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올레걷기)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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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 고현준
  • 승인 2021.11.10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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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16코스 항파두리유적지-고내포구, 길목마다 시가 빛나는 시인의 길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바다는 화가 난 듯 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포효하듯 했다.

지난 6일 날씨 예보는 비가 조금 온다고 했지만 비는 오지 않고 바람만 많이 불어 올레길을 걷는데는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이제 프로 올레꾼이 다 돼 가는 고광언, 안건세 선생은 당초 제주올레16코스 출발점인 고내포구에서 하프올레걷기를 시작해야 했지만, 안 선생이 “중간지점인 항파두리에서 고내포구로 걸어가자”는 제안에 모두 그러자고 뜻을 모아 항파두리로 향했다.

사실 제주올레16코스는 오르막이 많은 길이라 걷기에는 분명 내려가는 길이 더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항파두리에 도착하니 이날 마침 항파두리 문화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행사가 한참 진행중이라 우리는 임시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항파두리 동산에서 보는 풍광은 매우 아름답다.

그런 곳에 의자를 놓아 사람들이 사진을 찍도록 배려한 것은 참 좋은 아이디어다.

그런데 내려오다 보니 계단이 삐그덕 거리는 곳이 많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은 오래된 탓인지 보수가 필요해 진 곳도 많이 눈에 띄었다.

 

 

 

이곳을 내려와 장수물로 향했다.

장수물은 김통정 장군이 먹던 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식용수로 불가하다는 안내가 돼 있는 곳이다.

이날 나는 나뭇잎 사이에 고인 물을 한 모금 떠서 마시니 맛이 그윽한 게 꿀맛이었다.

이 물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물일까.

늘 봉사정신이 투철한 안 선생이 청소를 한다며 물을 손으로 퍼내기 시작했다.

물을 다 퍼내니 이 물은 아래쪽에서 펑펑 올라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위에서 흘러오는 물이 아니라 땅속에서 바위틈으로 샘솟듯 올라오고 있었다.

일종의 석간수였다.

그래서 물맛이 좋았던 이유였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뭔지 참 궁금했다.

물이 샘솟는 모습

 

 

 

장수물을 나와 큰 길을 지나니 수산리다.

수산리는 시비가 곳곳에 서 있어 운치를 더 하는 마을이다.

이날 처음 만난 시는 문정희 시인의 아름다운 시였다.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문정희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꽃들 사이

푸르게 피어나는 웃음같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

새로 건 달력속에 숨 쉬는 처녀들

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이 떠오르는 별 같은 것

 

매화가 철 모르고 피었다

 

 

시를 읽으며 걷다 보니 밭에는 노랗게 잘 익은 감귤이 가득이다.

그런데,

한 밭 가운데 있는 매화나무에 하얀 꽃이 가득 피었다.

이곳에서 일하던 밭 주인은 “세상이 이상하니 나무들도 정신이 없는 것 같다”며 봄에 피어야 할 꽃이 가을에 핀다고 세간의 걱정의 소리를 그렇게 전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며 걷는데 예원동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제단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는 예전에 없던 포제단이 세워져 있었다.

조금 쉬려고 올라갔지만 바람코지라 그런지 바람이 너무 불어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내려오는데 이곳에도 시비가 하나 숨어 있었다.

 

 

 

겨울 은적암

-손정순

 

나무들 해탈하듯 무소유의 열반에 들었다

스님 한 분 그 눈길 화두 찍으며 내려와서

세상의 번뇌 만나려 녹슨 쇠다리 건넌다

이제 은적암은 저 혼자 동안거 중

누가 먼 길 일부러 온 대도 헛걸음일 뿐

저 고요 못내 겨워서 솔잎 더욱 파랗다

 

 

정말 호젓하기만 한 마을길을 걷는데 작은 계곡에 예쁘기만 한 작은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무슨 새일까.

나는 새에게 “잠시 사진을 찍으니 그대로 있으라”고 말하고 사진을 찍는데 그 새는 그러라고 하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름은 무엇일까 하고 궁금해 하는 바로 그 옆에 또 하나의 시가 나타났다.,

 

 

 

눈 부신 날

-허형만

 

참새 한 마리

햇살 부스러기 콕콕 쪼아대는

하 눈부신 날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하나의 시 ..

 

 

어느 날 하느님이

-박의상

 

어느 날 하느님이 물으셨다.

꽃아 너는 피고 싶으냐

예 그럼요

하느님이 또 물으셨다

한번 피면 져야 하는데도?

예 그래도요

지면 다시 못 피는데도?

예 그래도요

 

 

 

시인의 마음은 이런 글 하나만 봐도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마을 길가에 작은 연못이 보여 보니 큰섬지라는 곳이었다.

이상하게도 이 샘물에는 금붕어가 살고 있었다.

친절한 안 선생이 바로 앞집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더니..

그 아줌마가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 샘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전해 주었다.

“샘이 더러워지면 남편이 늘 깨끗하게 청소를 한다”는 것과 “금붕어가 살게 된 것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금붕어를 방생하고 간다”는 얘기도 전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이 물은 예전에 이미 각종 개발로 물길이 막혀 물길이 끊어졌다”는 것과 “지금 이 물은 수돗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수돗물로 샘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니..

이런 곳은 사라지는 것이 더 당연한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 옆에, 그 유명한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적혀 있었다.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수산봉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수산봉 주변이 온통 공사판으로 변해 있었다.

수산봉 주변은 예전부터 온갖 일들이 벌어지던 곳이라 걱정이 됐다.

알아보니 이곳은 마을에서 국비로 지원을 받아 옛길을 복원하고 올레길과 연결하는 등 39억원이라는 자금이 지원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청소년수련원이나 놀이터 등으로 활용되던 이곳은 그동안 폐허나 다름없이 남겨져 있던 곳이라 일견 다행스럽다는 생각은 들면서도, 이 지역 주변 환경과 어울리는 일인지 무척 궁금하기만 했다.

이곳에는 마치 버려진 폐허에 남져진 오래된 사진처럼, 피아노라고 보아도 좋을 음수대가 망연한 모습으로 서 있어 그 옛날 번영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듯 했다.

다만, 수산수원지는 무심한 듯 조금씩 출렁일 뿐이었다.

우리는 올레코스인 수산봉을 오르기보다 옆길을 돌아 나가기로 했다.

한적한 산길이 걷기에는 더 좋다.

 

 

 

그렇게 수산봉을 내려와 마을길을 걷는데 어느 집앞 나무에 달린 석류가 무르익어 있었다.

하나씩 따서 먹어보니 무척 시었다.

석류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인도에서 기차를 10시간 동안 타고 가면서 먹었던 이야기..

엄청나게 큰 석류가 가격이 너무 쌌었다는 둥..

그러면서, 드디어 바닷가에 당도했다.

구엄포구다.

구엄포구 인근은 자연이 제주에 준 천혜의 비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비경을 즐기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비경에도 비밀은 숨어 있다.

잘 쳐다보면 자연이 만든 신비이지만 마치 동물들이 바다로 나아가는 모습이 다수 이곳에는 숨어 있기 때문이다.

본지가 발견했던 추장의 얼굴

 

 

 

해안도로 곳곳에는 인디언 추장의 얼굴도 있고 포세이돈의 얼굴 모습도 있다.

자연은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것들을 주었지만 우리는 그 자연을 가만 두지 못한다.

부수고 없애고..

자연은 인간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건만..

사람들은 깨부수지 못해 난리다.

그런 해안도로를 걸으면서 그래도 아직 조금씩이나마 남아 있는 비경을 다행스럽다(?)며 바라볼 뿐이다.

우리는 이날 고내포구까지 가지 못하고 청년선비 조정철과 의녀 홍윤애의 사랑이야기가 적힌 비가 있는 사랑의 종탑 앞에서 걷기를 멈췄다.

제주올레16코스는 출발점과 중간지점이 거의 이 코스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한다.

많이 걸었던 탓일까.

고개 하나를 더 넘기가 힘들었다.

 

 

 

 

조정철과 홍윤애의 사랑은 제주판 춘향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랑이야기이다.

이번 기회에 사랑의 종탑과 함께 비석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의녀 홍윤애의 사랑이야기(?-1781)

 

의녀 홍윤애는 목숨을 던져 사랑하는 사람을 살린 정의로운 제주여인이다.

그녀의 연인은 정조 시해음모에 연루돼 1777년(정조1) 제주에 귀양 온 청년선비 조정철(1751-1831)이었다.

행복도 잠시, 조정철 집안과 원수인 제주목사가 부임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제주목사 김시구는 조정철을 죽일 수 있는 죄목을 캐기 위해 그를 뒷바라지하는 홍윤애를 잡아들였다.

혹독한 고문과 몽둥이질을 받아 죽어가면서도 홍윤애는 조정철에게 불리한 거짓자백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의 죽음은 당시 조정을 발칵 뒤집었고 암행어사가 파견돼 진상조사 후 조정철은 죄 없음이 드러나 목숨을 건졌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순조 11년(1811), 제주목사로 자원하여 부임한 조정철은 홍윤애의 무덤을 찾아 추모시가 적힌 비석을 세워 통곡하며 그녀를 의녀라 일컬었다.

홍윤애의 목숨을 건 사랑은 소설이 아닌 실화로 춘향전이나 로미오와 줄리엣 보다 드라마틱하다

제주도가 유배지여서 가능했던 실화의 주인공 홍윤애의 묘는 현재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으며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널리 전하고 넋을 기리기 위해 애월읍과 제6기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여기에 사랑의 종탑을 세운다.(2013년 8월..비석에 적힌 내용 발췌)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떠올리게 하는 이 사랑의 종탑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 시대의 화두처럼 다가온다,

사랑은 늘 아름답지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노래구절도 생각나게 하는 그 종탑은 제주올레16코스에 그렇게 잔영처럼 남아 있다.

 

 

올레꾼 고광언(오른쪽), 안건세(왼쪽)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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