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한라산 남쪽의 첫 마을..영남동 마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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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한라산 남쪽의 첫 마을..영남동 마을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7.25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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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밝은 햇살이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며 이 표석을 세운다.

영남동 마을터
 

위치 ; 서귀포시 영남동 224번지 일대
유형 ; 잃어버린 마을
시대 ; 대한민국

 

 


제2산록도로의 다리 제4산록교와 제5산록교 중간 남쪽에 '아르도서귀포펜션 신축공사현장'간판이 세워진 곳이 나온다.

이 곳 시멘트길을 따라 200여 미터 남쪽으로 가면 펜션 건설을 하다 중단한 현장에 이르게 된다.

그 곳에 주위를 살펴보면 주변에 영남동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터와 군데군데 대나무들이 있어 옛 마을터임을 쉬 알 수 있다.

길을 따라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영남동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나오고, 당시 주민들이 경작했던 농경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영남리는 남쪽으로는 고군산과 범섬이, 북쪽으로는 어점이악과 시오름이 보이는 아늑한 마을이었다. 영주산은 한라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영남리는 한라산 남쪽의 첫 마을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영남리의 설촌은 1800년대 중반으로 보인다.

이 일대의 북쪽 어점이오름 앞에 있는 왕하리와 판관마을, 영남리 동동네 근처에 있었던 틀남밭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설촌이 이루어 진 것이다.

마을이 융성했던 일제시대 중기에는 50여 가호가 있었을 정도로 그리 작은 마을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의 해안마을 중심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해안마을로 옮겨가 해방 이후에는 20여호 정도가 남아 있었다.


1898년의 방성칠 난과, 1901년의 이재수 난에도 영남리 주민들이 참여한 기록이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법정사 항일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영남마을의 기개를 전도에 알렸다.

이 당시 영남리 주민 6명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이 중 김두삼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으나 이자춘 선생은 4·3당시 마을 근처 야산에 숨어 지내다가 군경토벌대에 희생되어 아쉬움을 더한다.

이 당시 법정기록에는 이들의 주소가 영남리로 표기된 것을 보아, 일제초기 마을조사 과정에서 하나의 독립된 이(里)로 승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남리 주민들은 교육을 중요하게 여겨 마을 중심에 위치한 김원희의 집에 서당을 유치하여 아이들의 교육에도 열성이었다.

당시 서당훈장은 색달리 출신의 김봉성이었는데, 그는 1949년 초 어점이오름 근처의 궤에 숨었다가 군경민 합동토벌대에 잡혀 그 자리에서 죽창으로 난자당해 희생되었다.

당시 토벌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는 훈장에게 글을 배웠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훈장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도 후환이 두려워 눈물을 흘리면서 죽였다고 한다.(한라일보 2007. 06. 26.)


4·3 이전에는 50여 호 정도의 주민이 살았던 마을이나 4·3 당시에는 16가호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호주로는 이자춘, 문만권, 문두견, 김창헌, 문일권, 김원희, 김원옥, 문필권, 강성무, 김종원, 김두칠, 이동화, 이병화, 오영이 등이 있었다.(daum cafe 다시 또 다시)


1948년 11월18일 쯤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에 따른 소개령이 내려지자 대부분의 주민들은 해안 마을로 내려가기보다는, 이 사태가 금방 끝나겠지라는 생각에 마을 위쪽의 어점이악 왕하리와, 내명궤, 땅궤 등에 숨어 있다가 토벌대에 잡혀 학살되었다.


11월 20일 영남리 마을은 토벌대에 의해 완전히 불에 타버렸으며, 주민들은 조상들이 살았던 왕하리 냇가에 움막을 지어 대규모 피신생활을 하던 중 1949년 1월에 2연대 1중대, 서귀·중문경찰과 민보단 합동의 대토벌 때 거의 희생되었다.

당시 왕하리 학살 때 영남 마을 주민들은 죽어가면서도 먼저 죽은 시신을 함석으로 덮어주었다고 한다.


서귀포 주둔 육지 출신 토벌대는 토벌 과정에서 잔혹한 행위를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시신의 목을 잘라 등에 져 오게 하고, 숨어지내던 여성을 잡았을 경우에는 옷을 벗겨 희롱하는 게 다반사였다.

특히 육지 출신 한 군인은 땅궤에 숨어있는 영남리 처녀를 살려주겠다며 어점이 주둔소로 데려가 국부를 엠1소총으로 쑤셔 쏘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4·3을 거치면서 영남마을은 주민의 70%가 희생되었으며, 마을은 완전히 폐촌이 되어버렸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대가 끊겼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도 유년기의 아동들이었기에 고아로 자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끔찍한 사건을 잊으려고 고향 영남리 출입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정, 용흥, 도순, 법환 등지로 한두명 씩 흩어져서 살고 있다. 4·3을 경험한 주민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 이제는 강정동에 사는 김종원씨(2007년 73세)가 유일하다.(한라일보 2007. 06. 26.)


김종원씨는 당시를 이렇게 증언했다.


“소개를 내려가지 못하고 처음에는 마을 근처에 숨어 지냈습니다. 이 난리가 얼마 오래 가지 않으리라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처음은 호근리 마을공동목장 근처로 피해 지내다가 '소님궤'니 뭐니 하는 곳에 숨어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쌀오름 근처까지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우린 쌀오름 근처에 숨어 지내다가 토벌대에게 발견되었어요. 토벌대는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았어요. 여러 사람이 죽고 제 누님은 나무 밑에 '푹'하고 넘어졌는데 나무 위에 있는 눈이 떨어져 덮는 바람에 살아났어요.


누님은 그 눈 속에서 토벌대가 하는 말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누님은 그렇게 숨어지내다가 배가 고파 보리 이삭을 잘라 굶주림을 채우려고 내려왔어요. 그 때 누님은 토벌대에게 발각돼 죽었습니다.

또…… 친족들이 숨어 살았던 동굴은 사람이 드나들기 힘든 장소였어요. 토벌대가 총을 쏘아도 아무도 나오지 않자 나무에 불을 붙여 연기로 실신시킨 뒤 한 사람씩 끌어내 모두 총살해 버렸습니다. 그 겨울 몇 달 동안 일가족 15명이 다 토벌대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daum cafe 다시 또 다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던 왕돌빌레에 세워진 잃어버린 마을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여기는 4·3의 와중인 1848년 11월 20일경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서귀포시 영남동 마을터이다. 이 마을에는 19세기 중반 무렵 생활이 어려웠던 제주도 각지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기 시작한 이래 호수가 많을 때는 50여 호가 넘기도 했다.

주민들은 감자, 메밀, 콩, 산디(밭벼)를 주식으로 삼았고 목축을 하였으며 마을에는 서당이 있어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재수의 항쟁 등 여러 항쟁에 많은 주민들이 참여했고, 1918년 법정사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한 주민 6명이 일제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그 중 옥사한 김두삼(당 25세)은 독립 유공자로 추서되어 마을의 명예를 높여주고 있다.


4·3사건은 이 마을을 피해가지 않았다. 16가호의 주민 90여 명 중 피신하지 못한 50여 명이 희생되는 불운을 맞았다. 주위로 눈을 돌려 화전갈이 흔적이 뚜렷한 층계밭을 보라.

옛 우물터를 찾아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며 영남마을 주민들의 아팠던 삶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라. 이 곳에 밝은 햇살이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며 이 표석을 세운다.
2001년 4월 3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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