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근대 제주불교 최초의 출가자..동일리 강창규스님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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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근대 제주불교 최초의 출가자..동일리 강창규스님기념비
  • 고영철(제문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11.23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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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규 스님은 당시 중문주재소 방화를 지휘한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동일리 강창규스님기념비

 

위치 ; 대정읍 동일리 3161번지. 서산사 북서쪽 길가
시대 ; 일제강점기~현대
유형 ; 비석(기념비)

강창규_스님&신문기사(매일신보1923_02_20)

 

동일리_서산사강창규화상비

 

법정사 항일운동은 한일합방 이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무장 항일운동이라는 매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1918년 무오년에 한라산 법정사에서 일어난 ‘법정사 항일운동’, 이 날 항쟁에 지역주민 700여명이 대거 참여했으니 그들이 진정한 주역이겠다.

그러나 그 중심에 강창규, 김연일, 방동화와 같은 항일승려들이 있었기에 비록 거사의 목적을 이루진 못했으나 외세에 맞서 민족자존의 뜻을 만천하에 공포한 셈이다. 이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중심승려 중 강창규 스님은 근대제주불교 최초의 출가자이다.


강창규 스님은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을 주도한 독립투사이다. 항일투쟁 시 격문을 쓴 분으로 알려져 있다.

블로그 ‘산드륵의 참 좋은 세상’에 의하면 항쟁을 이끌었던 김연일 스님이 산방산 꼭대기에 있는 작은 굴에 숨어 있던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 때 강창규 스님이 김연일 스님을 위해 밥을 몰래 숨기고 끼니를 맞춰 갖다 드렸다고도 한다.


본적은 제주시 오등동이며 1878년 출생하였다. 1892년 4월 8일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면 죽림사에서 출가, 죽림사에서 박초월 스님을 의지하여 득도하였다.

출가 이듬해인 1893년 하안거 해제일인 7월15일에 죽림사에서 박만하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1905년 7월 15일 경상남도 하동군 칠불암에서 수선안거를 성만하고, 같은 해 강원도 건봉사에서 이보운(李寶雲) 스님 문하에서 사미과 및 사집과를 수료했다.


이후 봉려관 스님과 김석윤 스님 등에 의해 한라산 관음사 불사가 원만히 진행될 무렵, 강창규 스님도 귀향하여 관음사에서 수행하게 된다. 관음사 서무와 관음사 해월학교 교사를 맡은 김석윤 스님과는 박만하라는 같은 스승을 모신 사형사제(師兄師弟)지간이었기에 두 스님은 매우 각별했다.


이때 관음사에는 방동화라는 처사가 함께 있었는데, 두 스님의 권유로 박만하 스님이 당시 주석하던 경주 기림사로 방동화를 보내어 출가케 하였다. 방동화 스님은 당시 관음사에서 만난 강창규 스님에게 커다란 감명을 받고 출가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당시 기림사에는 훗날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역이었던 김연일 스님이 민족사상이 고취된 독립운동가들과 비밀리에 교류 중이었다.

1913년 기림사에서 출가한 방동화스님은 김연일 스님의 사상과 정신을 흠모하여 그를 제주에 초빙하도록 관음사에 연락을 취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김연일 스님은 제주에 들어오게 된다. 그의 능통한 법문에 대중들은 환호하였다.


1911년 법정사가 창건되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13년 김연일 스님이 법정사 주지로 취임하자, 당시 민족사상이 투철하던 스님들이 법정사로 대거 모여들게 된 것이다. 거사를 위한 비밀결사 장소로는 관음사보다 더 외진 곳에 위치한 법정사가 제격이었을 것이다.


거사는 이틀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으나 김연일 스님이 그로부터 1년여, 강창규·정구용 스님 등은 4년 동안이나 숨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제주사람들의 대중적 지지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923년 <매일신보> 2월 18일자에 실린 강창규 스님 체포기사에 의하면 “강창규는 김연일 등과 공모해 400여 명의 주민들을 선동, 주재소를 습격하고 불질렀다. 사건 이후 잠적했던 강창규를 제주도 상효리 화전동에서 체포했다”고 기록돼 있다.

강창규 스님은 당시 중문주재소 방화를 지휘한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강창규 스님에 대한 기록은 일제가 사용한 ‘1918년 형사사건부’와 ‘1918년 수형인명부’ 등에 기록돼 있다.


강창규 스님은 옥고를 치른 후에도 일제의 치밀한 감시를 받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가 1951년 7월 20일에 직접 작성한 수행이력서에도 1905년 건봉사에서 사집과를 수료한 이후로 이렇다 할 활동내용이 없다.

25년이 지난 1940년이 되어서야 전북 임실군 임실면 죽림사에서 선시에 합격해 대선법계를 품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반세기 세월동안 일제의 지독한 감시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스님은 항일투쟁 후 옥고를 치르고 돌아와 1943년에는 제주도 남군 대정면 동일리 3161번지에 서산사를 창건하여 출가사문으로서의 마지막 행적을 남겼다.(카페 ‘제주섬/꼬라’)

그 후 이곳에 머무르며 제주불교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다가 1963년 서산사 서쪽 바위 위 비석이 세워져 있는 자리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자세로 입적하였다고 한다.(블로그 ‘산드륵의 참 좋은 세상’)


가족은 제주시내에 살다가 해남으로 옮겨 살았다. 동생 강수오는 강창규 스님과 함께 법정사 항일투쟁에 동참하였다가 투옥되어 재판 전에 옥사하였다. 강창규 스님의 후손으로는 전남 해남에 거주하는 손녀 강인숙(2004년 68세)씨가 있다.

강씨는 윤봉택씨와의 인터뷰에서 "어렸을 적 할아버지(강창규 스님)는 모슬포 절에 계셨고, 우리 가족은 제주성내(제주시)에 살았었다"며 "해남으로 옮겼을 적에도 할아버지가 자주 우리를 보러 오셨는데 항상 바랑을 짊어 메고 찾아오셨다"고 말했다고 한다.(제주불교 041122)


기념비에는 전면에 ‘故姜昌奎和尙碑’라고 새겨져 있다. 세운 해는 불기 2511년이다. 서기로는 1967년이다.
《작성 1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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