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도민 구휼, 10소장 울타리 증축..토평동(영천동) 한라산정상 윤식 마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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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도민 구휼, 10소장 울타리 증축..토평동(영천동) 한라산정상 윤식 마애명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3.22 13: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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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 진상한 청색 귤이 썩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토평동(영천동) 한라산정상 윤식 마애명

위치 ; 서귀포시 토평동 산15-1번지. 한라산 정상 북동쪽 암벽
시대 : 조선(1745년)
유형 : 마애명

백록담_마애_윤식일행

 

마애석각의 내용은 尹植 尹權 尹命勳 尹基 乙丑五月 尹命兼 權德行 成永夏 朴玉嶲 孟仁行 洪重健이다.

윤식(尹植)은 제210대 제주목사였다. 본관은 파평이며 생년은 숙종4년(1678) 무오(戊午)년이다.

영조20년(1744) 9월부터 영조21년(1745) 9월까지 재임했는데 재임 당시 탐라속지(耽羅續誌)와 효열록(孝烈錄)을 편찬하고 흉년에는 굶주리는 도민들을 구휼하고 10소장 울타리를 증축하였으나, 조정에 진상한 청색 귤이 썩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도민구휼에 대해서는 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영조21년(1745, 건륭10) 1월 1일 제주 목사(濟州牧使) 윤식(尹植)의 장청(狀請)을 인하여 연해(沿海)의 곡식 2천 5백 석(石)을 획급(劃給)하라고 명하고 또 각사(各司)의 노비(奴婢) 및 선혜청(宣惠廳)의 응납미(應納米)를 감해 주라고 명하였는데, 본주(本州)에 거듭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 영조21년(1745) 5월 12일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제주 목사(濟州牧使) 윤식(尹植)이 장계하여 논하기를, ‘본도(本島)의 유품(儒品)·가솔(假率) 등의 명색(名色)으로 고강(考講) 시사(試射)에서 떨어진 자가 있어 기병(騎兵)·보병(步兵)으로 내려 충정(充定)하였더니, 이 무리들이 노여워하여 깊은 밤에 객사(客舍)의 전패(殿牌)를 봉안한 곳에 모여 곡(哭)을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거조가 매우 패악하여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여서 곡한 수범(首犯) 세 사람을 두 차례 형추하여 다른 도로 정배(定配)하고, 유품·가솔로 사강(射講)에서 떨어진 자는 모조리 결원(缺員)에 보충하여야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본도에 흉년이 들어 관수(官需)가 부족하니, 연해(沿海) 고을에 저장해 둔 쌀 2백 석(石)을 또한 장청(狀請)에 따라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영조26년(1750) 5월 17일에는 윤식(尹植)을 좌윤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정보를 구하지 못하였다. 주로 윤씨인 것을 보면 가족들로 추정된다.
이 마애명은 한라산 정상에 있는 마애명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새긴 것이다.
《작성 16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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