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비양도 방비..동명리 명월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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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비양도 방비..동명리 명월진성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9.28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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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와 대정(大靜) 사이 위치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 풍부 9진 중 으뜸


동명리 명월진성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9호(1976년 9월 9일 지정)
위치 ; 한림읍 동명리와 명월리 일대. 성곽은 명월리 2236, 동명리 2256, 2260, 2261번지이며 그 안에 명월진이 있었음.
시대 ; 조선
유형 ; 방어유적(진)

▲ 명월진성(남문동쪽밖2).
▲ 명월진성복원(1997).

 


명월진성은 비양도에 왜선이 자주 정박하면서 민가에 피해가 크자 이를 방비하기 위하여 조선 중종5년(1510) 목사 장림(張琳)이 이곳에 목성을 쌓았다.

이후 선조25년(1592)에 이를 석축으로 바꾸었다. 탐라지에 따르면 성벽의 둘레는 3020척, 높이는 8척이었다. 선조 때 목사 이경록(李慶錄)이 개축하였다.

영조40년(1764) 어사 이수봉(李壽鳳)이 왕에게 아뢰어 이곳 책임자 조방장(助防將)을 만호로 승격시켰다.


김상헌의 남사록(南槎錄)에는 "명월포는 제주 서남쪽 60리에 있는데 중종5년 겨울에 목사 장림이 명월포에 본성을 쌓았다.

비양도가 가까워 왜선들이 번갈아 정박하기 때문이다. 선조25년(1592) 이경록 목사가 돌로 성을 다시 쌓았고 연변의 정박할 만한 곳에는 다 보루를 쌓았다.

둘레는 3050척(약 1000m)이고 높이는 9척이다. 세 개의 문이 있는데 문 위에는 모두 초루가 있다. 안에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물 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다."라고 쓰여 있다.


이원진의 탐라지(耽羅誌, 1653)에는 "동문 서문 남문이 있고 성안에는 샘이 있으며 마치 샘물처럼 물이 솟아오르므로 사시사철 물 걱정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샘을 '조물'이라 하는데 그 위치에 지금은 정수장이 자리잡고 있다.


정조5년(1781) 어사로 다녀간 박천형의 서계(書啓)에 “명월진은 서북쪽이 바다에 임하였고 진 앞에는 배를 정박할 만한 곳이 없으나 진의 서쪽 3리쯤에 독포가 있어서 어선이나 상선이 와서 정박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또 제주와 대정(大靜) 사이에 위치하여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9진 중 으뜸이다. 성지가 광활하고 백성들이 부유하며 샘물과 창고도 있어서 충분히 자급할 수 있으므로 서남쪽 거진(巨鎭) 중의 하나이다.”라고 하는 기록을 남겼다.


동·서·남으로 1칸의 초루(醮樓)가 있었다. 진내에 활터가 네 곳 있었는데 성 남동쪽 구명물 위, 남문 성벽, 남서쪽, 극락사 입구 등이다.

명월진은 별방진 성내에 있었던 동별창과 더불어 제주목의 중요한 창고였는데, 명월진내의 병고(兵庫)와 서별창(西別倉)에는 3300여석의 곡식과 흑각궁 향각궁 교자궁 장전 환도 천자총 등 주요 무기류가 보관되어 있었다.


성벽의 흔적은 남쪽 성벽 일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고, 수운교 한림지부와 극락사 그리고 한림정수장 일부분을 품고 있던 북쪽 성벽은 극히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성의 전체적인 모양은 북서-남동 방향으로 조금 긴 네모 비슷한 타원형이다.


남문 앞에 옹성이 복원되어 있다. 옹성은 나무로 만들어진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시설이다.

2001년 남문지 보수공사시 주춧돌, 돌저귀를 원형 발굴한 데 이어 2002년 2월 19일 명월성 성곽 보수공사 중 옹성터에 있던 농가를 철거, 농가 가장자리에서 옹성(내탁) 기단석 10m를, 이어 옹성 외탁 기단석 3m와 지대석을 원형 그대로 발굴했다. 이를 토대로 남문 옹성과 대문을 복원하였다.

동문 터의 옹성 일부도 남아 있다. 그러나 외벽만 일부 남아 있고, 옹성 자리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다.
남문지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살펴보면 남문지와 동문지 사이에는 3개소의 치성이 있고, 외벽의 일부가 전 구간에 걸쳐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남동쪽의 성벽은 남아 있으나 북서쪽의 성벽은 거의 없어졌는데 이는 1960년대에 한림항 방파제 공사를 하면서 가져다 써 버렸기 때문이다.


명월진의 남문에서 동쪽과 서쪽 성벽의 바깥쪽에 해자(垓字)를 설치했던 자리는 밭 모양이 길게 남아 있다. 해자란 성의 바깥쪽을 파서 물을 채움으로써 외부에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시설이다.

제주에서는 땅이 화산회토(화산재가 쌓여서 된 흙)여서 물을 채워 두지 못하기 때문에 가시가 크고 단단한 탱자나무를 심었었다.
《작성 041103, 보완 150415, 16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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