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동상효 일부 청년들 입산 활동..상효동(영천동) 마을성담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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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동상효 일부 청년들 입산 활동..상효동(영천동) 마을성담①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5.1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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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 경비가 해제되자 밭담, 집담 등으로 가져다 써 버리면서 거의 허물어졌다

상효동(영천동) 마을성담①

 

위치 ; 서귀포시 상효동 448-7번지 일대(동상효) 서귀농협상효지소 창고 마당 및 동상효2로 22번지와 비닐하우스 있는 밭의 경계 담
유형 ; 방어유적(성)
시대 ; 대한민국(1950)

 

 


동상효에서는 일부 청년들이 입산하여 활동하였으므로 토벌대는 주민들이 입산자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학살을 자행했다.

예를 들면 1948년 11월 11일 고희옥, 고남홍을 연행하여 서귀포에서 총살하였고, 11월 13일에도 주민 4명을 붙잡아가서 총살했으며, 11월 30일에는 서귀포에 내려갔던 동상효 주민 5명이 토벌대에 의해 총살되었다.

소개된 기간인 12월 24일에도 오봉현과 처 김화길, 3살, 1살 된 딸 등 일가족 4명이 정방폭포에서 학살당했다.


1948년 12월 초순 동상효에 대해 소개령을 내림으로써 신효리 하효리 등으로 소개되어 갔던 동상효 주민들은 1949년 4월 선거 시기에 2달 정도 임시로 재건하여 살다가 다시 소개되었는데, 이는 무장대의 습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마을 주민들이 당시 경찰관 홍 주임이 요구한 숯을 내 주지 않은 데 대한 보복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950년 4월경에 2차 귀향하여 마을을 재건하였으니 피난생활은 대략 14개월 정도였다.


성은 1950년 4월에 모든 주민이 동원되어 시작하여 한 달 정도 걸려 완성하였다. 40여 호의 가호를 감싸는 이중성을 쌓았는데 내성은 높이 3.5m이고 외성은 5m 간격을 두고 2m 높이로 쌓았다.

내․외성 사이에는 볼레낭(보리수나무)이나 쿳가시낭(꾸지뽕나무)을 잘라다 담아 놓았다. 내성에 北, 西, 南門을 만들어 출입하였으며 둥근 망루를 만들어 무장대의 침입을 감시하였다.


당시 전체 200명이 안 되는 주민 수로는 성을 쌓고 지키는 일이 엄청나게 고된 일이었다고 하는데, 성을 쌓은 다음에는 돈내코 아래 쪽에 있는 남당마르주둔소에 부역을 해야 했다. 게다가 마을을 지키는 데 필요하다고 하여 주민들이 돈을 모아 38식 총 2정과 카빈 총 5정을 샀다.


축성 경비가 해제되자 밭담, 집담 등으로 가져다 써 버리면서 거의 허물어졌다. 현재는 집과 과수원의 경계담 40m 정도만 남아 있으며 그나마 중간이 무너졌다.(제주4․3유적Ⅱ 401~4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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