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1918년 신교육령 반포 후 1921년 설립, 대림리 신명의숙(멸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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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1918년 신교육령 반포 후 1921년 설립, 대림리 신명의숙(멸실)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3.29 08: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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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리에서 경비의 일부를 부담하고 나머지는 월사금으로 충당하였다

대림리 신명의숙(멸실)터

 

新明義塾址
위치 ; 한림읍 대림리 복지회관
유형 ; 교육기관
시대 ; 일제강점기

대림리사무소_위치

 


조선시대의 서당은 향교에 입학하기 전 준비교육 단계로서 서민 자제에게도 교육기회가 주어졌다. 교재는 천자문을 기본으로 하여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사서오경 등을 썼다.

대림리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서 훈장은 곽지리 장師長을 초빙해 왔고 웃동네 신선달 집에서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1918년 신교육령이 반포된 후 1921년에 사립 신명의숙이 현재의 리사무소 자리에 설립되었다.

의숙의 교사로는 김정언, 신찬희 두 사람이 초빙되었다. 대림리에서 경비의 일부를 부담하고 나머지는 월사금으로 충당하였다. 교육과목은 일본어, 산술, 한글 등이었다. 한글은 귀덕 사람 조선생, 신찬희 선생이 가르쳤다.


신명의숙이 개설된 이래 학동들이 많아졌고 성적이 좋아졌다. 이□□씨의 경우 야학으로 신명의숙을 다녔는데 어머니는 교육을 받으면 시집을 못 간다 하여 반대했지만 아버지가 허락한다는 말은 안했지만 침묵했으므로 밤이면 아버지의 짚신을 동여매어 신고 가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과정까지 공부했으므로 일본에 돈 벌러 갔을 때에도 집에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2008, 제주여성문화유적 760쪽)


대림리복지회관 마당에 昭和3년(1928)1월에 대림리 명의로 세운 塾長任昌圭記念碑(獎學誠力先後一揆誌以頌功永久不替)가 있으나 임창규가 신명의숙의 숙장이었는지는 미상이다.
《작성 1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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