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몽골제국,100년간 제주도 직할령 삼은.. 삼도2동 탐라총관부(멸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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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몽골제국,100년간 제주도 직할령 삼은.. 삼도2동 탐라총관부(멸실)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3.10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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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를 주로 목마장(牧馬場)으로 이용..100년 동안 제주를 통치하던 몽골의 관청이다

삼도2동 탐라총관부(멸실)터

 

위치 : 제주시 삼도2동 10-11번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연구자에 따라 서로 다른 지점을 비정하고 있다. 여기서는 현재 표석이 세워진 제주북초등학교 뒤를 옳다고 가정한 것이다. 제주북초등학교의 북쪽 도로변에 우체국 택배 서비스 건물이 있는데 그 앞에 표석이 있다.
유형 ; 관아터
시대 ; 고려

삼도2동_탐라총관부터

 

 


원나라는 원종14년(1273) 삼별초 항쟁을 진압한 뒤 그 잔군(殘軍) 토벌과 항복민에 대한 초무(招撫)를 위해서 몽골제국은 제주도를 자신의 직할령으로 삼고 탐라국초토사를 두어 직접 몽골의 관리를 파견하였다.

원나라는 삼별초의 항쟁이 있기 이전부터 탐라를 일본과 남송(南宋)의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 여기고 있다가, 삼별초의 항쟁을 계기로 탐라를 원의 직할령으로 삼고자 탐라국초토사를 설치한 것이다.

동시에 탐라를 주로 목마장(牧馬場)으로 이용했다. 이후 제주도는 100년 동안이나 몽골제국의 직접적인 지배 속에 있게 되었다. 탐라총관부는 바로 그 100년 동안 제주를 통치하던 몽골의 관청이다.


그런데 탐라총관부는 교과서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해진 이름일 뿐 사실은 100년 동안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탐라국초토사, 충렬왕1년(1275) 탐라국군민도다루가치총관부(耽羅國軍民都達魯花赤摠管府)를 설치했다.

그리고 충렬왕2년(1276)에는 탐라에 목마장(牧馬場)을 건설하여 몽골인 목자를 보내어 몽골에서 가져온 말을 적극적으로 기르게 했다. 1284년 탐라국안무사로 바꾸었다가, 1294년에는 원에서 세조가 죽고 성종이 즉위하면서 고려의 요청을 받아들여 별다른 이의 없이 탐라를 고려에게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고려는 탐라를 제주로 고치고 목사(牧使)를 파견하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원에 대하여 공마(貢馬)는 계속 바쳐야만 했다. 1300년 탐라총관부(耽羅總管府)를 설치했다가 이듬해에 탐라군민만호부(萬戶府)로 바꾸어 그 관할권을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이양하는 조처를 취하고 이곳을 여전히 목마장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공통된 점이 있다. 바로 '탐라'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는 중요한 단서다. '탐라'와 '제주' 사이에는 매우 커다란 정치적 의미 차이가 있다. '탐라'는 과거 제주도가 독립국이던 시절의 이름이다. 그 탐라가 '제주'라고 이름이 바뀐 건 중앙정부에 복속된 고려시대의 일이다. 구체적으로는 고려 고종10년(1223)경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다. 당연히 이름에는 뜻이 있다. 탐라는 '섬나라'라는 의미이며 제주는 '물 건너의 큰 고을'이라는 뜻이다. '나라'가 '고을'로 축소된 것이다.몽골이 제주를 지배하면서 굳이 '제주'를 버리고 '탐라'를 부활시킨 건 이유가 있다.

제주도가 특별히 이뻐서? 그래서 제주도의 자주성을 옹호하는 '탐라'를 되살려 준 것일까? 아니다. 이것은 마치 1876년 개항 당시 일본이 우리에게 강요했던 '강화도 조약 제 1 조: 조선은 자주의 나라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라는 것과 유사하다.

'조선의 자주권'을 운운한 것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함으로써 일본의 조선침략을 쉽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던 것처럼, '탐라'의 명칭 회복 역시 몽골이 제주도를 고려에서 떼어내 직접 지배하겠다는 의도일 뿐이다.


한 때 잠시 '제주'라는 이름이 복구된 적도 있었다. 충렬왕 20년(1294년) 일본정벌에 집착하던 원의 세조가 죽었을 때였다. 그가 죽자 일본정벌 계획은 폐기되었다. 그에 따라 일본원정의 전초기지인 '탐라'의 가치도 그만큼 떨어졌다. 그 기회에 고려가 '제주'를 돌려달라고 원에 요청했던 것이다. 그 요청이 받아들여져 '탐라'는 다시 '제주'가 되어 고려의 지배 속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6년 뒤인 충렬왕26년(1300)에 원이 탐라군민총관부를 설치함으로써 제주도는 다시 원의 직할지가 되었다. 이번엔 일본원정보다 탐라목장에 대한 경영 강화를 위한 조처였다. 고려가 경상도의 합포만호부(合浦萬戶府)나 전라도의 전라만호부의 예에 따라 탐라를 고려에 소속시키고 진수기관(鎭守機關)인 만호부로 바꾸어줄 것을 원에 요구함에 따라 탐라만호부로 이양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그리고 이후에는 계속 '탐라'가 고집되었다. 물론 독립국 탐라는 아니다.


그렇다면 제주도를 실질적으로 통제했던 이들 원의 관청은 어디에 있었을까? 사실 이를 정확히 전해주는 기록은 없다. 단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제주성 북쪽 해안에 옛 관청의 남은 흔적이 있는데 그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고증할 순 없다(州城北海岸 有古官府遺址 疑卽其地 然不可考)"라는 기록만이 있다. 아마도 이걸 근거로 제주읍성 북쪽 현재 북초등학교 뒤편에 그 표석을 세운 것 같다.


제주시에서 펴낸 《제주시의 옛터》에는 용담2동 고두생이 즉 사대부고 서쪽을 탐라총관부의 자리로 비정해 놓고 있다.


이후에도 탐라가 여전히 목마장으로 사용됨에 따라, 원·명(明)이 교체되는 공민왕23년(1374)에는 제주말을 명나라로 보내는 문제를 둘러싸고 말·소의 사육을 맡아온 목호(牧胡)들이 반란을 일으켜 고려의 조정에서 최영(崔瑩)을 제주로 보내 토벌하게 하는 사태도 벌어졌다.(이영권의 제주역사이야기,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작성 1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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