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봄·가을·겨울에 정기적으로 제를 올렸다..이도1동 사직단(멸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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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봄·가을·겨울에 정기적으로 제를 올렸다..이도1동 사직단(멸실)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3.2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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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에 대한 제사는 농업 국가로서 국가 경제의 기초를 지켜주는 신에 대한 제사의 의미

이도1동 사직단(멸실) 터

 

社稷壇址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689-2번지. 삼성혈(三姓穴) 남서쪽 옛 제주방송국의 구지(舊地) 즉 현 교보생명 남쪽 자리에 있었다.
시대 ; 조선

이도1동_사직단터
이도1동_사직단위치



사직단(社稷壇)은 백성을 위하여 사(社=地神=국토의 신)와 직(稷=穀神=오곡의 신)을 모셔 제사(祭祀)하는 곳이었다. 사직에 대한 제사는 곧 농업 국가로서 국가 경제의 기초를 지켜주는 신에 대한 제사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고려사절요 등에도 사직단 관련 기사가 나오며,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4년(1395) 1월29일 사직단(社稷壇)을 영조(營造)하였다는 기사가 처음 나온다.


매년 봄·가을·겨울에 정기적으로 제를 올렸다. 이러한 정기적인 제 외에도 큰 변란이 있을 때 올리는 기고제(祈告祭)와 보사제(報祀祭), 가뭄이 들었을 때 드리는 기우제, 풍년을 기원하는 기곡제(祈穀祭) 등이 거행됐다.


사직단에는 신위가 상설되어 있지 않고 신실에 통합하여 봉안하였다가 제사 때에만 반출하여 단상의 신좌에 설치하였다. 사직단에서의 제사는 혈제(血祭)라 하여 제수에 돼지머리나 양머리를 날것으로 봉헌했다.


사직단은 왕이 있는 한성부에만 설치한 것이 아니라 각 지방에도 설치하여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봉제(奉祭)는 수령(守令)들이 주관하였으므로 제주에서는 제주목사가 제관이 되었다.


이형상 목사가 1702년 남긴 탐라순력도 '제주조점'에도 제주성 남쪽 광양벌에 모흥혈, 연무정과 함께 사직단이 그려져 있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집필 김동전)에 따르면 제주 지역의 사직단은 처음에는 남문 3리 밖에 있었는데, 숙종45년(1719) 제주목사 정석빈(鄭碩賓)이 묵은성 서쪽의 속칭 사작이 안으로 옮겼다가 철종4년(1853) 제주목사 목인배가 개축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헐렸다고 한다.


그러나 한라일보(120410) 표성준 기자는 목인배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제주성 남문 밖 삼성사 서쪽에 있던 사직단을 개축하였다고 썼다.


또한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인 김익수 님에 따르면 이곳에 있던 사직단은 1910년 폐지되어 국유지로 편입되었다고 한다.


사직단이 이 자리에 계속 있었던 것인지, 묵은성에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온 것인지, 묵은성에 갔던 것이 사실이라면 언제 이곳으로 다시 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미군정기에는 이곳에 국방경비대 제9연대 사령부가 있었고 1948년 6월 박진경 연대장이 문상길 중위 등 부하들에게 암살당한 자리이기도 하다. 1952년에는 KBS방송국이 이 자리에서 개국하였다.


제주목사 김정이 1736년 전후에 저술한 『노봉문집』의 사직단 「기우문」에는 사직단이 탐라국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유제임을 설명하고 있다.

김정은 제주목사로 도임할 때와 이임할 때 사직단에 고하는 글을 남겼으며, 사직단 곁에 있는 풍운뇌우단에서도 기우제를 지냈던 기우문을 남겼다.
《작성 130909, 보완 1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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