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유배온 후 제주 정착..고산2리 고부이씨입도조(이세번)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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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유배온 후 제주 정착..고산2리 고부이씨입도조(이세번)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12.17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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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 때문에 신도포구로 들어오면서 대정에서 유배생활..사망후 식구들 모두 제주 내려와

고산2리 고부이씨입도조(이세번)묘
 

위치 ; 한경면 고산2리 신물동네
시대 ; 조선
유형 ; 무덤

 

 



이세번(李世蕃)은 고부이씨 입도조이다. 묘역은 넓은데 혼자 쓸쓸히 누워 있다. 부인의 묘는 회수동에 있다는 설이 있다. 이세번은 신도포구(둔포)로 내려서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돌아가시고 자식이나 부인이 모두 제주에 남아 있었다.


기묘사화 이후에도 신진 사림들이 억울하게 투옥되자, 당시 의금부도사(義禁莩事) 이세번은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광화문 밖에 모여 연일 조광조 등이 무죄임을 변호하는 데 앞장섰다가 체포되어 국문 끝에 제주로 유배되었다.


유배인들이 제주도로 들어오는 길목은 대부분 조천이나 화북이었는데 이세번의 경우는 풍랑 때문에 신도포구로 들어오면서 대정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학자였으므로 유배오면서 경서 등 많은 책을 가지고 와서 독서와 한학으로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그러면서 지방 자제들에게 학문과 예절을 가르쳤다. 그러나 귀양살이의 고독과 인생의 덧없음, 고향에 대한 향수, 권력의 무상함 등은 항상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였다.

유배온 지 7년만인 1526년(중종 21년) 적소에서 병사하니 그의 나이 44세였다. 아들 이충현은 부친의 유언에 따라 고산리에 안장하니 지방민들이 줄을 이었다. 이충현은 15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 유생으로 수학중이었지만 부친을 돌보기 위해 같이 따라왔었다.


한편 그의 부인 석씨(황씨?; 양진건 저, 그 섬에 유배된 사람들)는 남편이 유배된 뒤로는 잠을 잘 때 이불을 덮지 않았고 추워도 속옷을 입지 않았으며 사람을 시켜 안부를 묻게 하고 밤마다 사면되어 돌아오기를 기원하였다.

남편이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적소로 내려왔으며 남편을 애도하던 그녀는 결국 깊은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두 아들은 모친을 장사지내고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학문에 정진하고 지방 자제들을 훈학하였다.

이세번이 사망한 후 식구들이 아예 제주도에 정착함으로써 결국 이세번은 고부 이씨(古阜 李氏) 벽동공파 제주 입도조가 된다.(증보 제주통사 P134)


인종대에 들어 이세번은 조광조, 김정 등과 함께 복권되고 특히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 유생으로 수학중이던 아들 이충현이 제주 교수로 천거되었고 후손들은 대대로 대정 향교의 훈도를 역임하였다.(양진건 저, 그 섬에 유배된 사람들)


이재수의 난의 이재수도 이세번의 12대 후손이며 김달삼이라는 이름으로 제주 4,3의 좌익계 거물로 활동했던 이승진도 그의 후손이다.


참고: 부인 성씨가 석씨인 것 같음. 회수동에 석굴왓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그 곳에 고부이씨 입도조모인 월성 석씨의 묘가 있어서 이런 지명이 생겼다고 함.

이세번의 호는 백산(白山) 본관은 고부이다. 이세번에 대한 기록은 극히 미미하고 저서도 전해 오는 게 없어 정확한 행적은 알기 어렵다.

다만, 학포집-기묘당금록에 기묘사화에 연루된 131명 가운데 이세번에 대해서 '이세번 의금부도사에서 파직되었다'(李世蕃 珥事罷斥)는 간략한 기록만 보인다.

또 작자 미상의 기묘록속집-별과시천거인-경외관동천인 78명 가운데 이세번에 대한 기록은 '전 도사 이세번은 학식과 지조가 있었다'(前都事李世蕃有學文操守)라고 했다.

은봉전서-기묘유적에는 도사 이세번은 보외(補外) 즉 좌천된 사람으로 기록했다. 김봉현의 제주유인전(濟州流人傳)에는 이세번에 대해 조광조와 더불어 김굉필의 문인으로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경서와 史書에 투철했다.

1514년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기묘사화 이듬해인 중종15년(1520)에 장을 맞고 제주 대정현 둔개(신도리)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그 후 병상에 눕게 되어 중종21년(1526)에 타계했다.


1962년 월성 김종가가 쓴 都事公行狀에 의하면 이세번은 어릴 때부터 매우 특이하여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모시면서 훈계를 들어도 기뻐했고 배움에 게을리 하지 않아 스스로 일과에 부지런했다고 한다. 17~18세에 道에 뜻을 두어 '하늘이 나를 미물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나게 했고 그것도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나게 한 것이 행복이다'고 감사하게 생각했다.


이세번은 조광조와 친분이 두터웠는데 사화가 일어나자 성균관 유생 李若水 등 수백인과 함께 문을 박차고 나아가 상소를 올리면서 조광조의 무고함을 호소했다. 사람드리 그런 이세번에게 신변의 위태로움을 알리자 ' 군자는 禍도 같이 하고 福은 오래 전에 선택되었다'고 웃으면서 답했다고 한다.(제민일보 2011년 7월 2일 김유정 글)

지난 2000년 통계청의 인구 통계조사에 따르면 제주지역에 거주하는 고부이씨는 2379가구, 7577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유배인 이세번의 후손들은 대정지역을 중심으로 제주역사를 움직이는 큰 역할을 맡는 인물들을 배출한다.


이재수의 난의 장두 이재수(이세번의 12대손), 근대사학을 태동시킨 이재교(12대손), 제주 4·3사건 당시 무장대 총책으로 김달삼이란 별명으로 활약하던 이승진(14대손)이 모두 이세번의 후손이다.


이재수의 난은 1901년 천주교의 교세 확장에 따른 폐단과 정부의 조세 수탈 등에 저항한 민란이다. 대정에 사설 상무사가 조직된다. 이어 중앙의 조세 수탈에 저항한 민회가 열려 민란이 시작됐다. 민군은 황사평에 주둔해 제주성을 노리다 제주성내 주민들이 성문을 열어주자 제주성을 장악, 관덕정 앞에서 천주교도들을 대량 학살한다.

이로 인해 정부 진압군, 프랑스 함대 등이 제주에 왔으며 정부 진압군은 민군의 장두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을 서울로 압송한다. 이들은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삼의사비가 대정 추사관 인근에 세워져 있다.


이재교는 대정 유림의 대표로서 지난 1908년 중문에 근대 교육기관인 개성학교(개성학사)를 설립한 인물이다. 이재교는 최근 대정초등학교총동창회가 발간한 「대정교 100년사」에서 대정초의 전신인 사립 한일학교 설립자로 잠정결론 내려져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대정역사문화연구회는 이재교는 대정초등학교의 설립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정황을 미루어 보면 이재교는 대정초학교 개교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승진은 제주4·3사건 당시 대정중학교 사회담당 교사로서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다가 김달삼이란 이름으로 무장대 총책을 맡은 제주4·3사건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이승진의 장인은 좌익계 거물 강문석이었다.

강문석은 조선조 현종시대(1840) 대정에 유배왔던 추사 김정희와 연관이 돼 있다. 강문석의 증조부 강도순은 김정희의 두번째 적거지의 주인으로 김정희에게 글과 글씨를 배웠던 인물이다.(제민일보 2010년 10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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