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배부른 동산..조천리 조천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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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배부른 동산..조천리 조천연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1.25 2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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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는 관곶(官串)연대로 표기


조천리 조천연대


위치 ; 조천읍 조천리 2980-5번지. 속칭 배부른동산
유형 ; 방어유적(봉수-연대)
시대 ; 조선

 

 

 

 

조천연대(朝天煙臺)는 사방을 모두 돌로 쌓아올렸고 위 가운데는 슬라브처럼 평평하게 만든데다 층계 오르는 부분 외엔 2자 정도의 벽면과 같은 돌담을 쌓아올려 바람을 막는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탐라방영총람에 의하면 조천연대는 동으로 倭浦연대(현 신흥리) 서쪽으로 禾北 별도연대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조천연대에서 화북의 별도연대는 보이지 않는 위치여서 원당봉수가 중계를 해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속 煙軍은 모두 12명으로 되어 있고 매번 2명이 한 조가 되어 5일씩 근무를 했으며 조천진 소속 별장 1명이 같은 조에 편입돼 관리를 했었다.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는 관곶(官串)연대라고 표기되어 있다.

팔오헌 김성구(金聲久) 정의현감의 『남천록』(南遷錄) 중에 조천연대에 관한 기사가 있다.(카페 벽파 예술촌 2010.05.22.)


숙종5년(1679) 음 7월 19일. 辰時初에 배를 놓기로 결의하였다. 모양이 소가 누운 것 같았으며 이름은 여서도라했다.

午時에 대화탈도, 소화탈도 두 섬을 지났는데 날이 저문 뒤에 배 안의 사람들이 횃불을 드니 朝天館의 봉화대에서 또 횃불을 들어 응답하였다.

初更(저녁 8시 전후) 무렵에 조천관에 도착하니 縣人들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戀北亭에서 잤다.


여기서 ‘조천관 봉화대’에서 횃불을 들어 응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봉화대>는 <연대>일 것이다.


‘현인’들이란 신임 현감을 맞이하려 온 <정의현>사람들과 포구에서 출입을 관리하는 조천관의 하급관리였던 것 같다.


제주新보(160314)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정의현감을 지낸 김성구(1641~1707)의 남천록(南遷錄)에는 조천연대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그는 1679년 제주에 부임하기 위해 배를 타고 관탈섬을 지나 제주로 향할 때 날이 저문 무렵, 배에서 횃불을 드니 조천관 봉수대에서도 횃불을 들어 응답했다고 기록했다.

이 횃불은 조천연대에서 올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작성 050104, 보완 1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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