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옛 원터..남원2리 위혁만청덕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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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옛 원터..남원2리 위혁만청덕선정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10.27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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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세차게 솟아나와 고기에 미치는 것처럼 공평무사..'


남원2리 위혁만청덕선정비 魏赫萬淸德善政碑


위혁만청덕선정비 魏赫萬淸德善政碑
시대 ; 조선
유형 ; 선정비
위치 ; 남원읍 남원2리 도로변. 의귀초등학교 서쪽 새가름교를 지나 과수원 비닐하우스 앞에 있었는데 2008년 운지오름 동쪽 아래로 옮겨 세웠다.

 

 

 

이곳에는 비석받침돌이 6개, 비각 지붕이 4개 있는 것으로 보아 6개 이상의 선정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황구하 어사의 선정비와 위혁만(魏赫萬)(?) 현감의 선정비만 남아 있다.

이곳에 선정비들이 남아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의귀리에는 조선초부터 의귀원이 있었던 곳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광해군원년(1609) 판관 金緻의 동서방리 신설로 정의현 中面이 생길 때부터 1925년 남원리로 면사무소를 옮길 때까지 면사무소가 있던 곳이라는 점이다.

위혁만 현감의 선정비에는 앞면에만 글씨가 있는데, 가운데에 '縣監魏公赫萬淸德善政碑'라고 되어 있으며, 오른쪽과 왼쪽에 '盡必奉公政令明信 惟國是務治理庶平 澤被魚獸公乎公乎 德治民生千載不忘'이라 새겨져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77cm, 너비 40cm, 두께 15cm이며, 받침돌은 가로 90cm, 세로 63cm, 두께 35cm이다.

정의현감 위혁만은 1716년(숙종42) 3월에 도임하여 1718년 4월에 이임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반드시 나라를 위하여 전력하고 정치상의 명령은 확실한 소식이니 누가 나라를 이처럼 힘써서 다스리는 일이 청렴하고 공평하였는가! 물이 세차게 솟아나와 고기에 미치는 것처럼 공평무사하시니 인덕이 백성들에게 널리 미쳐 고르게 실어 잊지 아니하리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위혁만은 퇴관(退官) 후 정의현 가시리에 정거(定居)하였다.(2005년 旌義郡誌)

이 밖에도 102cm×70cm×30cm, 95cm×65cm×35cm, 60cm×40cm×40cm, 80cm×50cm×22cm의 받침돌과, 가로·세로의 길이가 88cm×70cm, 86cm×60cm, 80cm×65cm, 84cm×61cm인 비각 지붕돌이 길과 밭담 경계 주변에 흩어져 있다.

50여년 전에는 선정비가 20개쯤 있었다고 하는데 사삼사건 뒤에 집에서 쓰려고 가져가 버린 것 같다고 하며, 한남리 지경인 정씨열녀비 있는 밭 바로 동쪽에 붙은 밭에 원집이 있었다고 한다.(2002년 4월 13일 한남리 거주 오영욱(吳永旭. 1913年生)씨 증언) 따라서 이곳이 옛 원터임을 알 수 있다.
《작성 041122 , 보완 17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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