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한해 30-40명 해녀들 독도에서 물질..협재리 울릉도출어부인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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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한해 30-40명 해녀들 독도에서 물질..협재리 울릉도출어부인기념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4.08 07: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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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보다 더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하여서였다.

협재리 울릉도출어부인기념비

 

위치 ; 한림읍 협재리노인당
유형 ; 비갈(기념비)
시대 ; 대한민국(1956)

협재리_부인회관련기념비들
협재리_울릉도출어부인기념비

 


비문 ; 〈앞〉울릉도출어부인긔념비 〈옆①〉단긔四二八九년七월 일 협재리대한부인회 근슈 〈옆②〉객고풍상 성심성의 애향연금 영새불망


〈옆②〉비문은 客苦風霜 誠心誠意 愛鄕捐金 永世不忘일 것이다. 협재리 부인들 중에서 독도에 출어했던 분들이 많은데 그 분들이 마을 발전을 위해 자금을 희사했고 이를 칭송하는 비석으로 보인다. 독도라고 쓰지 않고 울릉도라고 쓴 것은 독도가 별로 알려지지 않고 울릉도가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한림읍 협재리 여성들은 1950년대에 독도까지 물질하러 갔다. “처음 독도에 물질 간 사람들은 우리 협재 사람들인데, 이춘양, 박영개, 김순하, 장순호, 강정랑, 박옥랑 여섯 명이라.”(협재리 해녀 김순하씨 증언=해녀박물관)


1953년에는 협재리 홍춘화 해녀가 1953년부터 13년간 독도에서 물질했다. 전복과 소라를 채취했으며 채취권을 얻기 위해 울릉도 수협에 비용을 지불했다.


1954년에는 김순하, 강정랑, 장순호, 홍선정, 박영계, 이정수 해녀 등은 울릉도에서 선박에 싣고 막사 건조용 통나무 작업에 참여했다.(이 분들은 2008년 독도사랑해녀회를 조직하였다.)


1955년에는 김정연, 임복녀, 홍성숙, 홍춘화 할머니 등 약 30명의 제주해녀들이 한꺼번에 독도에 입도해서 미역 등 해산물을 채취했다.


1956년 이후에는 한해에 30-40명의 해녀들이 독도에서 물질했다.(경북일보 080926)(이 분들이 협재리 출신일 가능성 높음)

(http://cp0905.culturecontent.com/pavilion/index.asp?page=3&subPage=4&tab=2 사이버파빌리온)


제주 해녀들은 자기 고장에서만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방이나 외국으로 나가 몇 개월씩 출가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제주해녀들은 19세기 말 부산·울산 등 경상남도 지방으로 출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경상북도와 강원도를 거쳐 청진에 이르기까지 점점 동해안일대를 누비며 북상하였고, 남해안·서해안 및 울릉도·흑산도에 이르기까지 본토의 각 해안뿐만 아니라, 객주(客主)의 인솔에 따라 일본 각지와 블라디보스토크, 요동반도의 다롄(大連), 산둥성(山東省)의 칭다오(靑島)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들은 봄에 나가서 가을이면 돌아왔다.


이들의 출가 이유는 본토의 각 연안이나 외국 바다에도 값이 비싼 해조류와 패류 등이 많았으나 이를 캘 해녀가 없으므로, 그곳에 가서 제주도에서보다 더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하여서였다. 1920년대부터 광복을 맞을 때까지 일본 각처에 약 1,500명, 우리 나라의 각 연안에 약 2,500명이 출가하였던 것으로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다음은 2009년 제주도 해녀 박물관에서 개최된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당시 독도에서 물질을 하던 제주해녀들의 경험담이다.


박옥랑(1953년 독도 입도 76·여) = 작업을 할 때마다 순시선이 계속 접촉해 왔는데 일본은 당시에도 독도에 대한 야욕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해녀들이 간혹 전복을 캐내 수비대원들에게 주면 이들은 좋아서 야단 들이었다.

풍랑이 칠 때면 울릉도와 독도를 연결하는 배가 뜨지 않아 먹을 것이 떨어진 해녀들과 수비대원들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갈매기알을 주워 먹었다.


조봉옥(81·여) = 수비대원들이 갈매기알을 주워 삶은 후 해녀들에게 나눠줬고 미역을 베다가 손을 다치면 의약품을 가져와 치료를 해줬다. 특히 '대장'으로 불렸던 홍순칠씨는 미역을 운반해 주고 날씨를 알아봐 주는 등 해녀들에게 은인 이었다.


김공자(70·여. 1959년 독도입도) = 제주해녀들이 독도에 수시로 머물면서 나중에는 30, 40명이 살 수 있도록 굴속에 나무를 이용해 숙소가 마련돼 사람들이 정착하는 데 안도감을 갖게 됐다.


독도의용수비대와 제주해녀들의 만남은 1953년부터 3년 8개월간 지속됐다가 지난 1956년부터는 국립경찰이 독도경비를 맡으면서 이들의 인연도 멀어지게 됐다.(경북일보 2009-06-15)
《작성 1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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