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개화당 조직..이도2동(구남동) 박영효적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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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개화당 조직..이도2동(구남동) 박영효적거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10.31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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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때는 독립운동을 관망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 3·1운동 후에는 초대 동아일보사장을 지냈다.

이도2동(구남동) 박영효적거터
 

위치 ; 제주시 이도 2동 761번지. 구남동 속칭 '거르송이'
유형 ; 위인선현유적
시대 ; 구한말(1907~1910년)

 

 

박영효(朴泳孝, 1861~1939)는 한말의 정치가로서 본관은 반남이며 자는 자순(子純)이다. 그리고 호는 춘고(春皐)·현현거사(玄玄居士)로서 초명은 무량(無量)이며 수원 출생이다.

판서 원양(元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13세 때인 1872년(고종 9) 4월 수원유수 신석희(申錫禧)의 천거와 우의정 박규수의 추천으로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하여 금릉위(錦陵尉)가 되고, 유대치(劉大致)를 중심으로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정치적 혁신을 주창하며,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는 데 주력했다.


즉, 1870년대 중반에 형 영교(泳敎)를 따라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개화사상가인 오경석·유대치·이동인 등을 만났다. 북학파 박지원의 저술을 통해 평등사상을 배우는 한편 오경석이 베이징[北京]에서 가지고 온〈해국도지 海國圖志〉·〈영화지략 瀛環志略〉 등 청나라의 개화서적을 돌려보면서 김옥균·서광범·홍영식 등과 함께 1870년대 후반에 개화당을 조직했다.


1878년 오위도총부도총관, 1879년 혜민서제조, 1880년에는 의금부판의금을 지냈다. 1882년(고종 19) 발생한 임오군란의 수습책으로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 이행을 위한 특명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부사 김만식, 종사관 서광범 등 수행원 14명, 비공식사절인 민영익·김옥균 등과 일본으로 갔다.

그의 임무는 군란에 대한 사과 국서를 전달하고 제물포조약의 비준 교환을 무사히 수행하는 것과 손해배상금 50만 원 지불방법의 완화를 교섭하는 것이었다.


일본으로 가는 도중 배안에서 태극팔괘(太極八卦)의 도안을 기초로 처음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박영효 일행은 일본 체류기간 동안 일본 조야(朝野)의 유력한 인사는 물론 영국·미국·독일 등 구미의 외교사절과도 접촉해 세계대세와 국제관계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한편, 병사(兵事)·재무(財務)·흥산(興産) 등의 개화상황을 시찰하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이에 김옥균·서광범 등과 의논한 후에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 신학문을 배우게 해 인재를 양성하고, 조선의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차관교섭을 추진하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지원을 받아 신문을 발행할 것을 계획했다. 그해 11월 다른 동지들은 남겨두고 홀로 귀국했다. 그가 없는 동안 정부는 친청사대(親淸事大)의 민씨일족이 장악하고 있었고, 박영효는 12월 대신직에서 제외되어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때마침 일본도 1882년 이래의 청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를 확보할 계획 아래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일본공사를 통해 지원을 약속했다.

신내각이 조직될 때 친군전후영사겸좌포장(親軍前後營使兼左捕將)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삼일천하(三日天下)로 그쳐,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잠시 도미(渡美)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야마자키[山崎永春]로 개명하고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입학, 영어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1888년(고종 25) 초 국정 전반에 걸친 장문의 개혁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이른바 '건백서'(建白書)라 불리는 것으로 봉건적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고 있다.


1892년 박영효를 암살하기 위해 본국으로부터 이일직(李逸稙)·권동수(勸東壽)·권재수(勸在壽) 등이 자객으로 파견되었으나 미수에 그쳤다. 1893년 후쿠자와 등 일본 유력 인사들의 협조를 얻어 교포학생 교육을 목표로 도쿄에 유학생들의 기숙사로서 친린의숙(親隣義塾)을 경영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죄가 용서되어 귀국,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에서 김홍집 ·박영효의 연립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내무대신으로 있으면서 자주적 개혁을 꾀하였으나 김홍집과 심한 갈등을 계속하다가 김홍집을 실각시킨 뒤 자신이 총리대신서리가 되었다. 곧이어 개각에서 실권을 장악한 뒤 약 200여 일 동안 을미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행정·군사·교육 면에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하여 나라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일본식보다도 오히려 구미식의 채택을 주장했다.


이무렵 삼국간섭으로 일본세력이 퇴조하자 조선정부는 친러시아 정책을 폈다. 불안을 느낀 박영효는 왕실과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훈련대로 하여금 왕실을 호위하게 했으나 고종에 의해 거절되고, 1895년 7월 왕비시해음모죄로 궁지에 몰리자 신응희(申應熙)·이규완(李圭完)·우범선(禹範善) 등 일행 20여 명과 함께 일본으로 2차 망명의 길을 떠났다.


1898년 12월 16일 중추원 회의에서 그를 정부요직에 다시 기용하자는 건의가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컸고 이런 움직임을 반대파에서는 박영효 대통령설을 유포시켜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 데 이용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정치적 변동은 친일 세력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900년(광무 7) 7월에 고베[紳戶]에서 이승린(李承麟)·이조현(李祖鉉)·김창한(金彰漢) 등을 불러모으고 망명중인 동지를 규합해 정부를 전복하고 의화군(義和君) 강(堈)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다.


그리고 한규설과 윤석준(尹錫準)에게 자금조달을 부탁할 목적으로 그해 11월 극비리에 이승린과 이조현을 조선에 파견했지만 발각되어 그의 정계복귀공작은 수포로 돌아가고,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1907년 6월 초순 비공식으로 귀국해 부산에 머무르고 있다가 6월 7일에 서울로 올라가 궁내부고문 가토[加藤增雄]와 접촉하고 6월 13일 고종의 특사조칙(特赦詔勅)을 받았다. 7월에 궁내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헤이그 밀사사건 후에 벌어진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고종 양위압력을 무마시키려다 실패했다. 순종 즉위 후 군부 내의 반양위파(反讓位派)와 공모해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제주도에 1년간 유배되었다.


유배 후 상경이 금지되어 마산에 머물러 있다가 국권피탈을 맞았다.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한국인 회유정책으로 주어진 후작(侯爵)을 받았으며 1911년에는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사람으로 조직된 조선귀족회 회장으로, 1918년에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이사에 취임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 사장, 1926년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 부의장에 있을 때 죽었다. 저서에 《사화기략(使和記略)》이 있다.(http://kdaq.empas.com/엠파스실시간지식) 이상의 경력을 보면 평생을 친일파로서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살던 서울 중구 필동2가 84-1번지 가옥 '駙馬都尉朴泳孝家屋'은 서울 8대가(八大家)의 하나로 이름이 났었으며 서울민속자료 제18호(1977년 3월 17일 지정)로 지정되었다.


구남동의 이전 이름은 ‘거르송이’라 한다. ‘박영효가 걸어서 올라온 마을’이라는 뜻이다. 박영효 대신이 제주에 들어올 적에 부두에서 내려 살 터전을 찾아 이리 올라 오는데, 지금 시청 자리에서 앉아 쉬었다.

한참을 쉬고 나니 풍수지리를 볼 줄 아는 부하들이 많이 따라왔는데, 말하기를 “대신님, 자리는 여기가 더 좋은데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라고 물으니, 박영효가 한참을 살펴보더니, “이곳은 우리가 있을 만한 곳이 못된다. 나는 피난살이로 쫓겨 온 몸인데 이 만한 자리에 살게 되면 내가 오래 살지 못한다. 우리보다는 더 큰 사람이 거주할 곳이다. 여기는 안 된다”라고 하고 남쪽으로 한참을 걸어 이 구남동에 왔다.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 이렇게 묻자 “걸어서 얼만큼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곳에서 살 만한 자리를 찾자하고 머물러 살았다. 때문에 ‘걸어서 어느 만큼 온’ 데 머물러 마을을 이루었으니 ‘걸어승이’라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이 마을 이름은 ‘거르송이’, ‘거르승이’가 되었다. 박영효는 이곳 ‘거르송이’에 와서 이만하면 전망이 괜찮다고 하고 자리를 정하여 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은 허허벌판이요 불모지였다. 박영효는 땅을 개간하고 나무를 심었다.

박영효의 집터에는 최근까지 기와 파편들이 나왔다. 파편을 보면, 통기와집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일백, 녹나무 등 많은 나무들을 심었기 때문에 이 주위는 아름드리나무로 울창한 수림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다 베어 버려 없어졌다.


한편 이와는 다른 주장으로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조천초등학교 편에 따르면 박영효는 제주에 유배와서 처음에는 조천리 김희주의 집에서 지내다가 구남동으로 옮겼다고 한다.

감금생활이 풀린 뒤에도 박영효는 이곳 '독지골'에 과원을 조성하여 주민들에게 원예작물재배를 권장하고 근대교육과 근대사상교육에 힘쓰다가 1910년 6월에 제주를 떠났다.

현재 제주도 감귤의 주종을 이루는 품종인 溫州蜜柑은 구한말 일본에 건너가 있던 박영효가 가지고 와서 제주시 구남천에 심은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는 제주도 기후가 일본과 흡사하다는 데서 도민에게 원예작물을 보급한 것이다. 개량 감귤을 비롯해 토마토, 가지, 감, 비파, 대추, 석류, 양배추, 양파, 무, 당근 등의 재배와 보급에 힘을 기울인 것도 바로 이 시기다. 그는 개량 감귤을 제주시 구남천(구남동)에 심었으나 그가 제주를 떠난 후에는 점차 자취를 감춰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은 한 그루도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한라일보 2007년 1월 1일)


그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조천리에 적거중인 남강 이승훈과 교류하였고, 제주 사람 홍종시, 최원순(초대 교육감 최정숙의 부친) 등과 교분을 맺어 개화사상을 전하기도 하였다.(제주도의 문화유산 83∼84쪽)


박영효는 지방 유림들과도 교류하여 근대적인 교육기관 설립과 교회선교활동을 적극 지원하기도 했다. 1907년 윤원구 제주군수가 최초의 사립의신학교 설립을 추진하자 거금을 쾌척해 신학문 도입에 앞장섰다.

1908년에는 기독교가 제주에 처음으로 전파되면서 도민들이 이재수 난의 영향으로 서양종교를 배척하자 ‘기독교는 정부에서 공인한 세계적 종교’라고 설유함은 물론 도내 첫 기독교회인 성내(성안)교회 설립에도 거금 1백만 원을 기탁하였다.


박영효가 유배되었을 때 천주교 제주도 첫 신부인 라쿠르(구마슬) 신부는 제주도에 학교를 설립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박영효는 이것을 현실화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줌으로써 제주도 최초의 여성근대학교인 신성여학교의 개교에 큰 역할을 하였다.

박영효의 도움에 대해 라쿠르 신부는 뮈텔(문덕효)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관대한 한 분의 자발적인 협력 덕분에 제주에 여학교 설립의 가능성은 더 이상 공상이 아닙니다.'라 하였고 1909년 보고서에서도 '그는 선왕의 사위이자 전 영의정으로 정사에 진저리가 나서 스스로 이 섬에 은퇴하여 자기 나름대로 선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썼다.(양진건, 그 섬에 유배된 사람들. 228~230쪽)


박영효는 3년 동안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매우 고급스럽게 지냈다. 제주시 외도동에는 수백 년 된 해송과 팽나무 고목들이 우거진 외도천이 있다. 이곳은 제주도에서는 드물게 사철 냇물이 흘러 옛 선인들은 풍류를 즐기기 위해 반석을 놓아 월대(月臺)를 만들었다. 박영효는 기망(旣望=음력 16일)이면 이곳에서 시회를 열어 제주의 명사들과 어울려 시도 짓고 은어회를 즐겼다.


도민의 계도에 뜻을 뒀던 그는 찾아오는 지방 선비들과 이웃들을 물리치지 않고 만나 나라와 민족의 살 길은 오직 자주독립에 있음을 역설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근대사상을 강론하면서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 낡은 제도와 인습 등의 저해요소를 타파해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또한 틈나는 대로 지방의 어린 아이들을 모아 놓고 교육을 시키기도 하면서 전근대적 의식구조가 지배하던 제주사회에 새로운 문명과 사상을 불어넣어 제주도의 근대화를 일궈냈다.


이때 그의 주변에 모인 인물로는 해미현감을 지낸 김응전과 제주판관을 지낸 김응빈 형제, 제주항공의 모기업인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의 시아버지이면서 이재수난 때 대정군수를 역임한 채구석, 구한말 제주 최고의 부호로 대정군수 재임 때 진휼미 100석을 내놓았던 송두옥, 제주향교의 도훈장(都訓長)으로 서화에 뛰어나 추사 유배지의 추사김선생적려유허비(秋史金先生謫廬遺墟碑)를 쓴 홍종시, 한말 의병장 기우만의 문하생으로 을사늑약 이후 기우만의 구국 격문을 몰래 가지고 제주에 귀향한 안병택 등이 있다.

박영효는 1년간의 감금생활이 끝났지만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제주에 머물렀다. 왕의 부마였으면서 개화파의 거두인 박영효가 서울에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자 중앙 신문에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보도되기도 했다. 황성신문은 1908년 8월 9일자에 "박영효씨가 해배 후에도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봄에 개간한 과수원을 돌보기 위해 연말까지 머물 예정"이라고 소식을 전했다. 심지어 이후에는 "제주 체류 중인 박영효씨가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목포로 출발했다"거나 "제주도 체류 박영효가 마산을 거쳐 입경했다는 등 풍설이 있다"고 세간의 소문을 전하기까지 했다.


어느 날 박영효는 제주 부인의 절친한 친구인 윤씨 부인의 4남 고자환(高子煥·1900~1977)을 양자로 삼았다. 제주 부인의 청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당시 어린 소년인 고자환이 양자로 가던 날은 박영효 집의 집사와 노비들이 와서 윤씨 부인과 아들을 데려갔다. 그 후 고자환은 독짓골에서 살며 박영효와 제주 부인을 친부모처럼 모시고 살았다. '빙벽'과 '최후의 계엄령', '대한제국 일본 침략사' 등 권력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드러내는 소설로 유명한 제주 출신 소설가 고원정씨가 바로 고자환의 손자다.


틈나는 대로 지방의 어린 자녀들을 모아놓고 교육을 시키기도 했던 박영효는 서울로 떠나면서 고자환을 데리고 갔다. 고자환은 서울에서 경성고보를 졸업한 후 제주로 돌아와 결혼하고 교직에 있다가 퇴임했다. 고자환이 성인이 되어 제주에서 결혼하면서 박영효와는 소원하게 됐다. 제주 부인과의 인연도 자연스럽게 엷어졌을 것이다. 고자환 댁에는 박영효가 써준 친필액자와 상경하라는 내용의 편지가 남아 있다. 액자와 편지는 고자환의 손자 고원정씨가 소장하고 있다.


그가 제주에서 고자환을 양자로 삼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함께 살았던 여인에 대한 배려였던 것으로 보인다. 함께 사는 사랑스런 여인이 아끼고 추천하는 소년이기에 양자(養子) 형식으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박영효의 가문인 반남(潘南) 박씨(朴氏)가 아닌 제주 고씨의 자식을 우리나라 호적법상 정식 양자로 입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박영효에게는 영교(泳敎), 영호(泳好)라는 두 형님이 엄연히 계셨고 양자를 삼을 만한 조카들도 있었다. 고자환의 부모도 이런 점 정도는 알고 응했을 것이다. 고자환을 서울로 데려가 교육의 혜택을 베푼 것으로 둘 사이의 양자관계는 이미 끝나버린 것이었을까. 그러나 그 후 독짓골 과수원의 양어머니에 대한 고자환의 태도는 어떠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제주를 떠난 후 그는 시종일관 친일의 길을 걸었다. 한일강제병합 후 1910년 일본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1926년에는 중추원 의장을 역임했다. 3·1운동 때는 독립운동을 관망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 3·1운동 후에는 초대 동아일보사장을 지냈다. 그는 1939년 서울 숭인동 자택에서 79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하직한다.(한라일보 ‘제주유배인과 여인들’)
《작성 080528, 보완 150902, 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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