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중문(中文) 주재소 습격,구금자들 석방.. 명월리 강봉환 지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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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중문(中文) 주재소 습격,구금자들 석방.. 명월리 강봉환 지사 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3.21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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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명월리 강봉환 지사 묘

 

위치 ; 명월리 빌레못마을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묘

강봉환(독립운동)
명월리_빌레못강봉환묘

 


1913년부터 시작된 토지조사사업은 국유지와 공유지가 많았던 제주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과거 목장토와 역둔토를 경작하던 빈농과 화전민들은 토지조사사업과 화전 금지에 따라 경작지를 구하지 못하여 외부에서 생활 기반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민 대부분은 빈궁과 기아 속에서 생활고에 시달리자 이의 탈출을 위하여 일본 등으로 나갔으나 탄광이나 방직공장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강봉환(姜奉煥) 지사는 제주(濟州) 사람으로 한림면 금악리 1287번지가 본적이다. 당시 52세였으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18년 10월 5일 제주도 남제주시 법정사(法井寺)에서 승려 김연일(金連日)·강창규(姜昌奎)·방동화(房東華) 등이 주도한 항일무력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는 평소 법정사의 승려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 경북 영일군 사람으로 항일 의식이 투철하였던 김연일(金蓮日)은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하여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김연일은 우선 1918년 봄에 강창규·방동화 등의 승려를 중심으로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한 다음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는 강봉환을 비롯한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동년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뒤,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도외(島外)로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여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面)의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하고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강봉환 등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電線)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고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관련자 66명이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형사사건부 ·수형인명부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265·266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4권 206면 ·순국(1994. 11월호) 100·101면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위 묘 사진은 2008년7월에 찍은 것이며, 강봉환 지사의 유해는 2010년 10월12일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작성 1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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