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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례리 공천포 모래밭
위치 ; 남원읍 신례2리 바닷가
시대 ; 대한민국
공천포는 예로부터 검은모래가 있어 모래뜸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뜸을 뜨면 신경통과 관절에 좋다고 하여 여름이면 농사를 짓다가 숨 돌릴 틈만 생기면 ‘모살뜸’을 하러 공천포로 향했다.
모래구덩이를 파서 몸을 뉘여 얼굴만 남기고 모래를 덮는다. 그리고 수건이나 패랭이, 우산으로 얼굴에 햇볕을 가려 누워있으면 되는 것이다. 지금은 검은모래가 유실되어 뜸을 뜰 수 있는 여건은 안 된다.
그런 모래밭에 4·3 당시에는 피난민들이 모여 살았다. 4·3 당시 1949년 12월 10일 소개령에 따라 예촌 주민들은 공천포 모래밭으로 옮겨 바닷바람이 매섭게 부는 겨울부터 6개월 동안 참혹한 집단생활을 했다.
소개된 지 며칠 안 되어서 신례리 주민 가운데 4·3과 전혀 무관하고 배우지 못한 청년 10명이 모래밭 부근 하천에서 죽창 등에 찔려 죽었다.
"소개되면서는 마을에 있던 집들은 대부분 태워 버리고 내려간 뒤 공천포 백사장에 방공호처럼 호를 파고 그 위를 천막이나 짚 등으로 덮어 생활했습니다."(양완호,66세)
"소개된 뒤 굶주림과 추위가 큰 문제였다. 먹을 게 없어서 감저(고구마)와 해초, 밀체범벅 등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특히 무장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토벌대가 주도한 마을을 돌아가면서 쌓는 築城 공사에는 연인원 12,717명이 동원됐다."(양정보, 61세) (한겨레신문 4327년 3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