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애월 마을 서쪽 갯가..애월리 배무숭이소금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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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애월 마을 서쪽 갯가..애월리 배무숭이소금밭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12.06 0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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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멩이를 까고 그 위에 모래를 깔아 모래소금밭을 만들었다

애월리 배무숭이소금밭

(1) 위치 ; 애월초등학교에서 곽지쪽으로 3분정도 가다보면 토비스콘도 가기전 신설동 입구에서 약 300m
(2) 시대 ; 조선시대
(3) 유형 ; 소금밭

 

 


애월 마을 서쪽 갯가 중 ‘진여’와 ‘애월코지’ 사이에 있으며 바로 아래쪽에 ‘배무숭이원’ 도 있다. 사리 썰물 때만 바닷물이 미치는 곳이다.

그 때 바닷물이 들어오는 물길이 소금밭 한가운데로 나 있다. 물길 따라 밀려든 바닷물은 물통에 모여들어 고인다. 물통 주위로 40평 안팎으로 여덟 개(한라일보120704에는 15개라고)의 소금밭이 있다.


소금밭마다 돌담으로 둘러 경계를 삼았다. 소금밭 바닥은 방돌을 놓듯이 평평하게 다져놓고, 그 위에 모래를 깔아 덮어 소금밭을 만든 흔적이 뚜렷하다.

굳이 이렇게 만든 것은 소금밭을 높여 바닷물통을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곤물’이 흘러내리기 좋게 물골을 쪼아 만들기도 했다.

돌멩이를 까고 그 위에 모래를 깔아 모래소금밭을 만들었다는 점이 돋보인다.


「韓國水産誌」에서는 이 마을에 334평의 소금밭이 있는데 1년에 1670근( 1근은 600g 약 1002㎏)의 소금이 나온다고 했다. (북제주군의 문화유적 Ⅱ)


2007년 11월 25일 만난 양병연 할아버지(82세)에 의하면 1948년 4·3사건으로 광령리에서 소개 올 당시에도 각각 소금밭에 소금을 생산하는 솥들을 볼 수 있었다고 했으며 ‘한담 홍서방’이라는 사람의 개인소유였고(지금은 확인 못함) 1940년대까지 소금을 내다 팔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소금이 육지에서 들어오면서 다른 소금밭들처럼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강성기씨 자료 전재)


“모래에 바닷물을 여러 차례 부어말리기를 며칠 동안 계속하면 모래에 소금꽃이 피었다. 이것을 움푹하고 널찍한 돌 위에 얹어 놓아 짠물을 빼내고 허벅으로 짠물을 받아 집으로 가져가 가마솥에서 졸이면 소금이 만들어졌다. 짠물을 그대로 물소금으로 간장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소금물을 가마솥에 끓여 소금을 만드는 방법을 자염(煮鹽)이라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천일염이 보급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전통적인 소금제조법이었다.”(한라일보120704 진관훈)
《작성 080629, 보완 1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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