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산지 바당에 배 띄워 노난 소섬 목이 보염구나..건입동 제주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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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산지 바당에 배 띄워 노난 소섬 목이 보염구나..건입동 제주항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3.1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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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읍성 허물어 산지항축항 골재로, 산지포구 남쪽의 금산절벽도 깨 포구 매립골재 투입

건입동 제주항

 

위치 ; 제주시 건입동 산지천 하류 동쪽 바닷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어로․교통시설(항구)

 

제주항

 


1876년 한일수호조약의 결과로 항구들이 개항장, 지정항, 세관지정항, 지방항으로 구분된 데 따라 1920년대 들어 제주항, 서귀포항, 성산항이 지정항으로 조천항이 지방항으로 관리되었다.

1924년에 디젤선박(일본 神戶제철소에서 건조)이 처음으로 제주-목포, 제주-부산, 제주-오사카 사이를 다니게 되었다.

1926년에 일정예산(日政豫算) 30만엔을 투자해 방파제 축조 공사가 시작되어 3여 년간의 공사로 1929년에 서방파제가 준공되었다. 이로부터 건입포는 본격적으로 산지항이라 일컬어지는 한편, 제주도내 최대 규모의 항만이 되었고(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1927년 5월에 개항하였다.

이즈음 1922~1945년 사이에 일본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군수산업을 일으키면서 노동력을 제주 사람들로 채워나가기 위해 국제여객선으로 기미가요마루(君代丸)가 제주(고산항, 세화항 등 경유)-오사카 사이를 정기운항했다.

군대환은 러일전쟁 때 러시아해군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으로 尼崎해운회사에 불하했고, 이 회사는 이 전함을 두 동강내어 화물선으로 고쳐 제주-下關, 오사카 항로에 투입했다.

이에 대항하여 1930년 고순흠(조천), 김문준(조천), 문창래(애월), 김달준(하귀) 등은 자주운항 운동을 일으켜 ‘우리는 우리 배로’라는 표방 아래 1만50명의 조합원으로 동아통항조합(조합장 문창래)을 결성, 동년 11월 3일에 복목환(伏木丸, 1600톤, 在大阪 東亞通航組合 소속 기선)을 구입 운항을 하기도 했다.

정원 800명을 태우는 1300t급 영국제 강철선이었다.(제주의소리 20110907, 제민일보 20060320, 20110314, 20110916, 마을회지) 오사카까지 가는 데는 2일이 걸렸다.

그러자 군대환이 요금덤핑으로 경쟁했고 도항증명서(당시는 사진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 도항증명서에 사진을 붙이지 않고 인상을 자세히 기록하였다)를 빨리 내주지 않는 등 일제의 간섭이 있었는데 1932년 자취를 감추었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1931년에는 順吉丸이 취항했다. 다음 가사는 아마도 이 시기쯤에 생긴 민요라고 추정된다.


산지 바당에 배 띄워 노난 / 소섬 목이 보염구나.
선장님이 손을 치난 / 고동 소리 빵빵 남저.


1928년 대홍수로 남수각 홍예교와 북성홍문이 무너지고, 산지교를 거쳐 포구로 연결되던 유로가 바로 바다로 넘쳐 '졸락코지'로 이어지게 되면서 건입포가 옛모습을 잃고 말았다.

이 때 일제는 일주도로를 기점으로 북쪽에 위치한 제주읍성을 허물어 산지항축항 골재로, 산지포구 남쪽의 금산절벽도 깨어 포구 매립골재로 투입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탐라시대부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했던 터전은 물론 제주성안의 초고 경승지로 이름 높던 금산 주변의 풍치도 함께 사라지게 된 것이다.(한라일보 20090119)


1928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 160호 '제주도 기행'에도 당시 상황이 묘사돼있다. 1928년 5월 제주축항 공사 시찰을 왔던 조선총독부 내무국 토목기사 가지야마 아사지로의 4박5일 여정을 담고 있다. 〈공사는 거의 70% 완공되어 있고, 사석 위에 큰 콘크리트를 설치하는 중이었다.

50여 명 조선 부인 축항공사견학단이 빨간 깃발을 든 안내인을 따라서 사석 위의 흙길을 나란히 늘어서서 때마침 항내 전석 폭파 작업을 견학하고 있었다. 석재는 항구 동쪽에 있는 해안 채석장에서 산짓내를 가로질러 해안을 따라 광차 궤도로 운반하고 있었다.

방파제에 수용되는 바다 면적은 2만여 평 정도이지만 현재 계획대로라면 입구가 너무 트여 동북쪽에서 부는 바람을 막을 방법이 없기에 나중에 전방 일자형의 방파제를 설치하든지 현재의 제방을 연장한다고 한다. 이것들이 다 준공되면 산지항은 명실 공히 제주 유일의 항이 된다.〉(제주의소리 20130420)


1930년 부산상공회의소에서 발간한 우에다 코이치로 '제주도의 경제'에 산지항에 대한 언급이 있다. 〈북제주의 중앙에 위치하여 바로 뒤에 성안을 두고 있지만 결코 좋은 천연항이 아니며 풍랑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의 평탄한 항구이다.

그러나 도청(島廳) 소재지인 제주로서는 이 항구가 명실공히 제주도의 정면 현관으로 삼을 필요가 있어 제주축항기성동맹회의 활약으로 1926년 10월 이후 제1기 계획축항공사를 착수한 것이다.〉(제주의소리 20130420)


『포구의 악동들』(김석종)에는 산지포에 1930년대까지만 해도 해상업으로 살아가는 선주들이 거느린 중선(中船) 30여척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7~8개월 동안 남해안을 거쳐 군산-인천-연평도-해주-신의주를 오가며 해상업을 벌였다고 한다.(한라일보 20090119)


이 때까지의 산지포는 큰 배가 정박할 수 없는 규모여서 북방 2㎞ 해상에 정박해서 20~30톤 규모의 동력선을 종선으로 이용하여 지금의 제주시수협 물양장으로 상륙했다. 방파제 혹은 물양장을 축조하려면 우선 돌을 캘 석산이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삼발이(TTP,테트라포트)가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1928년 서부두를 처음 축조할 때는 주정공장 인근 석산을 활용했다. 여기에 투입된 노동자들은 대부분 함경북도 청진 출신이었다. 청진항 공사가 마무리되자 이들은 비교적 수입이 좋은 서부두공사장을 찾았다.

화물트럭이 없는 상황에서 돌 운반은 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때 나온 말이 ‘청진팔목도’이다. 긴 목도 중간에 돌을 걸어 앞 4인, 뒤에 4인이 어깨에 메고서 운반하는 지극히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이들은 쌀 한 가마에 5원 하던 시절 일당으로 3원을 받았으니 급료는 상당히 높은 것이었다. 이때 축조된 방파제는 300m, 지금의 제주조선공업(주) 뒤쪽 방파제에 해당한다.


1944년 5월6일 제주항을 출항하여 목포로 향하던 고와마루(晃和丸)가 5월7일 횡간도 부근 해상에서 미군기의 공격을 받고 격침되어 소개중이던 도민 등 500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2차 소개선인 호에이마루(豊榮丸)도 7월2일 제주항을 출항하여 7월3일 목포 부근 소안도에 정박하고 밤이 되길 기다려 출항하였는데 23시 무렵 목포항 입구에서 기뢰에 부딪혀 침몰하였다.


이 두 사건은 제주민을 본토로 대피시키려던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당시 제주도 인구가 23만명 정도였는데 일본정규군 75,000명 정도가 제주도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전투가 벌어질 경우 민간인은 작전상 걸림돌이 될 수 있고 자활문제도 걸리므로 노약자, 어린이, 부녀자들을 한반도로 대피시킨다는 계획에 따라 이동중이던 도민들이 희생된 것이다.

일본군은 보급이 한정된 섬에서 식량 확보가 절실했을 뿐 아니라 조선인을 믿지 않았으며 주민이 미군과 밀통하거나 투항해 군사 비밀이 새나갈 수 있다는 점 등을 우려해 도민 5만 명에 대한 소개 계획을 시행했다.(연합뉴스 20050413) 고와마루와 호에이마루 격침으로 대피 계획은 포기하였으며 민간정기항로는 중단되었고 내륙과의 해상교통은 日本海運輸送船으로 야간에만 운행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 晃永號, 春光號, 남신호, 慶營號, 新光號 등이 운항하였으나 선박들이 모두 소형 木船이어서 1950년부터는 美軍需物資輸送船을 개조한 平澤號(500톤급 철선)와 이리호(500톤급 철선)가 목포-제주-부산을 연결하는 삼각항로(속칭 무지개항로)에 취항했다. 제주-목포 11시간, 제주-부산 19시간이 걸렸다.


제주항은 이렇듯 1948년 제주도에 민항기가 취항하기 전까지 유일한 관문역활을 해왔으나 외해에 노출된 해안지형상 인공적인 항만건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악조건을 안고 있었다. 이 건입포를 터전으로 건입포 주민들은 20여 척의 중선(重船=돛대 2개로 운항하던 風船)을 보유, 봄이면 군산, 연평도, 해주, 신의주까지 진출한 뒤 음력 10월이면 쌀과 각종 상품을 싣고 귀항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건입포는 예로부터 육지를 오가는 관문으로 교역과 어로활동의 중심지였다. 옛 사진을 보면 졸락코지의 동남쪽과 그 맞은 편에 배들이 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원래 건입포 부근에는 용진교라는 다리가 놓여 있고 훨씬 북쪽으로 제주항이 건설되었다.


산지포의 근간이 된 동부두는 주정공장 건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제는 대체연료 확보를 위해 제주 지역에서 대량생산되던 고구마를 원료로 알콜을 제조키로 하고 주정공장을 짓기로 했다. 동양척식회사가 맡았다.

그러나 알콜을 실어나르기 위해서는 항만시설이 비좁아 이를 확장하는 일이 시급했다. 조선총독부는 이에 따라 120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모두 3차례에 걸쳐 동부두 일대 13,594평을 매립했다. 서부두 쪽으로도 510m의 방파제를 추가로 쌓았다.


이후 광복을 맞이했으나 정부 재정 형편이 어렵다고 제주의 항만 투자에 소홀했다가, 1963년 2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겸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박정희가 ‘제주 지역을 홍콩 마카오와 같은 자유항으로 개발하도록 계획을 짜서 상공부에 제출하라’는 지시를 내림으로써 본격적이 개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때에 이루어진 공사는 주로 일제 때 쌓은 항만시설의 연장으로서 장차 확장될 산지포 개발의 정지작업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렇지만 서부두방파제가 북쪽으로 뻗어나가다가 800m쯤에서 동쪽으로 구부러지게 만들었다. 산지포의 확장에 대해 더 이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결과였다. 결국 10년쯤 후에는 이곳을 잘라내고 직선으로 다시 공사를 해서 연장했다.


1963년 도라지호(894톤), 1965년 아리랑호(954톤)가 제주-부산 항로에 취항하였다.


1968년 항만법이 제정될 즈음에 산지항의 명칭이 제주항으로 바뀌면서 무역항으로 지정되었으며, 1977년 4월14일에는 우리 나라 해운사상 처음으로 대형 카페리 선박(동양카페리1호, 3767톤의 철선, 일본 大平공업 1970년 제조)이 제주-부산에 취항함으로써 운항시간을 11시간으로 줄여 4시간을 단축하는 등 종래의 여객선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동양고속카페리(주)는 그 해 6월 3000톤급 카페리2호를 취항시켰다.

1982년 4월에는 제주-완도에 한일카페리, 11월에 제주-부산에 동남잠보훼리가 등장했다. 1983년 9월에는 동양고속 카페리2호(4440톤)가 제주-부산 항로에 취항함으로써 3척의 카페이와 1척의 일반여객선이 운항하게 되어 매일 2척이 제주와 부산에서 출항하였다. 1984년말 현재로는 동양고속 카페리1호, 5호, 한국카페리1호, 도라지호가 취항하였다. 카페리는 많은 차량과 여객을 함께 실어나를 수 있어서 제주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제주땅의미찾기 포구 28~37쪽)


제주-완도 사이는 56마일로 연륙 최단거리이다. 여기에 착안한 동양고속카페리(주)는 부산항로에 취항한 직후인 1977년 6월3일 〈1978년 5월31일까지 제주-완도 간에 카페리를 운항하겠다〉는 내인가신청을 하였다. 그러나 완도와 내륙 간의 육상교통이 불편해 이용자가 많지 않을 것을 예견하여 1977년 7월26일 〈완도항 접안시설이 미비하다〉는 이유를 들어 카페리의 목포항로 定期路線 취항 신청을 냄으로써 완도항로는 뒤로 미루어졌다.


1978년 3월23일 한일고속(주)이 제주-완도 정기항로 사업신청을 내어 인가를 받은 후 4차례나 취항일을 연기한 끝에 1979년 4월17일 시속30노트인 쾌속여객선 한일1호(정원 473명)를 취항시켰다. 이로써 연륙 항로가 2시간대로 단축되었다.

다만 이 쾌속선은 파고가 3m 이상이면 운항할 수 없고 무리한 운항으로 취항 후 6개월 사이에 10회나 고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982년 4월에는 한일고속(주)이 대형 화객선 한일카페리(2358톤, 정원 741명)를 취항시켰다. 이 시기에 제주-마산 항로에 아리랑호가 4일에 1회 운항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었다.(제주동초등학교 향토지)


1978년 제주항 종합 개발 계획이 확정되면서 제주항의 정비, 확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제주도 관문항으로서 종합 기능을 확보하고 국제 규모의 관광 지원 항만으로 개발하기 위한 제주항 개발 계획은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이다. 또한, 제주항을 2010년 제주 국제 자유 도시 육성에 부응하는 동북아 국제 해양 관광의 중심 항만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제주 외항 개발 1단계 사업(1999~2007년), 2단계 사업(2005~2011년), 3단계 사업(2011~2019년)이 시행중이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탐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오던 건입포는 매립되고 주변이 좁아 지금은 포구로 사용하지 않지만, 이를 근간으로 점차 확장하여 제1~제7부두까지 동쪽으로 수㎞에 이르는 부두가 건설되었고, 제주항은 제1부두~제7부두 그리고 서부두 등 총 8개의 부두로 구성되어 있다. 제7부두 동쪽으로 계속하여 매립공사를 진행중이다. 방파제는 화북1동의 앞바다에까지 뻗어 있다.


제주항의 항내 수심은 2~11m, 항내수면적은 354만㎡, 간만의 차는 2.1m, 안벽은 총 2,416m, 물양장은 754m이며, 8개의 부두에 24척의 선박을 동시에 접안할 수 있다. 연간 하역 능력은 84만 3000t으로 최대 선박 8,000t급 1척을 비롯한 6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다. 1955년 접안능력 1,000톤, 하역능력 77,000톤, 1984년 접안능력 18,800톤, 하역능력 843,000톤이다.(1987년 제주동초 향토지 참조)


주요 취급 화물은 연간 140만t으로 양곡만이 수입 화물로 5만t 가량 취급되고 있으며, 이외에도 유류, 비료, 양곡, 시멘트, 무연탄, 목재, 철재, 기타 잡화 등이 연안 화물로서 입·출하가 된다.

제주항을 입출항하는 여객선은 부산·목포·여수·마산·완도 등지로부터 정기적으로 연결되어 일반 여객 및 관광객을 연간 80만 명 가량 운송하고 있다.

이밖에도 입·출항 선박과 화물의 처리를 위하여 항만운영정보시스템(Port-MIS), 해상교통관제시스템(VTS) 등 신속한 행정 지원 체제를 갖추고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작성 1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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