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신화적인 존재..교래리 이덕구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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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신화적인 존재..교래리 이덕구산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6.29 0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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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호주머니에 숟가락 꽂은 채 십자가에 묶여 시신 전시


교래리 이덕구산전 李德九山田

 
교래리 이덕구산전 李德九山田
위치 ; 조천읍 교래리 괴평이오름. 5.16도로 제주시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는 수장교에서 동남동쪽으로 직선거리 2Km쯤 되는 곳, 또는 5.16도로에서 교래리를 향하여 3Km쯤 가다가 시멘트 포장된 길을 따라 다시 2Km쯤에서 대략 남쪽으로 1.5Km쯤 되는 곳
시대 ; 대한민국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유형 ; 4·3사건 전적지

 

▲ 교래리_이덕구산전2(한라일보).

▲ 교래리_이덕구산전(깨진솥).

4.3 때 최후의 인민유격대가 주둔했던 곳이며 유격대장 이덕구가 사살됐다고 하는 이덕구산전이다. 이 곳은 괴평이오름의 북쪽 등성이에 해당하며, Y자형의 '안새왓내'와 '밧새왓내'가 합수되는 위쪽의 밋밋한 분지이다.

북쪽에는 지그리오름, 남쪽에는 거문오름이 있다. 산중에 있는 넓은 분지에다 주변에 물이 좋고 뒷편에는 높은 봉우리가 있어 중산간 마을을 비롯 조천 일대의 마을을 관망할 수 있으며, 계곡은 천연적인 성 역할을 하고 있어 토벌대가 찾기도 힘들지만 찾아도 쉽게 공격할 수 없는 곳이었다.

지금은 숲이 울창해졌지만 4.3 당시에는 나무가 없는 평지였다고 하며, 유격대가 살았던 아지트의 흔적과 그 당시 생활도구로 쓰였던 솥, 사기그릇, 질그릇 등이 깨어진 채로 남아 있고, 여기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비석을 살펴보면 총알 맞은 흔적을 볼 수 있다.

인공 연못도 조그맣게 남아 있는데 주변에 얼마든지 쓰고도 남을 만큼의 맑은 계곡물이 있음에도 못을 만든 까닭은 계곡에서 쌀을 씻으면 하류에서 토벌대가 쌀뜨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즉,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계곡의 물을 인공 못에 길어다 놓고 생활에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덕구는 조천읍 신촌리 출신으로 일본에서 立命館대학을 다녔으며 재학중 학병으로 입대 관동군 장교로 종전을 맞이하여 귀향한 후 1946년 3월에 개원한 조천중학원(1948년 4월 폐교, 조천지서 건너편 일제시대의 경방단 사무실을 학교로 씀, 국어 현유복, 영어 김동환, 수학 물리 김민학, 역사 사회 체육 이덕구)에서 1947년 3월 총파업 이전까지 역사와 체육 교사로 재직하다가 3.1 사건에 관련, 조천중학원 파업 문제에 대한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왼쪽 고막이 터졌다고 하며 한 달 이상 경찰에 구금되어 있었다.

풀려난 뒤 다시 교단에 얼마 동안 섰다가 학생들에게 '마지막 수업이다. 육지로 간다'는 인사를 한 뒤 장기휴가원을 내고 교단을 떠났으며, 47년 8.15 검거 선풍 후 잠적하였다.

1948년 1월 22일∼1월 26일 사이에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 221명이 검거되는데 여기에 이덕구도 끼어 있었다. 며칠 후 63명은 방면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덕구의 방면 여부는 불확실하다.

4.3 항쟁이 일어나면서 입산한 것으로 보이는데 1948년 4월 15일 남로당 제주도당부대회에서 4.3봉기를 추인하고 인민유격대를 조직할 때 제1연대장을 맡은 것으로 보아 강경파 핵심당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4.16.에는 인민유격대 총책 김달삼(본명 이승진)의 명의로 '5.10 망국단선 반대를 위한 무장 봉기 성명'을 발표하여 무장 투쟁을 공식화했다.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에 참가한 김달삼이 제주로 돌아오지 않게 되자 2대 유격대장으로 군사부 총책임자가 된다.

뛰어난 지도력으로 항쟁을 지휘하지만 토벌대의 대규모화 등으로 항쟁이 악화된 무렵인 1949년 6월 7일 화북지서에서 출동한 토벌대에 포위되어 격전 끝에 자살(또는 사살, 불확실함)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덕구의 은신처를 알아서 길 안내를 한 사람은 용강동 출신 고창률씨이며 유격대에 있다가 내려와 자수한 사람이다. 고씨는 2002년 현재 생존해 있다.

이덕구는 민중들 사이에 신화적인 존재로 새겨져 있어 그에 대한 일화들이 많다.

예를 들면, 그가 얼마나 날쌘지 경찰이 그를 발견하여 총을 겨누다 보면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 없어져 버리고 그가 있었던 자리에는 모래만 수북이 남아 있더라는 것이며, 평소에 다리에 모래 주머니를 차고 다니다가 위급한 상황이 되면 풀고 달아나니까 얼마나 빠르겠느냐는 것이나, '덕구 덕구 이덕구 박박 얽은 이덕구'하는 노래가 전해지는 것 등이다.

이덕구의 시신은 관덕정 앞 당시 경찰서 정문에 가슴 호주머니에 숟가락을 꽂은 채 십자가에 묶인 모양으로 며칠 동안 전시되었었다. 이런 모습을 찍은 사진이 일본 신문에 게재되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사진은 이덕구산전에 여러 개 남아 있는 '트'(아지트의 준말, 여기서는 땅을 조금 파서 담을 낮게 쌓고 짚을 덮어 살았던 움집을 뜻함) 중의 한 곳에 남아 있는 당시 사용했던 솥이다. 솥 외에 조그만 옹기 단지 등 생활도구가 더러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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