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총길이 3,465m..화순리 마을성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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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총길이 3,465m..화순리 마을성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2.10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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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0m 정도가 남아 있는 성벽..집 주인은 성담 헐지 않고 잘 보호한다고 한다

화순리 마을성담

 

위치 ; 안덕면 화순리 1053-34, 1053-35, 1053-69번지의 북쪽 울타리. 화순리 농협주유소 서쪽 100여m 팽나무와 후박나무· 방애돌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서 '포그니민박' 북쪽 집 울타리
유형 ; 방어유적(성)
시대 ; 대한민국

 

 


화순리는 안덕면사무소가 있는 안덕면의 중심마을이고, 4·3 당시에는 한때 안덕지서를 중심으로 철도경찰과 서북청년회가 주둔하기도 했으며, 1948년 5월 24일에는 무장대가 안덕면사무소를 기습하여 호적부를 탈취하고 면사무소를 전소시킨 일(1차습격)이 있었다. 이 때 인명피해는 없었다.


1948년 11월께에는 민간인들로 구성된 특공대원 100여명이 안덕국민학교에 주둔하는 등 화순리는 안덕면 토벌대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다. 또한 중산간마을에서 소개된 주민들이 모여드는 마을이기도 하였다.


제주도경비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1948년 10월에 노인과 부녀자는 물론 어린 아동까지 동원하여 마을방어성담을 쌓았다. 청장년은 토벌대에서 이미 차출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제외하여 세대별로 노역이 가능한 15세 이상의 주민을 총동원하여 남자들은 주로 성을 쌓는 일과 돌을 지워주는 일을 맡았고 여자들은 돌을 등에 지고 운반하는 일을 맡았다.

매일같이 안덕지서로부터 축성 할당량을 지시받아 그들의 감독 아래 노역을 했다. 심지어 부인들은 애기구덕을 옆에 두고 돌 운반 작업을 할 정도였다.


청장년들은 자경대(自警隊, 단장 김태욱)에 소속되었다. 대한청년회의 양문화, 지동수를 주축으로 관내 청장년들을 뽑아 주간에는 마을 외곽 경비와 함께 전화선로 순찰에 나섰으며 야간에는 망루 경비를 하였다.

또한 주야 순번으로 성문에서 통행인을 검색하였다. 나중에는 자경대는 해체되고 민보단(民保團)이 조직되었다. 단장은 장행규, 이응매, 양승교로 이어졌으며 임무는 자경대와 같았다. 본부는 초등학교 앞 하성용 가옥, 다음에는 고완일 가옥으로 옮겼다.

특히 경찰 직속으로 특공대(대장 김춘생, 성대년, 임세화 등)가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일본군이 두고 간 철창과 자체 제작한 죽창을 무기로 휴대하여 독자적인 경비 임무를 맡았다. 경비 순번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신변보호를 위하여 안덕지서에서 단체로 합숙하였다.(和順里誌)


2달에 걸쳐 완성한 성은 현 취락구조개선마을 입구에서 안덕초등학교 뒤로 가원동을 거쳐 엉은동까지 이어졌다. 높이는 350㎝, 폭은 250㎝였다. 1차는 내성으로 10월 안에 2,473m를 마쳤으며, 2차는 1948년 11월 5일 무장대가 화순리를 기습(2차습격)한 후인 12월에 시작하여 그 달 안에 '골물' 외성으로 992m를 마쳤다. 총길이는 3,465m였다.


출입문은 7곳에 두었는데 화순리 1366-1번지 남면 충혼비 자리에 동문, 1053-3번지 북면 도로에 서문, 1154-1번지 서면 도로에 북문을 설치하였다가 2차 외성 축성 후에는 이를 폐쇄하고 1154-1번지 도로에 북동문을 설치하였다.

1710번지 서면 삼거리 도로에 북서문, 1817번지 남면 도로에 서남문, 1799-3번지 북면 도로에 서중문을 설치하였다. 또한 망루가 10곳, 외곽경비초소가 34곳이 설치되었다. 마을의 남동쪽에는 성을 쌓지 않았는데 이는 일주도로가 통과하는 곳이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개삑데기(충혼비 있던 곳)·진ᄆᆞ르동산(한전아파트 자리)·ᄎᆞ남동산(동취락구조마을 뒤)에는 외곽경비초소가 설치되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성은 대체로 동남동에서 서북서 방향으로 뻗어 있는데 안쪽이 낮고 바깥쪽이 높은 지형이라 방어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약 50m 정도가 남아 있는 성벽의 안쪽에는 높이가 일정하지 않으나 회곽도의 흔적으로 보이는 구조가 남아 있다. 2008년 10월 답사 때에 만난 집 주인은 성담을 헐지 않고 잘 보호한다고 하였다.


화순리의 인명 피해는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1948년(날짜 미상)에 무장대 출현 급보를 받고 출동중이던 대정지서 경찰에 의해 보초를 서던 주민 3명이 오인사격을 받아 1명 사망, 1명 중상, 1명 정신질환에 시달렸다고 한다.

진상조사보고서에 제시된 일지에 보면 1949년 5월 26일 바닷가에서 은신생활을 하다 발각되어 1명은 사살, 2명은 형무소로 보내졌는데 한국전쟁 발발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1950년 4월 24일에는 보초를 서던 주민이 술취한 채 이동하던 대정지서 경찰토벌대에게 학살되었다고 한다.(주민들에 의하면 위 사건과 날짜가 바뀌었다는 주장이 있음)

1950년 예비검속에는 안덕초등학교장 吳東乾, 안덕국민학교 교사 金龍準, 안덕고등공민학교 교사 李允燦, 안덕면사무소 직원 梁德弼·吳亨澤이 희생되었다. 화순리에서는 4·3 기간 중 1948∼1949년에 부녀부(회장 吳泰貞)가 토벌대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어려움을 당하였다.


한편, 1949년 1월 29일에는 무장대 토벌에 나섰던 2연대 1대대 병력이 덕수리에서 화순리로 들어오는 입구인 속칭 개삑데기에서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6명이 전사하였다.(和順里誌)
《작성 081015, 보완 19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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