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관아의 주요 물품 보관하는 건물 추정.. 삼도2동 총물당(멸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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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관아의 주요 물품 보관하는 건물 추정.. 삼도2동 총물당(멸실)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4.26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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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물당(摠物堂)은 제주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면서 교사(校舍)로 이용

삼도2동 총물당(멸실)터

 

총물당개건기(김영업).

 

삼도1동_총물당터

 

摠物堂址
•위치 ; 삼도2동 108-14. 현 인천문화당 자리
•시대 ; 조선
•유형 ; 관아

 


총물당(摠物堂)은 공물이나 제기 등 관아의 주요 물품들을 보관하는 건물로 추정된다.

언제 창건하였는지는 미상이나 헌종원년(1835)5월 총물당을 개건한 김영업의 총물당개건기를 읽어 보면 읍을 설치할 때 창건하였다 했으므로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을 설치한 태종16년(1416) 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성사 숭보당에 총물당개건기가 걸려 있다.

해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摠物堂改建記〉집의 이름을 총물당이라 한 것이 어찌 우연히 그렇게 이름을 지었겠는가?

달마다 방물을 광주리에 담아 공납하고 봄과 가을 각 제향에 제물들을 때 맞추어 미리 주랑(周廊)에 옮겨 저장하고 협고(夾庫)에는 장석(匠石)이 거처하며 외양간에 있는 말을 당예들이 돌아가면서 지켜서 바치고 제향을 받든 날을 당하면 여러 가지 필요한 물건을 헤아려 중당(中堂)에 나열하거나 주머니에 봉하여 그때그때 변통하여 쓰는 군색함이 정사에 관계된 바가 어떠한가?

대개 이 집은 읍을 설치할 때 창건되어서 400여년에 이르는 동안 고치고 개축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닐 테지만 문헌으로 증거할 수 없으니 애석하다.

지난 嘉慶 己未년(정조23,1799)에 이종번 통판이 정당에 비 새는 곳을 고쳤으나 창고의 터가 반이나 채전밭이 되었고 정당 역시 기둥이 흔들리고 서까래가 썩어서 오른쪽을 받치면 왼쪽에선 뚝뚝 소리가 난다.

아침 저녁 책궤를 옮겨도 그것을 가릴 만한 곳이 없다. 공인들은 일정한 일할 자리가 없고 모든 하인들은 여염집에 흩어져 있으니 다만 관정의 위엄이 손상되고 고을의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은 그만두고라도 공물을 바치는 의식과 제사하는 절차에 이르러서는 공경함에 흠 됨이 더할 수 없다.

내가 작년 봄에 백부(柏府=사헌부)의 묵은 벼슬아치로 외람되게 천은을 입고 해뜨는 고향에 돌아와 자그마한 보답이라도 하려 하나 관부의 폐단이 생겨도 폐막을 소생시킬 생각을 아직 감히 내지 못하고 헛되이 하급 관리의 무능함을 한탄하다가 돌이켜 생각해 보니 공해(公廨)를 개수하는 것도 봉공하는 한 방법이므로 즉시 이 집(총물당)부터 시작하려고 계획하고 보니 일은 크고 힘은 부족한데 세금을 거둬들인 뒤여서 백성을 동원할 때가 아님이 무척 염려되었다.

다행히 우리의 사상 박공이 이 고을을 안절(按節)하러 와서 통달한 정사로 사람들을 화합시켰는데 곡식도 잘 영글었으므로 승후에 參班한 때에 중창할 뜻을 대략 여러 번 건의하니 특별히 허락하면서 “이(총물당)는 보통 공해와 달라 다른 영읍의 공해와 견줄 바가 아니므로 힘을 합하여 성사하라.”고 말하므로 각면 각리에 명령하여 재목을 베어 모으고 기와를 굽고 돌을 깎아 옮기게 하니 공인들은 있는 재주를 다하고 백성들은 즐거이 일에 나왔다.

봄 2월에 시작하여 3개월이 지난 한여름(5월)에 낙성하니 중당은 현창하여 높직하고 향의(享儀)는 이로부터 전날보다 많아졌고 주위를 일신하니 공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맡은 바를 다하니 진실로 이렇게 울연한 건물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처음 계획 세울 때에 물자와 노력을 간략하게 계산하여 본부(本府)의 한 해에 받아들인 세금으로 부담하기 어려울까 염려하였는데 특히 상영(上營=濟州牧)에서 진념하여 10斛(=100斗)의 쌀과 100근의 철을 내려 주었고 이어서 면포 120필을 더 주어 여유있게 쓰게 하였으므로 大役事를 끝마쳤다.

상량문을 목사께서 친히 지어 걸고 집의 편액도 다시 써서 여러 해 퇴폐하였던 공해가 하루 아침에 빛을 보게 된 것은 시작하여 끝마칠 때까지 목사의 힘이 아님이 없다.

그 뜻을 받들어 거행한 이는 좌수 梁應彬이요, 감역하여 주선한 이는 향소의 夫啓河이다. 우리 임금님 등극한 첫해 을미년(헌종원년,1835)5월 상순 판관 김영업 씀.

이 건물은 현재의 인천문화당 자리에 있었는데 1906년(혹은 1907년) 제주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면서 이 건물을 교사(校舍)로 이용하였다.

교사로 쓰던 총물당이 1908년(혹은 1909년) 화재로 소실되자 제주목 객사인 영주관(현 제주북초등학교 자리) 2채를 교실로 활용하게 됐다. 이 학교가 제주북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작성 090208, 보완 1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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