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유림의 반수(班首)와 제주향교 도훈장..명월리 오인호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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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유림의 반수(班首)와 제주향교 도훈장..명월리 오인호기념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3.22 06: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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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가도 전혀 받지 않고 봉사적인 자세로 일관하였기에 더욱 유명..제자들이 비 세워

명월리 오인호기념비

 

위치 ; 한림읍 명월리 1742번지, 구 명월국민학교 교문 옆
시대 ; 대한민국(1977)
유형 ; 비석(기념비)

명월리_오인호비 전경.
명월리_월헌오인호비


오인호(吳仁瑚, 1849~1928)는 호가 월헌(月軒)이고 본관은 군위(軍威)이다. 한림읍 명월리에서 태어나 애월읍 납읍리의 진사 김용징(金龍徵)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유림의 반수(班首)를 지내고 제주향교 도훈장을 지낸 뒤에 명월리에 서재를 열어 30년간 후진을 가르쳤다.


오인호와 그의 아들 오진규는 명월리 중동 자신의 집에서 젊은이들에게 무료로 학문을 가르쳤는데 월헌의 학덕은 한림뿐만 아니라 인근 애월․고산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댓가도 전혀 받지 않고 봉사적인 자세로 일관하였기에 더욱 유명해졌으며 그의 문하에서 배운 제자들이 총 15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비석은 1977년 12월에 제자들이 명월대 바로 서쪽에 세웠다. 담장으로 5평 정도의 경역을 조성하고 비는 135cm 높이의 석각 속에 안치되어 있는데 비의 높이 80cm, 너비는 위가 35cm, 아래가 33cm, 두께가 13cm로 되어 있다.


비면에는 ‘월헌선생오인호지비(月軒先生吳仁瑚之碑)라고 새겨져 있고 그 좌우로 김영식(金永植), 조병현(趙秉鉉), 조봉규(趙奉奎), 박문휘(朴文徽) 등 네 사람의 이름이 새겨 있는데 이는 곧 그의 제자들로 이 비를 세운 사람들이다.

이 비는 ’정사십이월 일 한경면 조수리 조여경지서(丁巳十二月 日 翰京面 造水里 趙余慶誌書)‘로 되어 있어 1977년 그의 제자인 조여경(후에 조병현으로 이름 바꿈)이 글을 짓고 또 글씨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비의 뒷면에는 斯道之興必有倡之者吾徒生於海隅委靡於斯文者久矣 先生夙有踐之志受業於前進士金公龍徵篤志溯 源後之泳遊斯門者若迷津之於指南矣故遠以爲人慕近以表自仰焉 銘 訥言敏行 居仁由義 昏衢明月 牖我蒙士라 쓰여 있다.


유학(儒學)의 도(道)가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이를 앞에서 이끄는 자가 있어서이다. 우리들은 바다 귀퉁이에서 태어나서 유학에 활기가 없는 것이 오래되었다. 선생은 일찍이 힘써 실천하는 뜻이 있어 전 진사 김용징공에게 배워 뜻을 돈독히 하여 사물의 근원을 밝히고 상고하였으니, 후에 유학을 공부하는 자가 가야할 곳을 찾아 헤맬 때 일정한 곳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멀리서는 사람들이 사모하였고 가까이에서는 절로 우러르는 것을 드러내었다.

말은 어눌하게 하면서도 행동은 민첩하게 하셨고
인(仁)에 거하면서 의(義)에 말미암아 행하시면서
어두운 밤거리의 밝은 보름달과도 같이
우리 어리석은 선비들을 이끌어주셨네.

제자들은 기념비와 함께 비석 동쪽에 명월교(明月橋)라는 무지개다리도 세웠고 스승의 이름을 음각한 제사상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제민일보 050203)


명월리 오용승씨도 학문이 뛰어나서 집에 서당을 열고 후학 양성에 힘쓴 대표적인 인물로 월헌 오인호 선생을 꼽았다.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여러 사정으로 취학하지 못한 어린이 등을 대상으로 오용범씨(작고)가 간이학교인 명월숙을 개설했다.(한라일보 110726)
《작성 130905, 보완 16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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