귀도 왼귀, 눈도 왼눈, 왼발로 뛰며 다니는 선씨(玄氏)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선씨할아버지가 백조도령에게 '사람입니까, 신입니까?' 여쭈니 백조도령은 '신이며 논흘일문도성책을 맡아 왔노라.' 하였다.


선씨할아버지는 '그것은 아니됩니다. 한거리당에 왕대윗성가람실 밑에서 태어나신 서정승따님이 자손에 장적차지, 호적차지, 생산물고를 잡아 있어 안됩니다.' 하였다.


백조도령이 '그 여자는 남편이 있느냐?'고 묻고 과수며 일곱 애기를 혼자 양육함을 알고 선씨할아버지에게 중매를 부탁하고 선을 보아 한거리당에 같이 있게 됐으나 서씨부인은 자손들이 돝을 잡으면 생머심귀퉁어리 알아구리를 받아먹으니 깨끗치 못하다 하여 백조도령은 서씨부인에게 바람 아래로 내려 동백자리에 좌정케 하고 백조도령은 웃판상단으로 좌정하였다.(현장에 있는 본풀이 비석)

   
 

당에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지전과 물색, 명실이다.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은 "지전은 남신당에나 여신당에 공통으로 걸려 있지만 물색과 명실은 오직 여신(女神)이 상주하고 있는 당에서만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전(紙錢) 지전은 저승 돈이다.

굿을 할 때 보면 〈저승 돈은 지전, 이승 돈은 금전〉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당에 가면 창호지나 속지 등을 오려 구멍을 일정하게 뚫은 종이를 나무에 걸어놓고 온다. 그냥 백지를 걸어놓은 것도 있다.

글 모르는사람들이 백지를 가슴에 문질러 소원을 빌고 신목 가지에 걸어 둔 것이다. 이 백지는 저승 돈이 아닌 백소지권장이다.

백소지권장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말 못할 사연을 신에게 아뢰는 솟장(訴狀)의 일종이다. 백색의 한지인 소지를 가슴에 대고 소원을 빈 뒤 나뭇가지에 매다는 것이다.

 
   
 

물색(物色) 물색이란 3색의 옷감을 걸어놓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옷감이다. 당집이 있는 경우에는 옷감으로 직접 고운 한복을 지어 바치는 경우가 많다.


깨끗하고 고운 여신을 모신 당, 주로 축일당(丑日堂)이나 칠일당(七日堂) 계통의 산육농경신(産育農耕神)의 당에 고운 물색이 걸린다. 이렇게 해마다 모아진 물색들은 신의청소제(神衣淸掃祭)라고 하는 〈마불림제〉 때 꺼내어 말린다.

보통 사냥을 하는 거친 남성신이 좌정하고 있는 당에는 물색이 걸리지 않는다. 남성신에게도 물색과 같은 작은 조각 옷감이 걸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팔찌거리(활을 쏠 때 소매를 걷어 매는 띠)를 바치는 것이라 한다.

 
   
 

명실(命絲) 명실은 실타래를 지전이나 물색과 함께 신목에 걸어 놓는 실이다.


삼싱할망(産育神)에게 비념을 할 때, 아기 낳기를 원할 때에 명실을 올린다. 이는 실처럼 길게 명을 이어 달라는 유감주술(類感呪術)이다. 때문에 명실이 걸려 있는 당은 아기를보살펴주는 당, 생명을 이어주는 산육·치병신의 당이다. 주로 '일뤠할망당'이 많다.


이 당의 팽나무는 수령 380년으로 도내 팽나무 중 가장 오래된 고목이며 나무둘레만 4m가 넘는 신목으로 북제주군은 지난 1982년 보호수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2006년 5월 남쪽 신목의 큰 가지가 하나 부러졌으며, 2009년에 타지방에서 온 무속인들이 기도하면서 내버린 촛불이 신목의 가지에 걸어둔 옷감에 옮겨 붙어 남쪽의 신목이 반쯤 타 버렸고, 2016년 가을 태풍으로 북쪽 신목이 꺾여서 지금은 완전히 베어 버렸다.

하지만 이곳에는 육지 신방들이 기를 받기 위해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고 난후 버려진 쓰레기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대흘1리 보문사(멸실)터는 지금은 남양홍씨 문중이 설치한 보문사(普門祠)와 같은 지점에 있었다.

북제주군의 문화유적에 따르면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밝혀진 불교 사찰 터는 73곳에 이른다고 한다.
이곳은 고려시대 사찰 보문사(普門寺)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12세기에 창건되어 17세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절이 있던 곳은 해발 250m 정도 되는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제주목에 있던 사찰이 총 15개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普門寺在巨口里岳北이라 기록되었다.


1653년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에도 총 22개의 사찰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普門寺在川東三十里라고 되어 있다.


현재 보문사지로 알려진 것구리오름(꾀꼬리오름) 북쪽 기슭에 있는 경작지(약 3,000㎡)에는 청자흑백상감편, 청자참외모양병편, 분청사기인화문사발편, 백자 등의 도자기류를 비롯하여, 질그릇, 어골문기와편, 어골사각화문기와편, 어골정방십(×)자문기와편, 어골사각일(一)자문기와편, 어골정방선문기와편, 당초문기와편 등이 고루 확인되고 있다.

최근까지 기단석과 정초석들도 한 군데 쌓여 있었지만 현재는 모두 반출되었다.

절터의 북동쪽에 보문사지 원물이 보존되어 있다.

   
 

고려시대 때 혜일 선사가 보문사에서 참배하고 쓴 시가 전하고 있다.


寺僻依荒徼(사벽의황요: 절은 초라하니 거친 지경에 의지하였으나)
泉甘得夢中(천감득몽중: 샘물은 달디다니 꿈속에서 얻었네)
蓮場逢勝事(연장봉승사: 연꽃 도량이 좋은 일을 맞았으니)
佛隴嗣遺風(불롱사유풍: 불법의 유풍이 이어졌음이라)
草過霜仍緑(초과상잉록: 풀은 서리를 맞고도 그대로 푸르지만)
蘿因瘴未紅(라인장미홍: 담쟁이는 풍토병 때문인가 붉지 않구나)
圓通門自啓(원통문자계: 원통문이 스스로 열린 이곳에)
遠鴈叫長空(원안규장공: 멀리 기러기가 넓은 하늘에서 울고 있어라)


보문사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고려시대 사찰로서, 제주목과 정의현을 오가는 길에 설치된 동원(東院)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사찰로 추정된다.(북제주군의 문화유적,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 오성)

절터의 북쪽에 남양홍씨 문중이 설치한 보문사(普門祠)가 있다.

대흘1리 남양홍씨입도선묘는 속칭 꾀꼬리오름 북쪽 사면에 있다.


조선초기(1402) 제주도에는 홍은열을 시조로 하고 홍윤강을 입도조로 하는 남양홍씨가 많이 퍼져 있다.
 

시조 홍은열(洪殷悅)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통합(三韓統合)에 공을 세우고,고려개국일등공신(高麗開國一等功臣)이자 광익효절헌양정난홍제분용량채보경제공신삼중대광태사(匡翼効節獻襄定難弘濟奮庸亮采保經濟功臣 三重大匡太師)에 올랐다.


대계(大系)편에서 본 대로 당홍계(唐洪系)의 선시조(先始祖)는 8학사(學士) 중의 한 분인, 고구려 영류왕 때 당(唐)나라에서 건너온 홍천하(洪天河)이다. 선시조 학사공(先始祖 學士公) 이후의 계대(系代)가 확실치 않아 홍은열(洪殷悅)을 기세조(起世祖)로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따라서 홍은열(洪殷悅)을 시조(始祖)로 한다.


남양홍씨는 세칭 당홍(唐洪) 집과 토홍(土洪) 집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당홍은 고려 초기에 당나라의 문화 사절로 입국했다가 귀화하여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가 된 홍은열(洪殷悅)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토홍은 그보다 훨씬 뒤인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을 지낸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하고 있는데, 제주에 입도한 남양홍씨는 당홍이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본관인 남양(南陽)은 경기도 화성군(華城郡)에 위치한다.


제주 입도조 홍윤강(洪允康)은 시조 홍은열(洪殷悅)의 15세손이며, 문하시중 문정공 홍언박(洪彦博)의 손자로 중훈대부 사재감(司齋監)을 지냈다. 공민왕23년(1374) 공민왕시해사건 때 친척으로 있는 홍윤(洪倫)·홍관(洪寬) 등이 주모자로 처형되고 홍사보(洪師普)·홍사우(洪師禹) 등이 유배되자 사재감의 벼슬을 사퇴하고 유랑길에 나섰다가 조선 건국 후 태종2년(1402) 아들과 손자 등 가족과 함께 낙향 입도하여
조천리에 정착하였다.


이후 자손들은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지방에서 향리를 지내는 정도의 집안이 되었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남양홍씨는 장간공(莊簡公) 홍융(洪戎)의 아들 양파(陽坡) 홍언박(洪彦博)의 후손들이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입도조의 묘는 실묘(비문에는 1∼4대가 귀향하였다고 되어 있음)하였으며, 조천읍대흘리 산33-1번지 속칭 꾀꼬리오름 북쪽 사면에는 홍윤강의 5대손 묘가 있다.


인근 마을 촌로들에게는 ‘국회의원 홍병철의 선대 묘가 있는 명당’이라는 식으로 소문난 묘지라고 한다.

이날 하루종일 해설과 안내를 맡았던 안건세 선생은 "최근 제주도의 쓰레기 문제가 가장 심각한 현안사항이 되고 있는 때에 봉천수 등에 마구 버려진 쓰레기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주인을 찾아 책임을 묻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답사는 어린이부터 87세 되신 어르신까지 다양한 회원들이 함께 참여한 가운데 즐거운 답사의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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