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기행4)'문신은 돈을 좋아하지 않고, 무신이 목숨을 아끼지 않으면 천하는 태평해진다'
상태바
(중국기행4)'문신은 돈을 좋아하지 않고, 무신이 목숨을 아끼지 않으면 천하는 태평해진다'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9.10.04 19: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흥사단 중국답사4)항저우는 자연경관 빼어난 문화예술의 보고..이곳에 세운 우리나라 임시정부

 

 

 


(답사4일차)중국판 러브스토리 ‘축영대와 양산백’의 사랑의 전설


축영대는 남장을 하고 남자만 다닐 수 있는 학교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양산백을 만난 축영대는 양산백을 좋아하게 된다.
양산백은 축영대를 남자로 알고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며 잘 지냈다.


 어느 날 축영대는 양산백에게 “자기 집에 오면 자기 동생을 소개시켜준다”며 집으로 초대한다.
양산백이 축영대의 집에 갔을 때 여자가 돼 나타난 축영대..
그때야 축영대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된 양산백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축영대의 아버지가 양산백에게 “자네 집은 어떤 집안인가?”하고 묻자 양산백은 “저희 집은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만 만약 축영대와 결혼을 시켜주시면 열심히 잘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러자 축영대의 아버지는 양산백에게 “자네 집안과 우리 집안은 차이가 너무나 커서 결혼을 시킬 수가 없다”고 선언한다.
집으로 돌아온 양산백은 급기야 상사병에 걸려 죽고 만다.


죽기전 양산백은 그의 어머니에게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거든 축영대의 집이 보이는 곳 동산에 묻어주세요..”


이후 양산백과 결혼하지 못한 축영대는 부모의 강권으로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됐는데..
집을 떠나 밖으로 나올 때 양산백의 묘 앞을 지나려고 하자 가마가 움직이지를 않았다.


축영대는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에게 “이곳에 내 친구의 묘가 있는데 마지막으로 인사라도 하고 돌아오겠다”고 말한다.
이왕 결혼하기로 한 남편은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승낙했다.


축영대가 양산백의 묘소앞에 이르자 묘지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축영대가 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사랑은 그렇게 완성됐다는 전설이다.

 

위 내용은 항저우 송성가무쇼에서 공연된다는 내용으로 알고 있었으나 우리가 공연을 보는 날에는 공연되지 않았다.

 

양산백과 축영대(梁山伯與祝英台)는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축영대(祝英台)와 양산백(梁山伯)의 슬픈 사랑이야기라고 한다.

전설의 이 사랑이야기는 중국의 4대 전설의 하나로 이름나 있다.


다음은 이들 사랑에 대한 전설을 소개한 내용이다.

세도가의 천방지축인 축영대(祝英台)를 시집보내기 위해 그녀의 부모는 남자만 학생으로 받는 서원에 축영대를 남자로 변장시켜 입학시킨다.


축영대는 그곳에서 운명적으로 양산백(梁山伯)을 만나 3년간 함께 공부하며 우정을 나눈다. 어느 날 축영대는 아버지의 급한 부름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양산백은 그녀가 떠날 때에야 축영대가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평생을 함께 할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축영대는 부모의 뜻대로 마원재에게 출가하게 되고 이를 알게 된 양산백은 병을 얻고 죽는다.
 혼례를 위해 마원재의 집으로 가던 중, 이 사실을 알게 된 축영대는 양산백의 무덤으로 다가가는데, 갑자기 양산백의 무덤이 갈라지며 축영대는 무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둘의 영혼은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항저우의 시후(西湖)의 창차오(長橋)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장교애련(長橋哀戀)이라고 한다. 이 다리는 연인이었던 축영대(祝英台)가 양산백(梁山伯)과 수없이 작별하던 곳이기도 하다.

양축설화는 중국의 민간설화로 당나라 중종(中宗, 683∼684) 때 양재언(梁裁言)이 저술한 십도사번지(十道四蕃志)에 처음 등장한다.
송대에는 장진(張津)이 저술한 건도사명도경(乾道四明圖經)에 등장한다.
한국에서도 조선시대 〈양산백전〉이라는 제목으로 소설화 되기도 했다.(위키백과)

 


항주의 대표적인 대형 가무공연 송성가무쇼

 

항주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한 일은 세계3대 쇼의 하나인 송성가무쇼를 감상하는 일이었다.


거대한 시설을 자랑하는 이 송성은 제주도에 만들어진 제주신화월드가 이를 모방한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다양한 볼꺼리를 제공했다.

송성은 남송시대 가장 번화했던 거리를 재현해 놓은 곳이라 많은 볼꺼리를 만들어놓았고 그안에 2500석의 큰 극장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공연은 하루에 1회만 한다고 하며 1시간 동안 관객을 사로잡았다
실로 다양한 음식물과 기념품들이 직접 공방에서 판매되고 있었고 길거리 공연도 오가는 사람들을 유혹했다.
엄청난 크기의 송성은 입구부터 거대하게 나타나 많은 볼꺼리를 제공하며 우리를 압도했다.

 

 

송성가무쇼가 공연되는 곳은 2500석을 갖춘 거대한 극장이었다.
이날 공연을 본 관람객은 3000여명 정도라고 했다.


모두 4부로 진행된 이 공연은 송나라와 항저우와 악비장군이야기와 백사전 등의 공연이 쉴새 없이 이어졌다.


폭포와 비는 직접 물이 관객을 향해 떨어졌고 관객석에서 배우가 등장하거나 관객석이 움직이며 다른 무대로 변하는  등 다양한 공연이 펼쳐져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중 한국에 관한 공연도 있었다.
여러 나라의 춤이 소개되는 중에 한국 장구춤과 부채춤 등이 공연됐는데 예전에는 한국무용공연 후 일본춤 공연이 이어졌으나 관객석의 반응이 싸늘해 지금은 인도춤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날 무대를 빛나게 한 공연은 단연 악비장군에 대한 전쟁이야기였다.
중국에서 악비장군은 이미 신적 존재로 자리잡은 관우장군과 함께 중국인들에게 가장 추앙받는 장군이라고 한다.

송성가무쇼는 그 이름에 걸맞게 화려한 공연을 통해 관객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다음은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장군인 악비장군에 대한 설명이다.

 

만고충신 악비(岳飛) 장군의 만강홍(滿江紅)  역사 에세이    

 

 악비(1103-1141년)는 남송시대의 장수로서 금나라에 대항하여 결사항전으로 나라를 지키려고 헌신했던 애국지사이다.

송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침공을 받고 무너졌는데 다시 남쪽으로 옮겨가 왕조의 명맥을 이어갔다. 그래서 전자를 북송이라 하고 후자를 남송이라 한다.

  악비는 중국에서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문신불애전 무신불석사 천하태평의(文臣不愛錢, 武臣不惜死, 天下太平矣)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그 뜻은 '문신은 돈을 좋아하지 않고 무신이 목숨을 아끼지 않으면 천하는 태평해진다'는 것이다.

이 말은 특히 공직자로서 어떤 몸가짐을 가지고 처신해야 하는지를 잘 지적하고 있어 현대에도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가 애국의 일념으로 노래한 시 만강홍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비분강개한 심경과 영웅적인 기개를 잘 표현한 명문장으로 평가받는다.

중국인들이 나라가 어려울 때면 으례히 떠올릴 만큼 민족적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는 시로서도 유명하다.

만강홍이란 물위에 떠다니는 수생 양치류에 속하는 물개구리밥을 가리키는 별칭이라고 한다.

가을이 되면 잎사귀가 붉은 색으로 변하여 주위의 물이 모두 붉게 보인다고 만강홍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만강홍은 어감이 아주 좋고 붉은 정서를 가득 불러일으키는 절묘한 말인 것 같다.


악비의 시 만강홍은 후인의 위작(僞作)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은 주장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악비의 애국심과 충절의 기개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청사에 빛나는 미담으로 계속 이어져갈 것이다.

 

怒髮衝冠 憑闌處 瀟瀟雨歇 擡望眼

仰天長嘯 壯懷激烈 三十功名塵與土

八千 里路雲和月 莫等閒 白了少年頭

空悲切 靖康恥 猶未雪 臣子恨 何時滅

駕長車踏破 賀蘭山缺 壯志飢餐胡虜肉

笑談渴飮匈奴血 待從頭 收拾舊山河 朝天闕

 

분노한 머리털 치솟아 관을 찌르는데

난간에 기대섰노라니 세찬 비도 그치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길게 휘파람부니

장렬한 마음 격렬하게 솟구친다

삼십에 세운 공명도 진토에 불과하고

팔천리 길 구름과 달빛처럼 흔적이 없네

더 기다릴 수 없는데 백발이 되니

부질없이 슬퍼하지 말아야 하네

정강의 치욕 아직 씻지 못했으니

이 신하의 한은 언제나 없어지려나

병거를 몰고 달려가서 깨부수리라

하란산의 관문을

장쾌히 오랑캐의 살로 주린 배를 채우고

담소하며 흉노의 피로 마른 목을 축이리

옛 산하를 모두 되찾은 후에

천자를 배알하리라

 

 

 만강홍을 읽다보면 조국 강토가 유린당한 것에 분노하고 국토를 반드시 되찾아 치욕을 씻겠다는 대장부의 결연한 기개와 감흥이 가득 느껴진다.

악비가 이 만강홍을 지었을 때가 38세 정도였다는데, 이미 10여년에 걸친 많은 전투를 치루며 승리를 거둔 백전노장으로 알려졌었다.

시에 언급되고 있는 삼십에 공명을 세우고 8천리 길을 달렸다는 내용이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강의 치욕은 금나라의 침공으로 송나라가 무너지고 황제를 비롯한 백성들이 3천명이나 포로로 끌려간 참변을 말한다.

악비는 송나라가 무너진 이 치욕의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반드시 금나라에 되갚겠다고 절치부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금나라에 위협받는 어려운 정국에서 금나라와 강화를 주장하는 주화파인 재상 진회에게 밀려서 참소를 당해 투옥되어 살해당하고 만다.

이때 나이가 39세였다고 하니 구국의 영웅이자 만고충신인 악비에게는 너무나 비극적이고 허망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그 뒤 악비는 무고함이 밝혀져 명예가 회복되고 후인들이 악왕묘와 충렬사를 세워 애국심과 충정을 기리게 되었다.

관우와 함께 무묘(武廟)에 합사(合祀)되기까지도 했다. 특히 중화민국 국부인 손문은 악비를 중국 민족의 수호신이라 극찬하며 추존했다고 한다.

 

 끝으로 악비의 기개와 의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제청니시사벽(題靑泥市寺壁, 청니시사 벽에 붙여)이라는 시를 소개한다.

이 시는 악비가 청니시의 사찰에 갔다가 끓어오르는 위국의 충절을 참지 못해 뜨겁게 토로한 것이다.

전공이나 벼슬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금나라를 쳐부수고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일념을 당당하게 노래하고 있다.

 

雄氣當當貫斗牛, 誓將眞節報君讐

斬除頑惡還車駕, 不問登壇萬戶候

대장부 기상 당당하여 북두견우성 꿰뚫어

맹세코 충절로 주군의 원수를 갚으리라

교활한 적을 쳐부수고 어가를 모셔올 뿐

만호후로 벼슬하는 따위는 관심 없도다.

 

[출처] 만고충신 악비(岳飛) 장군의 만강홍(滿江紅)|작성자 적선인(블로그 유위자연)

 

 

중국10대관광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항저우 서호

 


항저우에 도착한 후 다음날 오전에 찾은 곳은 항저우에서 가장 유명한 서호였다.

백거이 백낙천과 소동파가 이곳에 근무할 때 산책로를 만들었다고 하는 서호는 이번 중국 여행기간중 가장 아름답게 느낀 곳이었다.

이렇게 드넓은 호수가 있다는 것도 대단했지만 이 서호를 사랑하는 이 지역 사람들의 자부심도 컸다.

유람선을 타고 30여분을 이 호수를 도는데..
이 서호를 유람하는 유람선은 전기엔진만을 사용토록 함으로써 호수의 환경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름드리 늘어진 버드나무가 호수의 운치를 더하는 서호는 서태후가 “북경에도 이런 호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했다는 곳이라고 한다.

 

 

 

항주 서호

면적 5.66㎢, 둘레 15km, 평균수심 1.5m, 최대수심 2.8m이다. 중국 저장성 항저우시 서쪽에 있다.

한(漢)나라 때 밍성호[明聖湖]라고 불렀으나 당(唐)나라 때부터는 도시 서쪽에 있다고 하여 시호[西湖]라고 하였다.

원래는 항저우만[抗州灣]과 연결된 해만(海灣)이었으나 첸탕강[錢塘江]에서 흐르는 토사(土沙)에 의해 해만이 막혀서 된 석호(潟湖)이다.

호수 주위에 난고봉[南高峰]·베이고봉[北高峰]·위취안산[玉泉山] 등이 있으며, 남·북·서의 3면이 구릉으로 둘러싸이고, 호수 북쪽에 구산[孤山]이라고 부르는 작은 섬이 있다.

그 작은 섬에서 동쪽으로 백거이(白居易)가 축조했다고 전해지는 백제(白堤)가 뻗고, 또 호수 서쪽을 소동파(蘇東坡)가 축조했다고 전해지는 소제(蘇堤)가 남북으로 뻗어 현재 산책로가 되어 있는데, 이것에 의해 와이시호[外西湖]·리시호[里西湖]· 허우시호[后西湖]·샤오난호[小南湖]와 웨호[岳湖]로 구획된다.

호수에는 3개의 섬이 있는데, 샤오잉저우섬[小瀛洲島]이 제일 큰 섬이다. 그 섬에는 북송(北宋) 때 세운 좌표 3석탑인 싼탄인웨[三潭印月]가 있다.

현재 볼 수 있는 3석탑은 명(明)나라 때 재건된 탑이며, 탑과의 거리는 62m, 탑의 높이는 2m이다.

한편 호수 주변의 산중에는 송대(宋代)의 명장 악비(岳飛)의 묘소 및 링인사[靈隱寺]·톈주사[天竺寺]·류허탑[六和塔] 등 유서 깊은 명승고적이 산재한다.

 또 호수 안의 구산은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소장한 문란각(文瀾閣)이 있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호수 안에는 섬·제방과 연안의 구릉 및 명승고적이 있다.(출처 : doopedia)

 

항주에서 만난 김구 선생

우리는 김구선생 흉상이 있는 항주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했다.

이곳에 대한 안내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들이 맡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예전에 사용했던 태극기와 김구 선생 흉상과 마주 하며 모두 감회에 젖었다.


사무사, 독립만세, 踏雪夜中去 不須胡亂行 今朝我行跡 遂作後人程(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조아행적 수작후인정)休靜/李亮淵 등 3개의 김구 선생이 직접 썼다는 글씨가 전시돼 있었다.

 

항주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를 가다

임시정부는 1932년4월 홍구공원에서의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해를 떠나 항주로 왔다.

항주에서 활동기간은 1932년5월 부터   1935년11월까지이다. 항주로 이전한 이후 두번째로 사용된 임시정부청사가 바로 호변촌 23번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엔 군부장 김철이 머물던 곳을 청사로 사용하다가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옮길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  2007년11월30일 상해와 중경청사에 이어 세번째로 복원되어 개관됐다고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를 안내했던 원코리아투어 정윤승 대표는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신규식 선생의 덕”이라며 “신규식 선생이 아니었다면 임시정부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특히 여러번 강조했다.

"자금과 청사는 물론 모든 편의를 신규식 선생이 임시정부를 위해 제공했었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왜 그런 분이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인물로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문”이라고 전했다.

특히 정 대표는 "이곳 임시청사 지역은 서울의 강남같은 곳으로 주민들은 1백년도 더된  건물에서 불편하게 살고 있지만 이곳에 사는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와서 동네를 조금씩 더럽혀도 아무 말 없이 쓰레기를 치워주는 등 관대하게 늘 한국인들을 맞이해 준다"며 이곳 주민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해주기도 했다.

 

다음은 신규식 선생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이다.

 

申圭植(1879년 1월 13일 ~ 1922년 9월 25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호는 예관(睨觀), 일민(一民)이다. 1879년 충청도 청주목에서 태어났다.

1895년 서울로 유학하였다.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 육군 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뒤 임관되어 참위, 부위까지 진급하였다.

1905년 고향에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소식을 듣고 지방 진위대와 연락해 거사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다.

음독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목숨은 건졌고, 대신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이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등 애국 계몽 단체에 참가하였고 중동학교 등의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1909년에는 대종교에 귀의하였다.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 이 시기 쑨원과 쑹자오런, 천두슈, 친치메이 등 중국의 혁명가들과 교류하면서 중국동맹회에 가입, 한국인으로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여하였으며, 중국에서 줄곧 독립 운동을 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훗날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해 쑨원의 호법 정부와 그를 계승한 장제스의 국민당이 지지하게 된다. (친치메이는 장제스가 쑨원 다음으로 존경하는 혁명가이자 친구였다.)

군사 교육도 장려하여 한국 청년들을 중국 각지의 군사 학교에 입학시키기도 하였다. 독립 운동가 이범석을 손문에게 소개, 운남 육군 강무 학교에 입학시킨 것이 신규식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앞서 미국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이 14개조의 민족 자결주의를 발표한 이후 신한 청년당을 조직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11월에 법무 총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임시 정부의 내분으로 이승만에 대한 대통령 불신임안이 그의 불참 속에서 통과되었다. 이후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사위로 석린 민필호 선생 외손자로 민영주 지사로 알려져 있다.(나무위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주 청사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공원(上海 虹口公園) 투탄의거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자싱(嘉興)을 거쳐 저장(浙江)으로 들어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저우(杭州)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군무장 김철(金澈)이 머물던 청태 제2여사(靑泰 第2旅社)를 청사로 사용하다가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장생로(長生路) 호변촌(湖邊村) 23호에 청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곳을 청사로 사용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일제 측 자료를 통해 1935년 11월까지 사용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항저우시 정부는 2002년 호변촌 23호의 청사 건물의 복원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후 청사 복원을 위해 한국 독립기념관과 협조 체제를 갖추어 여러 해에 걸친 노력 끝에 2007년 정식으로 개관할 수 있었다.

2012년에 다시 한국 독립기념관과 협조하여 전시실 내용을 보완하고 그해 11월 재개관하였다.

 

2층 건물인 기념관은 1920년대에 건립된 건축물로 총면적은 423㎡이며, 이 중 전시실 면적은 340㎡이다. 기념관은 당시 거주했던 공간의 복원실과 세 개의 전시실로 나누어져 있다.

주거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1층에는 객청(客廳)과 주방이 있고, 2층에는 크고 작은 침실들이 있다. 큰 침실은 당시 서재로 쓰이기도 했다.

제1전시실에는 윤봉길의 의거 및 청사 이주 원인, 항저우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무실 및 거주지 사진(호변촌 23호, 청태 제2여사, 사흠방(四鑫坊), 제심리(齊心里), 오복리(五福里) 2가 2호 등지)과 활동, 국무위원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제2전시실에는 중국 관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주 노선과 각 지역에서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 사진들이 소개되어 있다.

제3전시실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국민당 정부와 저장성 주민들의 원조, 저장성 내의 한국 관련 사적지 관련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2012년 독립기념관의 대대적인 전시지원으로 전시 판넬을 새롭게 단장하고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2014년 중국의 '국가급 항전 시설 및 유적지'로 지정되었다. 2016년 전시를 일부 보완하고, 동영상을 새로 제작하여 제공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항주 한국독립당 사무소터(사흠방)
절강성 항주시 학사로 32호 근처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관계자를 중심으로 결성된 대표적인 독립운동정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은 1933년 말까지는 상하이(上海)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항저우(杭州)로 이동함에 따라 1934년 1월 항저우로 본부를 이전하였다.

이후 한국독립당은 기관지로 《진광(震光)》을 발행하는 한편 ‘항주구회’와 ‘항주특구회’ 등의 지부를 설치하고, 간부진에 대한 개편을 단행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다.


일제 측 정보 문서상에는 한국독립당의 항저우 사무소 주소가 세 군데로 나타나 있다. 학사로(學士路) 사흠방(思鑫坊) 34호, 40호, 41호가 그것이다.

2002년 4월 현지 조사 시 확인된 바에 따르면 학사로 사흠방 34호는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사흠방 40호는 현재 학사로 32호 근처의 보리사로 입구에 ‘사흠방’이라는 푯말이 있으며, 그 골목의 왼쪽 첫 번째 집이 바로 한국독립당 사무소로 추정된다.

지금은 옷을 만드는 집으로 사용 중이다. 현재의 학사로 40호는 예전에 완사로(浣紗路)였다고 한다.(제주흥사단 정리)


 답사팀은 서호유람후 상해임시정부 기념관과 윤봉길 의사 사당이 있는 마지막 목적지인 상해홍구공원(현재 노신공원)을 향해 무려 4시간을 달려 이동했다. 

 

 

 

 

 

 

 

 

 

 

 

 

 

 

 

 

 

 

 

 

 

 

 

(이 기사 계속 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