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제주읍성 남쪽 모퉁이 가장 높은 곳..이도1동 제이각터
상태바
[향토문화] 제주읍성 남쪽 모퉁이 가장 높은 곳..이도1동 제이각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3.20 07: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이각은 성벽 위에 있는 것이고, 남수각은 이 일대 이름 ..남수각과 제이각은 별개의 건물이다

이도1동 제이각터

 

위치 ; 이도1동 1437-2번지. 오현단 동쪽 길 건너 성벽 위
유형 ; 관아
시대 ; 조선

이도1동_제이각터 발굴
이도1동_제이각터


제주성지는 제주도 기념물 제3호이다. 임진왜란 후인 선조32년(1599) 제주목사 성윤문이 제주성을 개축할 때, 남수구와 북수구에 무지개다리(홍예)를 놓고 그 위에 각각 제이각과 죽서루라는 초루를 건립하여 남수각과 북수각으로 불렀다.


그 후 효종4년(1653) 이원진 목사 때에 8월 큰 풍수해로 제주성의 남수구와 북수구, 홍문이 무너지자 수리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그 해 10월에 이원진 목사는 이임하고 다음 소동도(蘇東道) 목사 때인 효종5년(1654) 봄에 복원을 완료하였다.

숙종46년(1720)에 목사 민제장(閔濟章)이 고치고, 고종24년(1887) 7월에는 폭우가 쏟아져 민가와 분묘가 떠내려가고 남수구(南水口) 홍문이 쓰러져 목사 심원택(沈遠澤)이 다시 고쳐 세우는 등 홍수 때마다 파괴 유실 축조가 반복되다가 언제부턴가 홍문만 축조하고 누정 건립은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제이각을 남수각 서쪽 높은 언덕에 창건하였다. 김상헌의 남사록(1601)과 이원조의 탐라지초본(1841)에도 제주읍성 남쪽 모퉁이의 가장 높은 곳에 제이각(制夷閣)이 있다고 기록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1653년 홍수에 무너진 것은 산지천에 있는 남수문(남수각)이다. 남사록에 나오는 제이각은 홍수의 영향을 받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있었으므로 제이각이 무너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수각의 다른 이름이 제이각이 아닐 수도 있다. 남수각과 제이각은 각각 별개의 건물이라는 말이 된다.


한편, 제주시가 세운 남수각 터 표석에는 ‘1599년 목사 성윤문이 이곳에 홍문(虹門)을 축조하고 서남쪽 높은 언덕에 制夷閣을 세웠으므로 이 일대를 南水閣이라 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의 홍수로 유실 복원이 거듭되었으나 1927년 대홍수로 무너진 뒤 복원되지 않았다.’라는 설명이 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제이각은 성벽 위에 있는 것이고, 남수각은 이 일대 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남수각이라는 건물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필자는 제이각은 성벽 위에 있었고, 남수문에는 건물이 없었던 것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1990년 제주성지 및 오현단 정비계획(안) 용역에 따른 발굴 당시부터 제이각 건물지 기단부는 존재가 확인됐었다. 2013년 6월부터 (재)제주고고학연구소가 제주성 남동쪽에 남아 있는 치성을 시굴조사하였더니 건물지가 확인되었다고 8월말에 발표하였다.

원형을 간직한 채 뚜렷하게 노출된 건물지에서는 凸자형 기단석렬과 초석 6매가 확인됐으며, 정면 1칸, 측면 2칸의 건물지와 정면 3칸, 측면 1칸의 2개의 건물지로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성벽 치성 상단부에 凸자형 구조의 누각건물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건물지에서는 城造冬(성조동), 守城(수성), 丙寅春(병인춘) 등 글자가 확인되는 명문기와 및 청자.백자 등의 자기편이 다수 출토되었다.


명문기와에 대한 기사 중 대부분의 매체는 寅春(인춘)이라고 소개하였고, 한라일보(130830)는 丙寅春(병인춘)이라고 소개하였다. 丙寅春이 맞다면 그 기와를 만든 해를 표기한 것일 텐데 1626, 1686, 1746, 1806, 1866년이 병인년이어서 창건하거나 고쳐 지었다는 해(1599 己亥, 1654 甲午, 1720 庚子, 1887 丁亥)와 일치하는 것은 없다.

기와는 특정 건물을 위해서 제작할 때는 간지 등을 써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위 기록에 나오지 않은 어느 해에 고쳐 지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건물에 썼던 것을 다시 쓸 수도 있고, 미리 만들어두었던 것을 쓸 수도 있는 일이므로 창건 또는 중수년대와 직결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성벽이 잘 남아있는 곳은 사실상 이곳이 유일한 곳인데 성벽 배부름 현상이 발생하여 치성 일대 70m 구간 성곽 해체를 통한 보수정비가 예정되어 있었고 이와 함께 제이각을 복원할 예정이었으나 제민일보(131001)에 따르면 서울 가회민화박물관에 보관중인 제주목도성지도(濟州牧都城地圖) 필름본에는 이 건물이 청풍대(靑風臺)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제주시가 자문회의를 갖고 전문가 의견을 수렴했지만 제이각인지 청풍대인지 결론을 짓지 못했으며, 제주일보(150325)에 따르면 제주시가 제출한 복원사업도 제주도문화재위원회에서 3차례나 반려했다고 한다.


따라서 성곽 해체 등을 통한 정비를 서두를 것이 아니라 제이각인지 청풍대인지 등을 먼저 밝히고 또 병행하여 축성 기법, 건물의 형태, 명문기와를 통한 건축년대 등을 밝히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15년 복원하여 2015년 12월 23일 현판식을 가졌다.
《작성 130903, 보완 131001, 150413, 15122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