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세종때 축성..수산1리 수산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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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세종때 축성..수산1리 수산진성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4.3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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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째 큰 성,다른 진성은 타원형인데 비해 사각형으로 만들어


수산1리 수산진성 水山鎭城


수산진성 水山鎭城
위치 ; 성산읍 수산리 수산초등학교 울타리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시대 ; 조선 초기

 

 

 

수산초등학교 울타리로 되어 있는 수산진성은 위치상으로나 축성 방식으로나 다른 진성과는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의하면「수산진성은 세종21(서기1439)년에 축성되었으며, 성의 둘레는 1164척이고 높이는 16척」이라고 전하고 있다. 성의 규모가 진성 중에서 4번째로 크며, 모양 또한 다른 진성이 타원형을 하고 있는데 비해 사각형을 하고 있다.

또한 축성 시기도 100여년 빠르며, 진성이 위치한 곳도 다른 진성들은 모두 바다를 끼고 있는데 수산진성은 바다와는 거리가 먼 중산간의 평지에 있어 동쪽에서 침입해 오는 왜구를 방어하는 목적 외에도 다른 목적으로 이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도 있다.

선조 때 제주목사였던 이경록(李慶祿, 1533~1599)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방어에 많은 공적을 남겼는데, 우도에 숨어 있는 왜구와 접전을 벌이려고 수산방호소를 성산으로 옮겨 외성을 축조한 때였다.

마침 1601년에 제주어사 김상헌이 부임하여 이를 보고 “성산은 제주의 한 군더더기 땅인데 외적에게 오히려 포위될 위험이 있어 계략치고는 졸작이다.”라고 혹평하였는데, 1602년(선조 35) 제주목사 성윤문(成允文)이 부임하여 다시 수산 쪽으로 방호소를 환원하였다.

성벽 바깥으로 돌출시켜 만든 치성(雉城)과 치성 사이의 구간이 일직선으로 된 사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 수산진성은 축조 방법이 2단식 석축으로 되어 있다. 현재 진성의 남쪽에는 초등학교 교문으로 쓰기 위하여 20여m를 잘라내었다.

교문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높이 3m, 길이 50m 정도 성벽이 남아 있는데, 창고로 이용되는 건물이 있는 중간 부분은 허물어져 있다. 동쪽 모서리와 남쪽 모서리가 만나는 구간은 원래는 치성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찾아볼 수 있다.

동쪽 성벽은 거의 허물어져 원래 모습을 잃었고 그 안은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북쪽은 길이가 120m로 수산진성 전체 구간 중에서 보존이 가장 잘 된 곳이다.

지금은 대나무가 빽빽이 들어차서 성벽 위로 올라가기는 힘들다. 외벽 높이는 바닥에서 4m이고 내벽은 2단으로 축성되었는데 하단 성벽은 바닥에서 1.2m, 상단 성벽은 3m이다. 폭은 하단·상단 모두 2m이다.

그리고 상단 성벽에는 수산진성에서 유일하게 총구와 기타 무기류를 넣을 수 있도록 가로 25cm, 세로 50cm 가량의 사각형 구멍인 여장(女墻)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여장은 탐라순력도에도 그려져 있다.

북쪽과 서쪽 성벽이 만나는 곳에는 치성이 있는데 성 밖에서는 높이와 축조 방식을 알 수 있으나 성의 안쪽에서는 2중 성벽이라는 것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상단의 성벽이 허물어졌다.

치성의 둘레는 12m 가량이고 높이는 바닥에서 4m 가량 된다.

서쪽 성벽은 상단이 유실되었다. 외벽의 높이는 3m 정도이고, 폭은 2m에서 6m까지이다. 서쪽은 길이가 120m 정도 되는데 예전에 학교 관사로 이용했던 건물이 들어서 있어 성이 중간에 끊겼다. 관사 건물이 있는 자리는 원래 서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의 내부에는 병사(兵舍) 및 객사(客舍)가 있었으나 왜정시대에 전적말살정책(戰迹抹殺政策)으로 모두 철거되었다. 성안의 남동쪽에 '진안물'이라 불리는 샘물이 있었으며 근래까지도 주민들이 식수로 이용했으나 지금은 메워지고 없다.

수산진성은 원래 정의현성의 관리하에 있다가 서기1910년 이후 얼마간 표선면 성읍리 정의보통학교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관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안의 토지 일부를 인근 사람들이 점유하여 집을 짓고 살기도 하고 토지를 농경지로 이용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서기1945년 수산초등학교를 건립하게 되자 성안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이주토록 하고 수산리민들이 자력으로 건물을 매입하고 교사(校舍)로 개축하였다. 학교 건물은 6·25 당시에는 피난민들이 거주하기도 했다고 한다.(제대신문 4329.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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