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비 온 후 일시적으로 솟아나는 용천수.. 명월리 짐수네물(봉천수연못)
상태바
[향토문화] 비 온 후 일시적으로 솟아나는 용천수.. 명월리 짐수네물(봉천수연못)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3.25 00: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을 사람들 동원돼 돌을 등에 지고 운반하면 동네에 살았던 돌챙이(石手)들이 물통 만들었다

명월리 짐수네물(봉천수연못)

 

위치 ; 한림읍 명월리 1849-2번지. 중동
유형 ; 수리시설
시대 ; 일제강점기

명월리_짐수네물식수용 도수구
명월리_짐수네물식수용

 


짐수네물(金水泉)은 중동마을에 있는 용천수이다. 처음에는 비 온 후 일시적으로 솟아나는 용천수였으나 마을 인구가 늘어나 자주 이용한 결과 더 이상 용출하지 않아 현재는 봉천수가 되어 버렸다. 물통의 깊이는 1.5~2m이다. 현재 짐수네물 아래에는 보다 넓은 물통이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 도로 위쪽의 짐수네물 사각형 물통은 식수로 이용되었다. 처음에는 애기구덕 만큼 작은 물통이었다. 인구가 불어나면서 마을 사람들이 크기를 늘렸다.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돌을 등에 지고 운반하여 오면 동네에 살았던 돌챙이(石手)들이 물통을 만들었다고 한다. 물통을 만드는 데 약 10일 정도 기간이 걸렸다.

짐수네물이 지금처럼 만들어진 것은 1930년대 초반이다. 물통은 위, 중간, 아래 3개로 만들었었으나 길을 내면서 중간에 있던 물통은 매립하였다.

사용량에 비해 용출량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물을 허벅에 담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서 순서를 오래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물을 길러 나와야 했다고 한다.

중동마을에는 동네 경조사가 있을 때에 그 집에 필요한 물을 우선 공급하도록 배려하는 좋은 풍습이 있어서 일반 가정에에서는 멀리 문수물이나 하동의 산물, 동명리 진근동 가명물을 길러 가야 하기도 했다.

명월과 동명을 구분하는 도로 아래쪽에 있는 물은 마소에게 물을 먹이는 곳으로 이용하였다. 여기에는 민물장어가 살기도 했고, 여름이면 마을 어린이들이 목욕하는 곳이기도 했다. 저녁이면 어른들도 목욕하러 이곳을 찾았는데 시간을 정하여 남녀 구분을 하였다.

그러나 우마가 함께 사용하는 물이라 어린 시절에 이곳에서 밤에 목욕을 하고 나면 팔뚝에 진흙이 묻어 있기도 했다고 하며, 깜깜한 데서 사람과 말이 같이 씻으면 진흙으로 씻는 건지 물로 씻는 건지 잘 몰랐다는 증언도 있다.


장마철에 비가 많이 내려 흙탕물이 되어 버리면 중동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물통을 청소하였다.
짐수네물에 의지하여 마을이 유지되었으며 벼농사도 이루어졌다. 짐수네물 바로 옆은 집터였다. 아래 우마용 연못의 서쪽과 북쪽도 집터여서 궷집터라고 불렀다.


물통 안에는 허벅을 내려놓기 위한 물팡과 물통으로 내려가기 위한 계단이 있었다. 金水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2003, 명월향토지 94~95쪽) 몰통 동쪽 벽에는 도수로로 보이는 석조시설(위 사진)이 있다.
《작성 13091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