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곽지리가 문촌으로 발전하는데 기여..곽지리 조석봉묘비(曺錫奉墓碑)
상태바
[향토문화]곽지리가 문촌으로 발전하는데 기여..곽지리 조석봉묘비(曺錫奉墓碑)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8.19 00: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열정과 정성을 쏟아 많은 후학을 길러냄으로써 아직까지도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평가

곽지리 조석봉묘비(曺錫奉墓碑)

 

위치 ; 애월읍 곽지리 249-1번지의 북쪽. 곽지리사무소 동쪽 길 남쪽으로 1.2㎞ 개불숭이 지경 길 동쪽
시대 ; 조선시대
유형 ; 기념비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조석봉묘비 뒤

 

조석봉묘비 전경


곽금초등학교 동쪽 길에서 시작하면 남쪽으로 1.6㎞쯤 되는 곳 도로변 동쪽에 세워져 있다.

1852년에 건립된 높이 약 1m쯤 되는 이 비석에는 앞면에 〈學生曺錫奉之墓〉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公興德人旅遊濟州敎授郭支道光庚戌三月二十日終同月二十九日葬于郭支柳池巳作原門人以生吋行錢買仝坐田成置掃祭配白氏’ 우측면에는 ‘首徒朴圭洪’이라고 되어 있다.(북제주군 비석총람 212쪽)


조석봉 선생은 전남 여수 출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1850년 이전에 곽지리가 문촌이라는 소문을 듣고 곽지리에 정착하여 서당을 세우고 주민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의학에도 밝아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져왔다.

곽지리 주민들은 조석봉 선생이 열정과 정성을 쏟아 많은 후학을 길러냄으로써 이후 마을이 더욱더 문촌(文村)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고 아직까지도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조석봉 선생이 사망하자 제자였던 박규홍에 의해 버들못에 추모비가 세워졌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비석받침이 깨어지는 등 훼손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주민들이 정성을 모아 장소를 옮기고 주변을 깔끔히 정리했다.(제민일보 2001년 6월 22일)

안타깝게도 조석봉 선생에게는 후손이 없다고 한다.


옆에 세워진 표석에는 〈조석봉 스승님의 은덕을 기리며〉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스승님께서는 興德人으로 學識과 文章이 뛰어난 漢學者로서 1820年頃에 靑雲의 뜻을 품고 全國을 旅遊하던 중 濟州에 倒着하여 郭支里 上洞에 定着한 다음 一生 동안 精誠과 熱情을 다하여 後生들에게 學問을 가르친 結果 郭支가 文村으로 名聲을 얻게 되었으며, 그 後 現在까지도 그 傳統이 이어지고 있음은 스승님께서 오로지 이 고장에서 一生 동안 定着하시면서 獻身的으로 後學을 위하여 學問을 열어 주신 德分이시다.


처음에 墓地와 墓碑는 버들못 地境 六四一번지에 位置해 있었는데 時代變遷에 따라 마을의 後裔들이 스승님의 恩德을 기리고 그 崇高한 精神을 後世萬代에 傳하고자 이 陽地바른 곳 개불숭이 地境 二二九번지에 墓와 墓碑를 合奉하여 移轉한다. 2001年 四月 日 郭支里民 一同 郭支里長 秦明林”

《작성 100529, 보완 150925》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